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의 폭력에 대한 고찰
1. 인간의 폭력
20세기에 발생한 제노사이드 혹은 데모사이드에 의한 사상자 총량은 그전까지 그런 방법으로 사망한 총량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무기의 급진적인 발전은 학살의 규모를 다른 차원으로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독일에 의한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먼저 떠오르고, 그와는 별도로 러시아를 비롯해 범 유럽에서 벌어졌던 유대인 탄압과 포그롬 등도 그에 뒤지지 않으며, 튀르크에 의해 자행된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스탈린 전제정권 당시 러시아인에 대한 지속적인 국가 폭력 행위,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민족 간의 학살과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인종 청소와 한반도에서 자행된 이념 데모사이드 등 그 밖에도 수많은 참혹한 학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20세기는 대진보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슬프게도 대학살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학살이 발생한 것은 한순간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단순한 결과물은 아니다. 인간의 폭력성은 인간의 진화와 함께 동행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인간의 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사람은 1651년 토마스 홉스이다. 절대군주론을 주창했던 그는 리바이어던에서 폭력이 인간의 본능적 결과물이라고 논했고, 그와는 달리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은 월래 선하지만 사회제도와 사유재산이 폭력을 만든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폭력에 대한 연구는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후부터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20세기 초, 문명의 야만성을 접하고 인간의 무의식에는 파괴적 본능 혹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가 존재한다고 분석하였다. 이후 제2차 대전을 겪으면서 유대인의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럽인들은 자신의 인간성에 경악을 하고 본격적으로 인간의 폭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당사자이기도 한 한나 아렌트는 폭력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다는 악의 평범성을 주장하였고, 1961년 스탠리 밀그램은 권위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라고 분석하였다. 1971년에는 필립 짐바르도가 상황과 시스템이 인간의 본성을 악마화시킨다는 루시퍼 효과를 주창했고,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은 ‘악의 평범성’과 유사한 보통 사람들이란 개념을 내놓았다. 그 밖에도 알버트 반두라, 요한 갈퉁, 리처드 랭햄 등 많은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들이 폭력에 대한 각자의 주장을 내놓았다. 그중에서도 스티븐 핑거는 그의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문명화 과정 덕분에 인류의 폭력성이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고 주장하여 많은 학자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폭력성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처럼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고 아직도 부표처럼 역사의 바다에 떠돌 뿐이다. 사람을 죽일 정도의 고밀도의 폭력성은 언제 어떻게 이 지구에 등장한 것일까. 의도와 목적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원인을 제공하였을까.
인류학자들은 폭력의 기원을 유인원이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찾으려고 하는데 그 대상이 인간과 가장 가까운 종인 침팬지와 보노보이다. 그 유인원이 왜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지 대한 연구를 토대로 그 프로세스를 인간에게 대입시키는 방식이다. 이 연구는 폭력의 근원을 찾아가는 실재적인 실험이기는 하지만 그런 연구 결과는 호모 하빌라스나 최소한 초기의 호모 에렉투스 정도에게만 적용되어야 타당할 것이다. 적어도 네안데르탈인 이후의 호미니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유인원이 영역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폭력을 행한 것이라면 석기와 무기를 사용할 줄 알았던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는 이미 그것을 뛰어넘어, 적어도 본능을 능가하는 복잡한 인식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식의 데이터가 호모 에렉투스가 메가급이라면 호모사피엔스는 테라급인 것이다.
