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카라를 여행해 본 여행자들은 레이크사이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도 눈부신 히말라야 산군과 아름다운 페와 호수를 볼 수 있는, 몸과 마음이 모두 힐링되는 여행자 거리로 기억하고 있을 테지.
그런데 난 레이크사이드라고 하면 가장 먼저 버스 파업이 떠오른다. 지금까지 레이크사이드를 세 번 여행했는데, 그중 두 번은 버스 파업 때문에 생고생을 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2002년 겨울 인도 바라나시로 시간여행을 떠나야 한다. 난 그때 매일 바라나시 가트에 앉아 짜이를 홀짝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기가 질려서일까? 당분간 바라나시 가트 밖으로 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옴 레스트 하우스에서 만나 친해진 여행자들이 포카라로 함께 가자며 나를 꼬드겼다.
“포카라 가 봤냐? 아침에 페와 호수에 비친 히말라야를 보면 말이지. 이건 캬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진짜야! 너도 가보면 왜 다들 포카라를 배낭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고 하는지 알게 될 걸.”
아닌 게 아니라 한 달 동안 인도에서 이리저리 치인 내 영혼은 너덜너덜 해지다 못해 거의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그 친구들을 따라나섰다. 그런데 아뿔싸! 그게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일 줄이야.
우리는 새벽 6시에 바라나시 정션 역에서 기차를 타고 고락푸르로 향했다. 원래는 11시에 도착 예정이었지만, 1시간 30분 정도 연착해서 12시 30분에 고락푸르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들의 표정은 해맑았다.
우리는 다시 소나울리로 가기 위해 고락푸르 역을 빠져나왔다. 소나울리는 네팔 국경과 맞닿아 있는 마을로 고락푸르에서 버스를 타고 약 4시간 정도 가야 한단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으니 손가락으로 소나울리행 로컬 버스가 서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고락푸르 역에서 똑바로 걸어 나와서 길을 건너자 왼쪽에 낡은 로컬 버스 한 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인도 로컬 버스구나. 하, 정말 심각하다. 심각해."
인도 여행이 처음인 준수는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버스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 로컬 버스는 페인트가 벗겨지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려웠고, 녹슬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깨지고 찌그러진 범퍼는 붙어 있는 게 용해 보였다. 준수가 우거지상을 하고 닳고 닳은 타이어를 발로 톡톡 차고 있는데, 운전수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소나울리? 뒤에 있는 버스 타!”
'아 다행이다!' 그런데 그 버스 뒤에 서 있던 로컬 버스는 조금 전 그 버스보다 허월씬~~ 더 낡은 버스였다. 적어도 10년 전쯤에 폐차장으로 갔어야 하는 버스였다. 운전석에는 계기판도 없었고, 핸들은 붙였다 떼었다 할 수있는 건지 의자에 올려져 있었다. 반면에 앰프는 빵빵했다. 음악을 얼마나 크게 틀어 놓았던지 옆 사람의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모두 다른 노래였겠지만, 왠지 내 귀에는 똑같은 노래가 무한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준수는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연실 끄덕이며 실실 웃고 있었다. 앞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아마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으리라.
가장 큰 문제는 의자의 각도였다. 90도 각도로 똑바로 세워져 있는 의자에는 쿠션이 1도 없었다. 의자 폭도 너무 좁아서 우리 넷은 자대에 처음 배치받은 신병들처럼 차렷 자세로 앉아 있어야만 했다. 만약 그때 누가 내 팔을 툭 건드렸다면, 나도 모르게 관등성명이 튀어나 왔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버스는 기적적으로 아무 사고 없이 정확하게 4시간 후에 소나울리에 도착했다. 인도 이미그레이션에서는 여권을 내밀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웃 스탬프를 쾅 쾅 찍어 주었다. 인도 이미그레이션에서 네팔 이미그레이션까지는 도보로 한 1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도중에 릭샤왈라들의 호객행위가 있었지만, 우리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재빨리 인도 국경을 넘어갔다. 네팔 이미그레이션에서는 25달러를 내자 그 자리에서 15일짜리 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절차도 번거롭지 않았다.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폭풍의 눈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포카라행 버스를 타기 전에 저녁을 먹을 요량으로 터미널 앞에 있는 식당을 찾았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비위생적인 식당은 수없이 많이 봐왔지만, 그 식당은 유독 지저분했다. 언제 청소를 했는지 식탁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고, 수저통에 꽂혀 있는 수저에는 노란 얼룩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그래도 허기를 달래려면 뭐든 먹긴 먹어야 했기에 토스트 4인분 하고, 삶은 달걀 10개를 주문했다.
