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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제나 Jul 01. 2022

# 17. 파국

어버이날 사건 이후, 친정 부모님은 우리 부부의

사이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틀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다. 그동안 남편이 친정 부모님을 바람 맞출 때마다 있는 거짓말에 없는 거짓말을 보태

남편을 두둔하곤 했다.


남편이 예뻐서, 사랑해서, 지켜주고 싶어서는 단연코 아니다. 내가 지키고자 했던 이는 남편이 아닌, 나와 내 아들, 그리고 내 가정이었다.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힘들게 이룬 가정이기에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었던 마음이 컸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맞고 살고 싶지 않았다.

한번 손을 들어 올리기는 힘들었지만

뭐든 한 번이 어려운 법이다.

뻑하면 일어나는 부부 싸움 때마다 남편은 손을 들었고 나는 폭언을 퍼부으며 악다구니를 써댔다.


이건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아니다.

그동안 참고 참았지만, 감추려 애썼지만

나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얘기하고,

왜 어버이날에 부모님을 바람 맞춰야 했는지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2년이 채 못 되는 시간 동안 결혼생활을 유지해오며, 친정 식구와 식사를 하는 동안 시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잽싸게 튀어가는 일이 다반사에

뻑하면 장인 장모를 바람 맞추기 일쑤였으며

명절에 친정에 와서 저녁만 먹고 다시 시댁으로 가야 하는 일이 빈번했음에도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사위를 불러 야단치거나 꾸지람을 한 적이 없다.

괜히 사위를 들쑤셔서 귀한 딸 결혼생활이 더 힘들어질까 참고 참고 또 참으셨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아버지의 불호령에 남편은 쭈뼛거리며 몇 달 만에 처갓집을 방문했다.

아주 오랜만에 방문한 처갓집의 공기는 여느 때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버지는 그렇게 예뻐하시는 손주를 보고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 당신은 oo 데리고 방에 가 있어요.


아버지는 엄마에게 아들을 맡기고, 나와 남편을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셨다.


- 자네, 내 딸 때렸나?


로 시작된 아버지의 불호령은 오금이 저리도록 서늘했다. 늘 자상하고 어쩌면 조금은 푼수처럼 보일 만큼 서글서글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내 앞엔 귀한 내 딸이 매 맞고 산다는 얘기를 듣고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한 딸의 아버지만 있을 뿐이다.


- 그렇게 살 거면 헤어지게,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가?

- 전 아직도 제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하겠습니다.


여러 대화가 오갔지만, 결론은 그러했다.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다시는 손대지 않겠습니다.

저도 노력했지만 잘 안됐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마무리는 훈훈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잘 살아보자 다짐하며, 또다시 작은 희망을 가슴에 품고 그렇게 나는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고, 그도 마찬가지다.

한번 깨진 그릇은 붙여 쓸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 집에 다녀오고, 처음이자 마지막 큰 호통을 들은 뒤 남편이 조금은 달라지길 기대하며 남편의

평일 오프를 맞았다.

기특하게도 남편은 본인의 오프를 시어머니께 말하지 않고 셋이 아침을 먹은 뒤 키즈카페에 가서 그동안 챙기지 못한 아들과 재밌는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해왔다.

오랜만에 외출에 들뜬 나는 오후 3시, 딸아이의 픽업 시간이 되기 전까지 즐거운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와야 한다.

그러자면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남편은 오전 10시가 지나도록 침대에서 꾸물거리며 나올 생각이 없다.

또 천불이 나기 시작한다.

나는 남편이 먹을 꽁치를 굽고 쌈채소를 씻느라

정신이 없다.

더불어 아들이 먹을 이유식도 만들어야 한다.


아, 이유식 하니 떠오르는 또 한 가지 에피소드.

아기가 먹을 이유식을 소고기 한 냄비, 닭고기 한 냄비 유기농 쌀을 직접 갈아 정성을 다해 만들어 놓고 식으면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어놓으려 기다리고 있는데, 퇴근해 돌아온 남편이 배고프다며 허겁지겁 냄비째로 이유식을 퍼먹은 사건도 있었지.


딸아이 픽업하러 나가야 해서 아들 분유 좀 먹이라고 했는데 아기가 이가 나기 시작해 간지러웠는지 젖병 꼭지를 물어뜯어 구멍이 나는 바람에

분유가 줄줄 샜는데, 젖병으로 장난친다며 그 커다란 손바닥으로 그 조그만 아들을 때리던 장면도 눈에 선하다.

하...얘기하자니 정말 끝이 없구나.


여하튼 이유식을 만들고 남편의 아침상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 한번 경고를 날렸다.


- 아기 응가 한 거 같으니 기저귀 좀 갈아주고 옷 좀 갈아입혀줘


반응이 없다.

