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시간이 멈추는 곳

-여행자 거리 시리즈: 네팔 포카라 레이크 사이드 2

by 황근기

“앗, 빨랫줄이다.”


포카라 짱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앗, 빨랫줄이다."를 외쳤다. 포카라 짱 게스트하우스는 이층 양옥으로 기역자 모양의 숙소였는데, 잔디가 깔려있는 작은 마당에는 빨랫줄이 걸려 있었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배낭에 처 박아 두었던 빨랫감을 꺼냈다. 빨랫감이 아닌 옷이 없었다. 하긴, 이 주 동안 빨래를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오죽할까. 지금 입고 있는 팬티도 벌써 3일 동안 안 갈아입은 것 같다. 아니, 4일이던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서는 단무지 썩은 냄새 같은 게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장시간의 이동으로 너무 피곤했지만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앞섰다. 팔을 걷어붙이고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해서 빨래를 밟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코, 세상에! 이게 뭐야. 구정물이 얼마나 까맣던지 누가 볼까 겁이 났다. 손도 시리고, 초스피드로 빨래를 빨아 빨랫줄에 널었다.


빨래를 널자마자 침대에 누운 건 기억이 나는데,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을 떠보니 벌써 오후가 되어 있었다. 일행들은 그 시간까지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자자, 일어나. 밥 먹고 자자.”

나는 양치기가 양을 몰듯 꾸물거리는 일행들을 몰고 레이크 사이드로 나왔다. 레이크 사이드에는 기념품 가게, 게스트 하우스, 여행사, 은행, 식당, 상점, 트레킹 용품점, 책방, 레코드 가게 등이 보였다. 한국인이 많이 찾는 여행자 거리여서 그런지 유난히 한국 음식점들이 많았다. 서울 뚝배기, 소바따네, 산촌다람쥐 등의 한식당이 있었는데, 우리는 숙소 근처에 있는 서울 뚝배기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라면부터 된장찌개까지 메뉴가 다양했다. 한동안 탈리와 짜파티만 먹다가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한국음식을 먹으니 살 것 같았다. 얼마나 싹싹 핥아먹었던지, 내가 먹은 그릇은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서울 뚝배기를 나온 우리는 따뜻한 포카라의 태양을 머리에 이고 페와 호수로 나왔다. 원래 포카라(Pokhara)는 네팔어로 ‘호수’라는 뜻이라고 한다. 페와 호수 주변을 활처럼 빙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 ‘레이크 사이드’이고, 호수 남쪽 댐 주변 지역에 형성되어 있는 여행자 거리가 ‘댐 사이드’이다. 원래 포카라의 여행자 거리는 댐 사이드가 원조로, 예전에는 댐 사이드에도 많은 여행자들이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레이크 사이드가 개발되면서부터 댐 사이드는 차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레이크 사이드와 접해 있는 페와 호수는 천연의 자연호수가 아니고, 히말라야 설산에서 녹아내린 물을 댐으로 막아서 만든 인공호수다. 천천히 페와 (Fewa)호수 주변을 산책하다 보니 비로소 긴 여행의 피로가 풀리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포카라는 인도나 카트만두에 비해 차도 훨씬 적고, 호객꾼들도 없고, 공기도 깨끗했다. 무엇보다 페와 호수를 끼고 형성되어 있는 산책로가 마음에 들었다. 일행들의 생각도 나와 다르지 않은 듯, 너도나도 한 마디씩 했다.

"캬아~ 이래서 레이크 사이드를 배낭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고 하는구나."


페와 호수를 걷다 보면 이상하게 시간 감각이 좀 흐려진다. 한 30분 정도 산책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2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지 뭔가. 일행들은 잠을 더 자야겠다며 숙소로 돌어갔고, 나는 따뜻한 포카라의 오후 햇살을 만끽하며 혼자 산책길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잔디밭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한국인 배낭 여행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열렬한 포카라 예찬론자들이었다.

“포카라에서는 사실 별로 할 일이 없어요. 그래서 오히려 더 좋은 것 같아요.”

“맞아요. 살면서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날은 별로 없잖아요.”

“전 한국에 있을 때는 늘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사로 잡혀 있었어요. 그런데 포카라에 온 뒤로는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들어요.”


그들은 이미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쳤다고 한다. 원래는 트레킹을 끝낸 뒤 카트만두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포카라가 너무 좋아서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는 중이란다. 아마도 조만간 나도 그들처럼 포카라 예찬론자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누가 “페와 호수가 그렇게 아름답나요?”라고 묻는다면,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이라고 말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실 페와 호수보다 아름다운 호수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사람이건 호수건 겉모습만으로는 제대로 된 평가를 하기 힘들다. 페와 호수는 이름 있는 호수들처럼 눈부시게 아름답진 않지만, 여행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호수다.


그 매력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우선 페와 호수는 소박하고 수수하다. 흐린 날이나 맑은 날이나 변함없이 늘 잔잔하다. 그러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여행자들은 호수 근처에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노래를 부르고, 현지인들은 호수에서 빨래를 한다. 사람들은 호수 한가운데 있는 섬에서 신에게 기도를 드리기 위해 배를 타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일까. 페와 호수 주변에는 사람 냄새가 넘쳐난다.


페와 호수 근처에 죽치고 앉아 주변 풍경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랑곳 방향을 보면 와이파이 신호처럼 보이는 것들이 하늘에 둥둥 더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포카라의 페러글라이딩은 페와 호수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즐길 수 있는데, 오전에 날씨 좋은 날 타면 히말라야의 설산들을 눈높이에서 볼 수 있다. 파일럿의 말에 따르면, 페와 호수 위의 기류는 안정적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30분 정도는 안전하게 하늘에 떠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저녁이 되자, 한가로운 저녁 시간을 즐기려는 여행자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탁 트인 폐와 호수와, 그 주위를 겹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들, 그리고 한가롭게 배를 타는 사람들.... 이런 풍경이 하나가 되면서 여행자의 시간은 점점 더 느리게 흘러간다. 뱃사공은 어둠이 내리기 전에 영업을 마치기 위해 배들을 하나 둘 밧줄로 묶고, 밧줄에 붙잡힌 배들은 뱃머리를 찰랑거리며 마지막 저녁 햇살을 잘게 부수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자마자 어둠은 페와 호수의 풍경을 순식간에 지워 버린다. 그제야 여행자들은 슬그머니 일어나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나도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정전이 일상이라, 정전이 돼도 누구 하나 동요하지 않는다. 촛불 아래서의 식사는 나름 운치가 있었다. 식당을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호수를 보니, 호수는 산 그림자가 새겨진 검은 이불을 덮고, 구름 한 점 없는 히말라야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포카라에 온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갑자기 시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누군가에겐 배낭 여행자들의 생활이 낭만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배낭 여행자들의 하루도 따지고 보면 일상생활 못지않게 바쁘다. 사실 배낭 여행자들은 늘 시간에 쫓겨 산다. 다음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지로 가기 위해 티켓을 끊고, 숙소를 잡고, 계획을 세우고, 볼거리를 찾아다니다 보면 또 다른 목적지로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허겁지겁 길을 나서다 보면, 가끔 여행에 지칠 때가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포카라만 오면 다음 목적지를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상하게도 포카라에서는 그냥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어 진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게 너무 아쉽고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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