한 20분 정도 지났을까.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뭘로 구웠는지 토스트는 새까맣게 타 있었고, 달걀은 터져 흰자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불평을 늘어놓을 힘도 없었다. 그래도 먹고살겠다고, 수저로 탄 부분을 박박 긁어내고 있는데, 식당 주인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오늘은 번다( 파업)가 있어서 포카라로 가는 버스 없어.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가. 우리가 숙소도 함께 하거든. 싸게 해 줄게.”
원래 네팔은 오랫동안 왕정 국가였는데, 네팔 공산당이 중심이 되어 2008년도에 왕을 쫓아내고 공화국을 수립했다. 물론 이 과정이 물 흐르듯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2000년도를 전후해서 네팔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정치적 갈등이 있었고, 노동자들은 툭하면 파업을 했다. 정치가 극도로 불안정했던 시기였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버스 노조 파업이 가장 큰 골칫덩어리였다. 네팔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버스가 파업하는 날에는 교통이 완전히 마비되어 꼼짝없이 발이 묶여 버렸기 때문이다.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식당 주인이 운영하고 있다는 숙소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포카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걱정 마. 번다는 오늘까지야. 내일 아침 6시~8시 사이에 포카라로 가는 버스 있어.”
나는 식당 주인의 말이 사실이길 기도하며 잠을 청했다. 잠자리는 불편했지만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역시 잠에는 피곤이 약인가 보다. 다음 날 아침 6시, 우리는 배낭을 짊어지고 버스 터미널 앞 사무실로 향했다. 혹시 자리가 없을까 봐 마음이 바빴다. 이미 사무실 앞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처럼 발이 묶인 서양인 여행자들도 꽤 여럿 있었다. 여행자들은 터미널 한쪽에 배낭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버스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9시에 출발한다는 버스는, 12시로 변경되었고, 12시 정각에 출발한다던 버스 시간은 다시 1시로 변경되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 혹시 인내심의 한계를 실험해 보고 싶은 분이 있다면, 소나울리 버스 터미널을 강력 추천한다. 1시에 출발한다던 버스는 슬그머니 2시로 변경되었고, 2시에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떠난다던 버스는 3시가 되어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날 난 부처님이 왜 하필 이 근방에서 깨달음을 얻으셨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무념무상, 색즉시공, 인생무상의 경지에 들려고 할 때쯤 드디어 기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배낭을 짐 싣는 칸으로 휙휙 던지기 시작했다. 결국 버스는 오후 3시 20분이 돼서야 시동이 걸렸다. 버스 이름은 어울리지 않게 꽤나 거창했다. 포카라 익스프레스! 소나울리에서 포카라로 논스톱으로 가는 버스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파업 때문인지, 그 버스는 지나가는 동네마다 멈춰 서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꾸역꾸역 다 태웠다. 버스 안은 곧 서 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북적였다. 나는 다행히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냥 편하진 않았다. 손잡이 대신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려는 사람들이 있어 그 손길을 맹렬히 뿌리쳐야만 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해가 져서 어디가 어딘지 전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꼬블꼬블 산길을 끊임없이 오르던 버스는 지린내가 코를 찌르는 휴게소에 멈춰 섰다. 그러자 승객들이 갑자기 우르르 내렸다. 버스에 남아 있는 건 외국인 여행자들 뿐이었다.
'또 뭐지?'
여행자들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돌발상황에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그때 운전수가 다시 버스에 오르더니 우리 보고 내리라고 손짓을 했다. 버스 파업 때문에 포카라로 가려면 여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나 뭐라나.
