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헤어짐을 전해 들은 그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필이면 옆자리.
고작 1m가 채 되지 않는 자리에 그가 있다.
계속 앉았다 서기를 반복하고, 자욱한 담배연기를 끊임없이 몰고 다니는 모습으로
자신의 불안함과 당혹감을 표현한다.
한참 뒤, 그에게 카톡이 온다.
- 이따 퇴근할 때쯤 길 건너, 공원에서 잠깐만 봐요.
꼭 보고 퇴근해요.
피할 수 없는 순간이다.
계속 회사에 다닐 수 있을까?
회사 대표의 사촌인 그는 절대 회사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만두지 않는다면 내가 그만둬야 하겠지.
당장 먹고 살 일이 캄캄하지만,
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나의 책임이다.
오늘따라 퇴근시간이 더디온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설득하고 사과해야 할지,
처음부터 시작해서는 안 됐다는 후회만 밀려왔다.
내 욕심이 결국 착하디착한 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내 생활을 책임질 직장을 앗아갔다.
컴퓨터 모니터에 뜬 시계가 6시를 알리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신발을 바꿔신는 동안
옆자리에 그는 사무실 슬리퍼를 갈아 신지도 않고 홱 하니 나가버린다.
두렵다.
처음으로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게 되겠군.
조심스레 퇴근 준비를 마치고 그와 만나기로 한 공원으로 향했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초록의 무성한 나무와 맨살에 다가앉는 모기들이 그득한 정자에 그가 담배를 물고 초조히 서있다.
나는 그가 서있는 곳에 가만히 앉아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나는 헤어지겠다는 내 결심을 결단코 바꿀 생각이 없다.
애초에 시작해선 안되는 일이었는데.
그저 후회만이 몰려왔을 뿐이다.
그의 원색적인 비난을 들을 각오가 되어 있다.
언제 사직서를 내야 할까 머릿속이 꽤나 복잡하다.
드디어 그가 입을 연다.
두려워.
얼마나 화를 낼지.
- 그냥 옆에만 있게 해줘요. 아무것도 안 할게요.
난 정말 상관없다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에요?
과장님은 아들이랑 살아도 돼요.
둘이 살아도 돼요. 그냥 내 전화만 받아줘요, 옆에만 있게 해줘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전혀 격양되지도 않은, 너무도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가 조곤히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뜻을 굽힐 수 없다.
- 착하고 예쁘고, 어리고 굴곡 없이 살아온 평범한 사람 만나서 살아.
나랑 만나면 너도 같이 지옥 속에 사는 거야.
나는 너랑 계속 관계를 이어갈 생각이 없어.
내가 왜 너랑 만나면서 또 상처를 받아야 하고,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니?
미안하지만 전화도 안 받을 거야, 회사도 곧 정리할게.
제발 좋은 사람 만나. 나같이 힘든 사람 말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조그만 완두콩 같은 얼굴에 눈물 방울이 아롱히 떨어진다.
얼굴이 너무 작아 그런지 눈물이 왕방울만 하게 보인다.
이 슬픈 와중에도 콩알만 한 얼굴이 눈에 띄다니.
나란 여자도 참.
이 불편한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에 벌떡 일어선 나와,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은 그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착하고 순한 이 바보 같은 어린 남자는 도대체 나같이 늙고 예쁘지도 않은
애도 있는 이혼녀가 뭐가 좋은 걸까. 참 미스테리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옷자락을 쥐어 잡은 그의 조그만 얼굴에서
주먹만 한 눈물이 계속해 떨어진다.
그의 눈물을 처음 본 나로서는, 아직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에
가슴이 아프다. 찢기듯 아프다.
-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요.
제발 옆에만 있게 해줘요. 내 연락만 받아줘요.
난 정말 어떻게 돼도 상관없으니 헤어지자고만 하지 말아 줘요.
40년을 살아오며, 과연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었나.
부모형제에게조차 이런 뜨겁고 간절한 사랑은 받아본 기억이 없다.
1시간이 넘도록 그와 나의 돌림노래 같은 매달림과 거절은 계속되었다.
나의 고집도 꽤나 대단했으며, 그 역시 포기를 몰랐다.
그의 진심이 느껴지는 간절한 얼굴이 내 심장을 긁는다.
마음이 약해져. 제발 그만 울어. 흔들릴 것 같아...
한참의 실랑이 끝에 나는 또 한 번 약해진 마음으로 무너졌다.
내 옷자락을 잡고 있는 그의 떨리는 손을 꼭 잡고 그를 일으켰다.
- 나랑 엮이면 네가 상처받는 일이 많을 거야.
미안하지만, 내 인생에선 나보다도 너보다도 난 내 아들이 가장 중요해.
넌 언제나 2순위일 거야.
그래도 내 옆에 있고 싶다면, 그래. 우리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
내 말 한마디, 내 숨소리조차 꼭꼭 눌러 듣던 그가 나를 그의 넓은 가슴에 와락 안는다.
공원에 비둘기 밥을 주러 나온 어르신들과,
근처 회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러 나온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의 뜨거움을 가르지 못했다.
한참을 꼭 안고 서로의 진심을 확인 한 우리는 또 다른 첫 번째 날을 맞이한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된다.
뜨거운 여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