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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민주주의를 지켜온 보이지 않는 규범

by 박카스

『5장 민주주의를 지켜온 보이지 않는 규범』에서는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헌법이나 법률 못지않게, 정치인들 사이에 공유되는 비공식적 규범이 필수적이다. 저자들은 특히 두 가지 규범을 상호 관용과 자제를 민주주의의 핵심 규범으로 제시한다.


상호 관용이란, 정적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민주주의 안에서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 관용이 약해지면, 정치적 분열은 증오로 바뀌고, 결국 민주주의는 적대적 양극화 속에서 무너진다.


자제란, 법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제도나 권력을 남용하지 않으려는 절제의 자세를 말한다. 예를 들어, 법 해석의 빈틈을 이용해 상대를 제거하거나, 사법기관이나 입법 권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유혹을 스스로 억제하는 것이다. 이런 자제가 사라질 때, 민주적 제도는 유명무실해지고 권력의 균형은 무너진다.


이 두 규범은 명시된 법이 아니기 때문에 취약하며, 정치적 경쟁이 격화될수록 쉽게 훼손된다. 민주주의가 제도로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를 존중하고 지키려는 정치문화와 행동양식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헌법이라고 하는 보호 장치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지키기에 충분할 것일까? 우리 두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잘 설계된 헌법이라고 해도 때로는 실패한다. 가령 독일의 1919년 바이마르 헌법은 국가 최고 법률가들에 의해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독일의 유서 깊고 존중하는 ‘법치국가’라는 개념만으로도 지도자의 권력 남용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바이마르 헌법과 공화국은 1933년 히틀러의 권력 강탈에 무너지고 말았다. (...)


마찬가지로 필리핀의 1935년 헌법 역시 ‘미국 헌법의 충실한 복사본’으로 여겨졌다. (...) 하지만 마르코스 대통령은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도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1972년 계엄령 선포 후 헌법을 철폐해버리고 말았다. (...)


아무리 잘 설계된 헌법도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못한다. 우선 모든 헌법은 불완전하다. 여러 다양한 규칙과 마찬가지로 헌법안에는 수많은 공백과 애매모호함이 존재한다. (...)


다음으로 헌법 조항은 여러 다양한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농후하다. (...) 헌법 조항이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다면 후손은 건국자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헌법을 악용할 위험이 있다.


마지막으로 헌법 조항의 문구를 있는 그대로 기계적으로 해석할 경우, 법의 취지를 훼손할 위험이 있다. (...)


법체계에 본질적으로 내포된 개념적 공백과 의미는 모호함 때문에 헌법 조항에만 의존해서는 민주주의를 잠재적 독재자의 횡포로부터 지켜낼 수 없다. 미국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은 이렇게 말했다. “신은 가만히 내버려둬도 완전하게 작동하는 통치 체제를 개발할 수 있는 뛰어난 지혜를 그 어떤 정치인이나 철학자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


모든 성공적인 민주주의는 비공식적인 규범에 의존한다. 비록 이러한 규범은 헌법이나 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시민사회에서 널리 존중받는다. (...)


규범의 가치는 물과 산소처럼 그것이 사라질 때 비로소 드러난다. (...) 규범을 어긴 정치인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


민주주의의 수호에 가장 핵심 역할을 하는 두 가지 규범을 꼽자면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들 수 있다. (P.128~132)


상호 관용이란 정치 경쟁자가 헌법을 존중하는 한 그들이 존재하고, 권력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개념이다. (...) 결론적으로 상호 관용이란 자신과 다른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인들의 집단 의지를 뜻한다. (...)