수백만 년에 이르는 구석기시대의 호미니는 매우 더디게 진화하였다. 따라서 호미니의 폭력 성향도 매우 느리게 진화하였다. 인류학자들은 구석기시대는 대체적으로 대인 폭력이 적었던 시대였다고 암묵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한다. 활과 창의 발견으로 무기의 치명성이 향상되었지만 수렵채집이라는 생활 패턴 때문에 폭력성은 부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타의 동물처럼 인구가 매우 희박한 반면 행동반경은 상대적으로 한층 넓어서 호미니들 간에 접촉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설령 영역을 두고 분쟁이 일어나 서로 폭력을 행사할 경우에도 가족 단위의 집단이 몰살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가급적 막장 폭력을 자제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라고 한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유인원이나 다른 동물들처럼 더 이상 영역을 두고 폭력을 행사하면 서로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영역 획득 수단으로써 공격성을 선호하지 않았던 호미니는 가능하면 갈등을 회피하고, 상호성과 공유와 협력 등 인간 고유의 성정을 함양시켰다.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이런 인식의 결합체를 기반으로 영악해진 호모피엔스는 집단 간 공동으로 사냥을 하여 그동안 범접할 수 없었던 매머드 같은 보다 큰 동물을 잡을 수 있는 능력과 그에 대한 공유의 메커니즘을 구축하였다. 이런 논리는 수많은 고고학적 발견으로 충분히 증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웃 간의 긍정적인 관계는 이후 호모사피엔스의 진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집단 간의 협력은 네안데르탈인에서는 볼 수 없던 호모사피엔스만의 특화된 형질이라고 인류학자들 주장한다.
하지만 영특한 전문 사냥꾼인 호모사피엔스가 밀과 보리 같은 곡식을 경작하고 동물을 가축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착 생활로 이어졌다. 사단은 그렇게 시작됐다. 구석기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중석기시대, 흔히 토기 없는 신석기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반 정착 생활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삶의 방식이 조성되면서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로 빠져들었다. 잉여 식량을 저장하고, 구성원이 증가하고, 리더가 등장하여 조직화되고, 규정과 질서가 형성되면서 모계사회는 사라지고 육체적으로 우월한 남성이 지배적 존재로 상승하였다. 그러면서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욕구가 공동체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욕망의 씨앗이 잉태되었다.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독립적인 가족 단위는 친족 단위로 네트워크가 이루어지고 그것은 다시 다른 공동체와 연결되어 서로의 이익을 위해 보다 큰 공동체로 발전한다. 그러면서 당사들만이 소통할 수 있는 언어 집단이 조성되었다. 그렇게 6개 이상의 씨족이 공동체를 이루게 되면 내부에 사회적인 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질서 확립을 위한 공동체의 합의가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의 사회계약인 셈이다. 공동체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공동체가 와해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경험으로 자연선택 하였다. 그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힘의 논리와 폭력의 양상이 나타난다. 질서유지는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 간의 갈등은 폭력으로, 때로는 살인으로 이어지고 복수와 원한 같은 격한 감정이 사회에 팽배해지며 질서 유지와 규범에 따라 사회적으로 공인된 사형이 체계화된다. 이런 폭력의 양상은 이제 당연시되고, 자기 공동체의 어떤 이익에 따라 외부로 욕망의 시선을 돌린다. 적어도 다른 공동체에 대한 폭력 행사는 규범에 적용받지 않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우리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폭력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후 변화 같은 자연적인 재해로 식량이 부족해지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줄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성이 필요해질 때면 거침없이 폭력성을 작동시킨다. 