그의 눈동자와 그의 귓구멍은 오로지 얼마 전 새로 구입한 자기 핸드폰에만 집중되어 있다.

열불이 끓어오르지만 참고 참고 또 참는다.

외출했다가 세시까지 돌아오려면 시간이 없다.

지금 뭐 하자는 건가.

그래 일단 밥부터 빨리 차리자.


식탁에 구운 꽁치를 올려놓고 상추를 덜어놓고서, 밥을 차렸다.

그리고 숟가락을 가지러 가는 사이, 그 커다란 덩치를 침대에서 일으키더니 그제서야 종종거리며 뛰어나와 식탁에 서서 손으로 꽁치를 발라 먹는다.

시선을 돌려보니 아들은 똥 싼 기저귀로 무거워진 아랫도리를 뒤뚱뒤뚱 흔들며 내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입으로 넣고 있다.


인내심이 남아있지 않다.

더이상 참을 용기도 없다.

화가 치밀어 올라 상추로 남편의 머리를 후려쳤다.


- 너 혼자 실컷 먹어, 난 안 먹어


그리고 돌아서서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려 소파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뜨거운 밥을 담은 밥그릇이 날아오며 커다란 주먹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이 인간은 안되겠다.

아니, 우리는 안되겠다.

상추를 던진 나도 잘못,

밥그릇과 주먹을 휘두르는 너도 잘못,

무엇보다 예전에는 부모의 육탄전이 있다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내 아들은 멀뚱멀뚱 눈을 껌뻑이며 싸우는 장면을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이제 돌이 지난 아들은 엄마가 아빠에게 맞으며 공격당하는 모습을 보자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제 아빠가 던진 수저를 집어 들고 똥 싼 바지를 입은 채 발을 동동 구르며 울던 그  모습이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 잊혀 지지가 않는다.

뇌리에 박혀 버렸다.

그 때 그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파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핸드폰을 꺼내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남편이 때려요, 제발 빨리 와주세요!


그러고는 아들을 안고 맨발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자 경찰이 나에게 다가와, 남편을 처벌할지 처벌여부를 물었다.

그리고 맨 발인 내 모습을 훑어보고는 갈 곳이 없다면 쉼터에서 남편과 잠시 분리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처벌은 원하지 않아요.


경찰이 오는 소릴 들은 윗집 아기 엄마가 내려와 내 아들을 안고 나에게 슬리퍼를 신겨준 뒤 제집으로 갔다. 나는 경찰과 적당히 이야기를 마무리한 뒤 경찰이 그 자리를 떠나자마자 윗집에 사는 친한 아기 엄마의 집으로 도망치듯 달아났다.

잠시 마음을 추스르며 아들과 윗집에 숨어있을 요량이었다.

남편이 화가 풀리면 그때 내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있어야지.


한두 시간 윗집에 있었는데, 우리 아들이 그 집 딸아이의 장난감을 흐트러뜨린 모양이다.


-이모, 얘 데리고 이모집으로 가


아이가 한 말이었지만, 그 당시 나의 멘탈로는 무너져가는 나의 마음을 더러워진 신발로 짓밟힌 셈이었다.


- 애는 애다 언니, 괜찮아 더 있어

- 아니야 내가 너무 오래 있었지? 고마워.

   나중에 연락할게


도망치듯 쫓겨나듯 아들을 안고 윗집을 나왔다.

집으로는 갈 수 없어. 지금 가면 더 맞을 것 같거든.

친한 아들 친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나 사정이 좀 있어서 저녁때까지만 있어도 될까?


다행히 평소 스스럼없이 지내며 음식도 나눠먹고 아이들도 함께 놀게 하던 엄마라 내 사정을 흔쾌히

받아줬다.

밤 9시가 지나서 잠든 아들을 안고, 조용히 우리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 어질러져 있던 방이 정리되어 있고, 정리되어 있는 깜깜한 방에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아... 다행이다.

남편이 또 시어머니 집으로 갔나 보네.

오늘 밤은 편히 잠들 수 있겠다.

안도하며 잠든 아들을 끌어안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 밝았다.

지난밤 미처 치지 못한 커튼 사이로 눈부신 햇볕이 내리쬔다.

오늘도 한강은 그 자리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며 변함없이 유유자적 흐르고 있다.

여느 아침처럼 아들에게 우유를 먹이고 이유식을 만들고 있는데 때롱때롱 문자가 울린다.

- 휴대폰 자동이체가 해지되었습니다.

때롱때롱

- xx 카드 자동이체가 해지되었습니다.

때롱때롱

- 네 말대로 우린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아.

넌 나한테 모욕감을 줬어.

oo 이는 니가 잘 키워줘, 양육비는 매달 150만 원씩 보낼게.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의 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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