미국 건국 초기에도 야당은 곧 이단이었다. (...) 실제로 제퍼슨과 매디슨이 이후 공화당으로 성장한 단체를 조직했을 때 연방주의자들은 이들을 반역자로 취급했다. (...) 미국 정치인들이 상대 당이 적이 아니라, 돌아가면서 권력을 차지하는 경쟁자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뒤였다. 바로 이러한 관용에 대한 인식이 미국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핵심 근간이 되었다. (P.133~136)


민주주의 생존에 중요한 두 번째 규범은 우리가 ‘제도적 자제’라 부르는 개념이다. ‘자제’란 “지속적인 자기통제, 절제와 인내”, 혹은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를 뜻한다. 또한 법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입법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자제 규범이 강한 힘을 발휘하는 나라에서 정치인들은 제도적 특권을 최대한 활용하려 들지 않는다. 비록 그게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해도 기존 체제를 위태롭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제도적 자제는 민주주의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


“임명은 왕의 특권이다. 공식적으로 왕은 내각 구성을 책임질 총리를 자기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영국 총리는 하원에서 다수를 차지한 정당의 일원으로서 일반적으로 당 대표가 맡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관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영국의 왕들은 수세기에 걸쳐 그 관습을 자발적으로 따랐다. 총리 임명과 관련된 어떤 성문화된 법률은 지금도 찾아볼 수 없다.


다음으로 대통령 임기 제한에 대해 생각해보자. 미국 역사상 두 번의 임기 제한은 법률이 아니라 자제가 규범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1952년 수정헌법 제22조가 추가되기 전까지, 미국 헌법의 어떤 조항도 대통령이 최대 두 번의 임기로 물러나야 한다고 명시하지 않았다. 다만 조지 워싱턴이 1797년에 두 번의 임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 선례로 남았을 따름이다. (...)


미국 역사상 이 규범을 위반한 유일한 사례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1940년 삼선뿐이었다. 그리고 루즈벨트의 위반은 결국 수정헌법 22조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자제 규범은 특히 대통령제 민주주의에서 그 가치가 높다. (...) 견제받지 않는 대통령은 사법부를 친정부 인사로 채우고, 행정명령을 남발하여 의회를 우회한다. 반대로 의회가 막강한 힘을 가졌을 경우, 대통령의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예산 권한을 빌미로 행정부를 혼란에 빠트리겠다고 위협할 수 있다. 혹은 석연치 않은 근거를 내세워 대통령 탄핵을 추진할 위험도 있다.


자제의 반대는 제도적 특권을 함부로 휘두르는 것이다. 법학자 마크 터쉬넷은 이를 ‘헌법적 강경 태도’라고 불렀다. (...)


헌법적 강경 태도를 활용한 대표 사례로 아르헨티나 대통령들을 꼽을 수 있다. 1940년대 후안 페론 대통령은 의회 내 다수 지위를 활용하여 세 명의 대법관을 해임했다. (...)


헌법적 강경 태도를 위해 사법부를 활용한 경우도 있다. (...) 베네수엘라 대법원은 6개월 동안 24회의 재판에 걸쳐 의회에 불리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의회가 승인한 모든 법안”을 무효화해 버렸다.


입법부 또한 그들의 헌법적 특권에 탐닉할 위험이 있다. (...) 의회 내 인맥이 없었던 아웃사이더 루고 대통령(파라과이 페르난도 루고 대통령)은 임기 내내 탄핵 위기를 겪어야 했다. 2012년 루고의 인기가 시들고 예전 자유당 인사들마저 그를 저버리면서 의회의 탄핵 시도는 성공을 거뒀다. 탄핵의 시발점은 공유지를 무단으로 사용하던 농부들이 경찰 병력과 충돌한 사건이었다. (...) 그 사건이 벌어진 지 6일이 지난 6월 21일, 의회는 ‘의무불이행’을 근거로 대통령 단핵안 표결을 추진했다. 그리고 며칠 후, 하루 만에 서둘러 진행된 탄핵 심판에서 루고는 두 시간밖에 변론 기회를 갖지 못했고, 결국 상원은 루고 대통령의 탄핵을 승인했다. 한 정치 평론가는 이번 탄핵이 “순전히 코미디였으며 (...) 재판 절차에서 최소한의 형식조차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루고의 탄핵은 분명하게도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P.137~142)


상호 관용의 규범이 허물어질 때 정치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제도적 권력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한다. (...) 패배의 대가가 심각한 절망일 때 정치인들은 자제 규범을 포기하려는 유혹에 넘어간다. 헌법적 강경 태도는 관용과 규범을 허물어뜨림으로써 경쟁자가 위협적인 존재라는 인식을 키운다. 그 결과 정치판에서 민주주의 가드레일이 사라진다.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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