수렵채집 시절 인구가 희박할 때와는 달리 이제는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정착촌 몇 개가 사라진다고 해서 전체의 미래가 불확실하지도 않다. 이런 공격성은 화살과 창의 발전과 더불어 투창기와 돌도끼와 자귀 같은 신무기들이 발명되면서 극대화되었고, 전사의 조직과 전술이 더해지면서 치명적으로 고도화되었다. 무엇보다 전술적으로 볼 때 구석기시대와는 달리 공격자가 매우 유리하였다. 더구나 정착지에 대한 기습 공격은 이길 확률이 높았다. 이런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나무로 방책을 만들고 둘레에 도랑도 팠지만 공격자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는 없었다. 패배한 정착민은 무참하게 학살되고 여자들은 성노예가 되었다. 이렇게 치명적인 폭력은 연합 살상의 시대를 거쳐, 방어의 시대를 지나, 본격적으로 전쟁의 시대로 접어들어 화려한 꽃을 피웠다. 남성의 지위는 신석기시대 말에 공동체를 지키는 전사로 발전하면서 되돌릴 수 없는 권력이 만들어졌다. 물론 이런 폭력의 시대가 지구 전역에서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아프리카와 유럽에서만 나타난 매우 지엽적인 현상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두 대륙에서 유독 유골들이 많이 발굴되어서 연구가 활발한 반면 타 지역에서는 그런 고고학 발굴이 미미하여 인류학적 연구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2. 아프리카
아프리카는 350만 년 전 루시가 태어난 곳이고 더 멀게는 사헬란트로푸스의 고향으로서 흔히 인류의 요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재의 수단과 에티오피아와 케냐로 이어지는 동아프리카 열곡대 지역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 진화의 기원과 함께 한 회랑이라고 고인류학자들은 설명한다. 길고 지난한 수백만 년이 지난 후 완벽하게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한 신석기 인간은 드넓은 초원지대를 가로지르는 나일강과 동아프리카 열곡대에 형성된 거대한 호수 주변에서 반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수렵채집도 했지만 강이나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생활하는 패턴이 새롭게 생겨난 것이다. 홀로세에 들어서자 그곳은 인간이 일찍이 경험할 수 없었던 우호적인 환경을 선사하였다. 돌아다니는 동물을 추적하지 않아도 항상 대체할 수 있는 물고기로 최소한 일정량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적어도 몇 년 동안 그곳에 최소한의 촌락을 조성하여 반 정주 생활을 하였다. 그렇게 삶의 질이 향상되자 그들만의 장례 문화가 만들어져 죽은 사람들을 일정한 형식에 따라 묻는 매장 풍습이 일상화되었다. 바로 공동묘지 형식이었다. 방랑을 숙명처럼 여기던 수렵채집인 한테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전환기적인 풍습이었다. 매장은 죽음에 대한 의식으로써 이승과 저승을 이해하고 종교화하는 시작점이었다.
1964년 아스완댐 건설이 시행되기 전 이집트 정부의 승인 하에 대규모 수몰 지역 고고학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구조 고고학 발굴단을 이끈 사람은 미국 텍사스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 교수인 프레드 웬도로프였다. 그는 많은 발굴지 중 117번으로 명명한 제벨 사바하에서 64구의 인간 유해가 묻혀있는 매장지를 발견하였다. 석기류와 동물뼈 조각들이 사막에 뒹굴고 있어서 파본 것인데 놀랍게도 거대한 묘지가 나타난 것이다. 웬도로프 팀은 발굴한 유해를 조사한 결과 인간의 폭력 혹은 살해 흔적이 뼈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이는 고고학과 인류학계에 경천동지 할 만한 반향을 일으켰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설이 지배하던 시대에 이런 폭력의 증거는 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제벨 사하바의 묘지에 대한 재평가는 인류학자의 성향에 따라 세밀하고 다양하고 이루어졌다. 발굴 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보다 발전된 분석력이 그들의 호기심을 해결해 주었다.
이후 60년 가까이 지난 2021년, 한층 발전된 과학기술로 고고학적 데이터를 분석하여 재평가 한 논문이 네이처에 발표되었다. 생물고고학자 이사벨 크레브쿠어 외 3명으로 이루어진 프랑스, 영국 합동 조사팀은 웬도로프가 발굴한 64구 중 분실한 3구를 제외한 61구의 뼈를 전수 재조사하였다. 웬도로프는 자신이 발굴한 유해 64구를 당시 대영박물관에 기증을 했는데 3구는 이전과 보관 과정에서 분실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폭력의 시기와 본질, 정도 등이 재분석되었는데, 투사 무기에 의한 폭력이 산발적이고 반복적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팀은 주장했다. 발굴 당시보다 발전된 탄소연대측정기로 분석한 결과 제벨 사하바인이 사망한 시기는 최소 기원전 11,400년(13,400BP)이었고, 이는 가장 오래된 인간 폭력의 유적지라고 덧붙였다.
