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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합법적으로 전복되는 민주주의

by 박카스

『4장 합법적으로 전복되는 민주주의』에서는 민주주의는 더 이상 폭력이나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약화되고 파괴된다. 이러한 지도자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아 합법적으로 권력을 획득하지만, 이후에는 제도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들을 잠식해 나간다. 이들은 법을 고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사법부와 입법부 같은 견제 기관을 약화시키며, 언론과 시민사회를 위축시킨다.


특히 이들은 헌법을 교묘하게 이용하거나,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거나, 정적을 범죄자로 몰아 제거하는 등 법적·제도적 수단을 통해 권위를 강화한다. 외견상 합법적 절차를 따르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점진적인 변화로 인해 위기의식을 갖지 못한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선출된 권위주의적 독재자들에 의해 서서히 진행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따라서 국민들은 합법성이라는 외피에 속지 말고, 민주주의의 정신과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선출된 대중선동가 일부는 독재를 향한 뚜렷한 청사진을 갖고 취임하지만, 후지모리의 경우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사실 청사진 없이도 민주주의는 붕괴할 수 있다. 페루 역사가 말해주듯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다시 말해 민주주의 규범을 허무는 선동적 지도자와 위기를 느낀 기성 정치 세력 사이에 고조되는 갈등의 결과로 민주주의는 붕괴한다.


붕괴의 과정은 대게 말로 시작된다. 대중선동가는 비판자를 적이나 체제 전복자, 심지어 테러리스트라며 도발적으로 비난한다. (...)


언론인들 또한 이들의 공격 대상이 된다. (...) 이러한 공격은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권에 반대하는 인물이 테러 집단과 연관이 있고, 언론이 가짜뉴스를 퍼트린다는 주장을 대중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독재자는 그들에 대한 탄압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다. (...)


위협을 느낀 언론은 정부를 어떻게든 무력화하기 위해 자제와 전문가로서의 윤리를 저버린다. 또한 야당은 공공의 선을 위해 탄핵이나 대규모 시위, 혹은 쿠테다 등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여 정권을 허물어뜨릴 방안을 모색한다. (...)


민주주의는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다. 가족 소유의 기업과 군대는 명령에 따라 수직적으로 움직이지만, 민주주의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협상과 양보 · 타협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후퇴는 피할 수 없고, 승리도 언제나 부분적이다. 대통령이 발의한 법안은 의회 승인을 얻지 못하거나, 사법부의 반대로 무산될 수 있다. 모든 정치인은 이러한 제약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인은 제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리고 비판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아웃사이더들에게, 특히 선동 성향이 강한 독재자들에게 이와 같은 민주주의의 속성은 견디기 힘든 속박이다. 견제와 균형은 그들에게 멍에와 같다. (P.99~101)


대부분의 경우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은 점진적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시민들 대부분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한다. 어쨌든 선거는 주기적으로 실시된다. 야당 정치인은 여전히 의회에서 활동한다. 신문도 그대로 발행된다. 그러나 민주주의 붕괴는 특히 초반에 단편적인 형태로 일어난다. 개별적은 사건만 놓고 본다면 어느 것도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독재자의 시도는 종종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 독재자는 의회 승인을 얻고, 대법원으로부터 합법 판결을 받는다. (...)


정권의 충신들이 이들 기관(법원과 검찰, 정보기관, 국세청, 규제 기관)을 장악할 때 이러한 제도는 권력을 제어하기 위한 수사와 고발을 차단함으로써 잠재적 독재자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할 경우 대통령은 마음대로 법을 어기고, 시민권을 위협하고, 심지어 수사나 검열에 대한 걱정 없이 헌법을 위반한다. 그리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사로 사법부를 채우고 법 집행기관의 힘을 무력화함으로써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권력을 휘두른다. (...)


인사 교체가 쉽지 않은 기관은 다른 미묘한 방식으로 장악할 수 있다. (...) 몬테시노스가 이끄는 페루 국가정보원은 수백 명에 달하는 야당 정치인과 판사, 의원, 기업인, 언론이 및 편집자들이 뇌물을 주고받고, 매춘을 하는 등 다양한 불법 행동을 몰래 촬영해서 그 영상으로 이들을 협박했다. (...)


매수에 실패한 판사는 해임의 목표물이 된다. (...) 독립적인 사법기관의 구성원을 마음대로 해임할 수 없는 경우, 독재자는 ‘대법원 재구성’을 통해 우회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헝가리 오르반 정권은 헌법재판소 규모를 기존 여덟 명에서 15명으로 늘렸고, 여당인 피데스당 단독으로 새 재판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했으며, 이를 통해 친정부 판사로 새로운 자리를 메웠다. (...)


2004년 차베스 정권을 대법원 규모를 20명에서 32명으로 늘렸고, “혁명적인” 측근들로 채워 넣었다. 그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이후 9년 동안 대법원은 정부에 반대하는 판결을 하나도 내놓지 않았다. (P.101~105)


심판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난 뒤, 선출된 독재자는 정적에게 시선을 돌린다. (...)


