세종대로의 끝에 당당한 풍채로 서 있는 광화문.
최근 광화문 앞에는 넓은 단이 새롭게 조성되었습니다. 이를 월대라고 하는데요.
왜 수십 년간 없었던 월대를 다시 만들었을까요?
태조 이성계와 삼봉 정도전은 조선을 건국하면서 1395년(태조 4년) 경복궁을 짓고, 정문으로 광화문을 세웠습니다.
당시 광화문은 2층 누각 구조의 목조 건물로 지어졌으며, 누각 안에는 종과 북을 달아 매일 새벽과 저녁에 시간을 알렸다고 합니다.
광화문이란 이름은 1426년(세종 8년) 집현전 학자들이 붙인 것으로, "임금의 큰 덕(光)이 온 나라를 비춘다(化)"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광화문에는 세 개의 홍예문이 있는데, 가운데 큰 문은 임금이, 양쪽의 작은 문은 신하들이 출입했습니다.
1906~1907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광화문은 목조 건축물의 모습으로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또한 광화문 아래 월대는 두꺼운 돌로 쌓여 있었고, 그 위로 2층 누각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건국과 함께 건설한 조선의 정궁입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후 막대한 재원과 인력 동원의 문제로 쉽게 중건하지 못하고 있었죠.
이러한 경복궁은 1865년(고종 2) 4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868년 7월 완성되었고, 준공과 함께 고종은 새로 건설된 경복궁으로 이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동안 수난을 겪게 됩니다.
일제는 나라의 정기를 끊기 위해 조선의 상징인 경복궁 앞에 떡하니 조선총독부를 세웠습니다.
이때 광화문은 경복궁 동쪽 건춘문 옆으로 이전되었습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1950년 한국전쟁 때 광화문의 목조 부분은 불에 타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1968년, 경복궁 앞에 광화문을 재건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기보다는 빨리 광화문을 만들어 놓고 싶었던 마음이 앞서 아쉬움을 남긴 복원이었습니다.
원래보다 약간 축이 틀어진 위치에 목조가 아닌 철근콘크리트로 세워졌거든요.
당시 뉴스에 따르면, "한글 간판 '광화문' 현판 하나를 제외한다면 새로 생긴 광화문에서 나무라고는 한 토막도 찾아볼 수 없으며 모든 자재가 돌, 시멘트 그리고 철근으로 되어 있습니다(대한뉴스 705호)."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조선총독부 건물이 광화문 뒤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드디어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습니다.
경복궁의 경관을 다시 찾아가게 되었죠.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한 대대적인 복원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철거하고 고종 때 중건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하며, 원래의 목조 구조와 원래의 위치를 되찾기로 했습니다.
한번 훼손된 것을 원형으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료조사와 정밀실측이 필요합니다.
2010년 8월 15일 광복 65주년 기념식에 맞춰 복원된 광화문은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2023년 10월 광화문은 월대와 현판을 복원하였습니다.
2010년 복원 진행 중 지반과 석축 발굴조사로 옛 광화문의 월대와 계단 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월대는 중요한 건물 앞에 놓아 건물의 격을 높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광화문의 월대 복원은 광화문이 경복궁의 정문으로서 격이 있는 건물임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2010년 당시 복원한 현판은 흰색 바탕에 검은 글자였는데, 복원 직후 3개월 만에 표면에 균열이 생기면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후 고종 때 경복궁의 중건 과정을 모두 기록한 일기 형식의 책인 『경복궁영건일기』에서 '흑질금자(黑質金字)', 즉 검은 바탕에 금박 글씨라고 한 점이 확인되어, 2023년 전통 방식으로 단청하고 금박 동판 글씨를 입힌 한자 현판으로 교체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하게 그 자리에 있는 줄 알았던 광화문.
사실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랑스럽고 귀한 우리의 광화문입니다.
광화문과 경복궁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는데요.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 옥상정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