당시는 지질학적으로 후기 플라이스토세가 끝나고 간빙기로 들어서는 홀로세의 시작점이었다. 당시 지구의 기후가 변화무쌍하여 영거 드라이아스(기원전 12,900~기원전 11,700)라는 짧은 빙기가 다시 찾아와 1,000년 동안 지구를 덮쳤다. 동아프리카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극도로 건조한 환경에 시달렸다. 이런 극한 환경을 이겨낸 호모사피엔스는 이후 천국 같은 홀로세 세상을 맞이한다. 아프리카에 습윤기가 찾아와 몬순기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이 격동의 시기에 빅토리아 호수가 넘쳐 백나일강이 형성되었고 이후 나일강 범람 현상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처음엔 현재처럼 안정적이고 주기적인 범람이 아니라 격랑이 심하고 불규칙한 범람이 한동안 반복되었다.
이렇게 환경적 압박이 완화되자 나일강변의 제벨 사하바와 투슈카, 와디 쿠바니야, 와디 할파 같은 지역으로 호모사피엔스들이 모여들었다. 이들 거주지에서 발굴한 석기와 동물뼈들을 보면 그들이 소규모 사냥과 낚시와 채집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지역에 묘지가 만들어진 것을 보면 일정기간 정주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고, 그것은 공동체 내에 강력한 사회적 질서가 형성되어 있어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여러 개의 작은 씨족 공동체가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연합하여 꽤 큰 집단을 형성하고 나일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반 수렵채집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심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온갖 부상과 힘든 노고를 감수해야 하는 대형동물 사냥에서 적어도 일정 부분 해방되었다. 이런 일상의 변화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심신의 여유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평화롭게 보이던 제벨 사하바에서 도대체 어떤 폭력 사건이 벌어진 것일까. 먼저 2021년 아사벨 크레브쿠어 팀이 밝힌 61명의 사망에 대한 규명을 들여다보겠다. 이들 중 성인이 43명이고, 청소년 이하가 18명이다. 이들에게서 투사체 충격 흔적이 52명에게서 발견되었고, 이중 41명은 외상의 명확한 징후가 보이고, 이중에는 성인이 32명이고 9명이 청소년 이하이다. 여기서 말하는 투사체는 실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근육을 뚫을 수 있는 날카로운 무기로 추정한다. 조사 유골 한 개에서 여러 개의 외상 흔적이 보이는 경우도 많다. 사망 전 외상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16구에서 발견되었고, 아물거나 아물지 않는 외상 흔적은 38구에서 발견되었다. 전자는 실질적인 폭력 행위로 사망에 이르게 한 치명적인 외상으로 보인다. 이 유골들에서는 투사체 외상 25구, 골절 22구가 확인되었고, 내장이 있는 공간에서 석기조각 11가 발견되었다. 후자의 경우는 화살에 맞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골절 흔적이 다각도로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사망 전에도 많은 폭력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근위지골과 중수골과 견갑골에서 골절이 관찰되는 데, 근위지골과 중수골 골절은 둔기에 의한 방어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들 중 가장 많이 관찰되는 상흔은 투사체에 의한 타격이다. 대퇴골 자상, 쇄골과 상완골에 투사체 관통 흔적 등이 많고, 둔기 혹은 투사체에 의한 두개골 천공도 7개가 발견되었다.
이들 중에 3구의 유해에 대해 자세하게 따져보겠다. 먼저 JS14로 명명된 유해는 성별 불확실 4~5세로서 전두골과 눈썹 사이에 둔기 외상, 전두골에 자상과 타원형 천공, 오른쪽 두정골과 후두골에도 천공이 있고, 대퇴골에도 투사체가 뚫고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자상 등이 조사되었다. 그 유해 안에서 5개의 날카로운 석기가 발견되었다.