잠재적 정적을 다루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매수다. 선출된 독재자들 대부분 정치 · 경제 · 언론 분야의 주요 인사에게 공직을 제안하거나, 노골적으로 뇌물을 먹임으로써 입을 틀어막거나, 적어도 조용하게 중립을 지키도록 강요한다. (...)


매수되지 않은 선수들은 다른 방법으로 다루었다. 과거의 독재자가 종종 정적을 투옥하고, 추방하고, 암살했다면 현대의 독재자는 정적에 대한 탄압을 합법으로 포장한다. 이를 위해 심판 매수는 대단히 중요하다. 페론 정권에서 야당 대표인 리카르도 발빈은 선거 기간에 대통령을 ‘존경하지 않았다’는 이류로 투옥되었다. 발빈은 대법원에 항소했지만, 이미 페론이 대법원 재구성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구제받지 못했다. (...)


독재 정권은 종종 명예훼손이나 모욕죄 혐의로 소송을 함으로써 반정부 성향이 강한 언론을 ‘합법적으로’ 경기에 뛰지 못하게 막는다. (...) 주요 언론사가 공격을 당할 때 다른 언론사들은 자세를 낮추고 자체 검열을 하게 된다. (...)


선출된 독재자는 야당을 지지하는 기업 경영자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 2000년 7월 취임 후 3개월이 채 지나기 전에, 푸틴은 러시아 최고 기업가 21명을 크렘린궁으로 초청했다. 그 자리에서 푸틴은 자신의 감시 아래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돈을 벌 수 있지만, 정치에는 절대 간섭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 대부분이 그의 경고를 따랐다. 이후 야당은 후원이 바닥나면서 점점 힘을 잃어갔고, 실제로 많은 정당이 소멸의 길을 걸었다. (P.105~110)


마지막으로 선출된 독재자는 예술가, 지식인, 팝스타, 스포츠 선수 등 문화계 인사의 입도 틀어막으려 한다. 이들의 높은 인기나 숭고한 도덕성은 독재자에게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 (...) 하지만 일반적으로 독재 정권은 문화계 유명 인사와 좋은 관계를 맺고 협력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리고,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 한, 문화 활동을 자유롭게 허용한다. (P.111~112)


독재자는 헌법과 선거 시스템, 그리고 다양한 제도를 바꿈으로써 저항 세력을 약화하고, 경쟁자에게 불리한 쪽으로 운동장을 기울인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종종 공공의 선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모든 제도를 권력자에 유리하게 바꾸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독재자는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P.113)


민주주의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아이러니는 민주주의 수호가 때로 민주주의 전복의 명분으로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잠재적 독재자는 자신의 반민주적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 위기나 자연재해, 특히 전쟁과 폭동, 테러와 같은 안보 위협을 구실로 삼는다. (...)


독재자는 권력을 집중시키고, 권력을 자주 남용한다. 전쟁과 테러는 “기치 아래 군중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정권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극적으로 높아진다. 가령 9.11 테러 직후 부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53퍼센트에서 90퍼센트로 치솟았다. 이 수치는 갤럽이 조사를 실시한 이후 최고 기록이었다(이전 기록은 89퍼센트를 기록한 조지 H. W. 부시로 걸프전이 발발했던 1991년이었다).


국가 비상사태에서 90퍼센트의 지지율을 기록한 대통령에게 맞서고자 하는 정치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국면에서 대통령은 실질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2001년 10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국 애국법 USA PATRIOT Act*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는 9.11 테러가 한 달 전에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통과하지 못할 법안이었다. (...)


대부분의 헌법은 국가 위기 시 행정부 권한의 확대를 허용하고 있다. 덕분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은 전시에 쉽게 권력을 강화하고 시민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집중된 권력이 잠재적 독재자의 손에 넘어갈 경우, 상상하기 힘든 사태가 벌어진다. (P.118~122)


헌법의 제약으로 발목이 잡힌 선동가에게 국가 위기는 민주주의 제도에 따른 불편하고, 때로는 위협적인 견제와 균형 시스템을 해체하기 위한 상징적 기회다. 독재자는 위기의 순간에 음모를 꾸미고, 정적으로부터 권력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을 쌓는다. 그래도 질문은 남는다. 민주주의 제도도는 과연 그렇게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인가? (P.123)




* 미국 애국법(USA PATRIOT Act)은 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국 정부가 테러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이다.


이 법은 연방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의 권한을 대폭 확대하여, 테러 혐의가 있는 사람에 대해 감청, 도청, 이메일 추적, 금융 기록 접근 등을 보다 쉽게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법원의 영장 없이도 광범위한 정보 수집이 가능해졌고, 도서관 이용 기록이나 인터넷 검색 기록 등 사생활 영역까지 감시가 확대되었다.


미국 애국법은 국가 안보를 강화했다는 평가와 동시에, 시민의 기본권과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비판도 함께 받았다. 특히 무슬림이나 이민자에 대한 차별적 적용, 정보 수집의 투명성 부족 등이 논란이 되었다. 이후 일부 조항은 수정되거나 폐지되었지만,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안전 사이의 균형 문제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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