다행히 요금을 따로 받진 않았지만, 갈아 탄 버스에는 운전사가 없었다. 우리는 하염없이 운전수님이 빨리 나타나 주시길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참 지랄도 가지가지한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서양인 여행자들은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외국어라 정확한 뜻은 이해할 할 수 없었지만, 무지무지 심한 욕설인 건 분명했다.
운전사는 1시간 정도 후에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났는데, 미안하다는 인사 한 마디 없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하도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보니, 이 정도의 일은 사과할 거리도 안 되는 걸까?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서양인 여행자들은 아직 분이 덜 풀렸는지, 운전사를 향해 꼬치꼬치 따졌다. 그때마다 운전사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노 프라브럼!"
버스는 다시 구불구불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피곤했지만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이어서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얼마나 머리로 창문을 쓸었던지,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던 창문이 뺀질뺀질 해져 있었다. 그러다 깜박 잠이들었는데, 갑자기 버스가 멈춰 서는 바람에 잠이 싹 달아났다.
처음에는 휴게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버스 앞 약 30미터 전방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손전등을 든 군인들이 바리케이드 앞에 서 있었다.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별별 경험을 다 해 봤지만 이런 일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총을 든 군인 둘이 버스에 올라타더니 네팔 말로 모두 버스에서 내리라고 명령했다. 승객들은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이런 검문도 늘 있는 일상일까? 여행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야, 이게 무슨 상황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설마 마오이스트들은 아니겠지?"
내가 작은 배낭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총을 든 군인이 짐은 그대로 버스에 두고 내리라고 명령했다. 나는 얼른 가방을 자리에 내려놓고 두 손을 높이 들어 보였다.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은 마치 적군에게 잡힌 포로들처럼 일렬로 서서 바리케이드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 넷도 일렬로 서서 그들의 뒤를 따랐다. 바리케이드 쪽에 서 있던 군인들이 손전등으로 승객들의 발밑을 비춰주고 있었는데, 영락없이 중동을 배경으로 하는 전쟁 영화 속 한 장면이었다.
총을 든 군인 두 명이 버스 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모습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현지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리케이드 뒤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여행자들은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라고 있었다. 이윽고 군인들이 버스에서 내려 손짓을 하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운전수가 다시 버스를 운전해 바리케이드 쪽으로 몰고 왔다. 버스가 정확하게 바리케이드 앞에 멈췄지만 아무도 올라타는 사람이 없었다. 군인들이 승차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에야, 승객들은 차례차례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2002년은 네팔의 정치 상황이 몹시 불안정한 시기였다. 2001년도에 반군 세력이었던 마오이스트들이 네팔 국왕인 비렌드라 국왕을 피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비렌드라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가렌드라 국왕은 형의 복수를 하겠다며 강력한 무력 진압을 천명하고 나섰다. 이에 마오이스트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저항을 이어갔다.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마오이스트들이 군비를 마련하기 위해 지나가는 버스를 탈취했다거나, 트레킹 중이던 여행객들이 짐을 털었다거나 하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러니 한 밤 중에 산길에서 총을 든 군인들에게 검문을 당한 우리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새벽 5시, 마침내 우리가 탄 버스는 댐 사이드 근처에 있는 투어리스트 버스터미널에 멈춰 섰다. 배낭에 켜켜이 쌓여 있는 먼지를 발로 탁탁 털어내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히말라야 산군이 병풍처럼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라나시를 떠난 지 꼬박 47시간 만에 포카라에 도착한 것이다. 포카라를 둘러싼 히말라야 산군을 눈으로 직접 보니 그동안의 피로가 눈 녹듯 샤르르 사그라들었다,라고 글을 마무리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다. 그 아름다운 히말라야 절경을 처음 보고 내가 처음 내뱉은 말은 "내가 다시 포카라에 오면 사람이 아니다."였다. 실은 중간에 욕지거리가 섞여 있었지만, 차마 글로 옮길 수 없어 뺐다.
바라나시에서 포카라까지의 이동은 정말이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런데 왜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의 상황이 어젯일처럼 또렷할까? 욕을 내뱉으면서 본 그 히말라야 산군의 모습은 왜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걸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 실감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