JS31은 남성이며 심한 치아 마모가 관찰되고 나이는 30세 이상으로 추정된다. 주변에서 17개의 석기가 발견되었는데 2개는 7번 경추와 왼쪽 치골에 박혀 있었고, 15개는 신체 공간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역시 이 유골에서도 아물지 않는 투사체 흔적이 좌측 견갑골에 압착되어 있었고, 상완골 후방 내측에 V자형으로 홈이 파여 있었다. 그 밖에도 생전에 아문 것으로 보이는 중수골과 우측 대퇴골과 여러 골간부에서 투사체 상흔이 발견되었다. 그러니까 생전에도 많은 상처를 가지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JS44를 보자. 이 유골은 30세 이상의 여성으로 보이며 주변에서 21개의 석기가 발견되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네 번째 갈비뼈에 박혀 있었다. 그 밖에도 왼쪽 쇄골, 오른쪽 견갑골과 반경골, 왼쪽 갈비뼈에 자연적으로 아문 골절 흔적이 보였다. 특히 투사체의 흔적이 뚜렷하게 발견되었다. 첫 번째로 장골 측면에 석판 조각이 박혀 있었는데 아마도 투사체를 맞은 후 뽑아내려고 시도한 듯한 흔적이 보이기도 했다. 두 번째는 왼쪽 골반 후내측에서 전외측으로 투사체가 관통한 흔적도 발견되었다. 세 번째는 우측 대퇴골 골간부 후방에 1cm 미만의 2개의 자상과 박리 흔적이 관찰되었다. 이는 투사체가 관통하면서 낸 외상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연령과 성별에 상관없이 투사체 무기를 포함한 다양한 대인 무기로 타격당한 외상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사망에 이르게 한 치명적인 외상도 많았지만, 치유된 외상의 징후를 보았을 때 제벨 사하바인들은 일생 동안 수많은 폭력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가해진 무기의 형태와 재료 등을 추정해 보면, 딱히 명칭을 말할 수는 없지만 투사체로 구분지울 수 있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잔석기와 나무와 동물 뼈 등을 혼합하여 만든 합성 무기 혹은 단독 무기. 사슴이나 말 같은 발급 동물 뼈로 만든 흔히 말하는 골각기 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창이나 화살이나 자귀 같은 무기나 작업 도구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이런 투사체 외상 형태는 2만 년 전 유럽의 선사시대 때 유골에서 종종 발견되기도 했다. 치명적인 폭력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보이는 고고학적 유해가 이후의 매장지에서도 빈번하게 발견된다.
제벨 사하바 매장지는 나일 계곡에서 가장 오래된 대량 묘지이다. 이중에 61명 중 38명이 대인 간 폭력에 의한 외상을 입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학살 사건이기도 하다. 이들은 대부분 복합투사 무기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소규모 대인 폭력이 산발적 반복적으로 발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실 61명 중 38명이 살해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보수적인 분석 결과이고, 사망 정황의 범위를 넓혀보면 유골에 상처를 입지 않고 사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도 상당히 많다. 아무튼 산자는 주검을 구덩이에 묻고 사암 석판을 덮는 장례의식을 행하였다.
제벨 사하바인들이 살던 당시에는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이동 사회와 반정주 사회가 병행하던 시기였다. 사람이 모이고 그 수가 많아지면서 개인 간의 갈등과 불화 같은 감정적 충돌 현상이 나타나고, 집단 간에도 그런 현상이 발생하여 충돌의 양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되면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전쟁의 개념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투사체 공격은 집단 간의 조직적인 전투를 시사한다. 병변의 양상을 볼 때 집단 내의 개인적인 폭력이나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폭력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제벨 사하바의 매장 장소와 장례 관행의 동질성을 감안하면 사건은 계획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왜 치명적인 폭력 사건이 발생했을까. 사건의 진상은 알 수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지만, 추정해 보면 마지막 빙기와 습윤기 초기의 급격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호모사피엔스가 생존을 위해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렵채집인과 반정착인들 간에 식량 자원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결과물이 바로 제벨 사하바 공동묘지였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수렵 채집인이 정주생활을 하면서 비축해 놓은 식량을 탈취하기 위해 정주민과 협상과 갈등을 겪다가 급습하여 학살을 한 사건으로 추리한다. 외상의 흔적에서 볼 수 있듯이 두개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당시 동물 사냥에서 보인 당연한 행위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타인에 대한 폭력성은 그렇게 진화하였다.
제벨 사하바 외에도 당시 전 후 시기에 다른 나일강 주변에서도 많은 매장지가 발견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살해 징후가 보이는 유골이 발굴되었다. 와다 쿠바니야 공동묘지에서 2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성인 남성 유해 1구를 조사한 결과 2개의 날카로운 잔석기가 갈비뼈와 요추 사이에 숨어 있었고, 왼쪽 상완골에도 1개의 석기가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반박하는 인류학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유골 상태를 볼 때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근거한다면 와디 쿠바니야 유적이 고고학적으로 가장 오래된 묘지라고 공인되었으므로 이는 가장 오래된 살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또한 인근의 와디 할파에서도 36구가 묻힌 공동묘지가 발굴되었는데, 그곳에서도 9구에게서 치명적인 폭력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제벨 사하바와 와디 할파 그리고 투슈카 지역에서 비슷한 석기를 사용한다고 하여 카단 문화권으로 분류한다. 9구에서 찾은 상흔을 보면, 경추에 박힌 석기 1개, 대퇴골에 평행한 줄무늬 1개소, 척추 골절 3개소, 종아리뼈 골절 1개소, 수지골 골절 1개소, 중수골 골절 1개소, 중족골 골절 1개소, 전두엽 및 두정엽 함몰 병변 2개소 등이다. 생물인류학자들은 이들이 모두 폭력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면 다시 시선을 남쪽으로 돌려 케냐 나타룩으로 가보겠다. 투스카나 호수 서쪽 30km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량한 사막에서 인간의 뼛조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캠브리지대학 레비흄 인류진화센터 지원으로 마르타 미라존 라르 박사가 2012년 발굴하였는데 어린이 6구, 여성 8구, 남성 8구, 신원미상 5구 등 총 27구의 유해를 수거하였다. 그 유골들의 파편 일부가 애초에 가로세로 100*200미터 넓이의 공간에 노출되어 있을 정도로 유해는 사막 바닥에 얇게 묻혀 있었다. 발굴지는 그들이 살던 당시에는 호수와 접해 있는 일종의 석호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수천 개의 많은 동물 뼈가 발견된 것을 보면 수렵 채집인들이 낚시와 사냥을 병행하면서 잠시 머문 반정착지로 추정된다. 지금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메마른 땅이지만 그들이 살던 기원전 8,500년 경에는 호모사피엔스들이 살기에 좋은 장소였던 것이다.
사건을 재구성하기엔 불가항력이지만, 시신은 관례에 따라 매장되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석호에 버려졌으며 이후 퇴적 과정을 거친 후 기후변화로 사막화되면서 보존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유해의 전반적인 상태를 볼 때 제벨 사하바와는 달리 나타룩 사건은 한 번의 습격으로 끝이 난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씨족 공동체가 다른 수렵채집인의 공격을 받고 모두 전멸한 학살 사건으로 추정한다. 그들은 왜 학살되었을까.
나타룩은 지금은 사막이지만 당시에는 비옥한 땅이었다. 지리적으로 볼 때, 그곳은 석호 특유의 습지가 형성되어 있고, 주변에는 숲으로 덮인 구릉들이 펼쳐져 있어서 풍부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이런 이상적인 거주지에 한 무리의 호모사피엔스가 들어와 자연환경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면서 정착하기 시작했다. 토기가 발견된 것은 그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수렵하는 것보다 약탈로서 삶의 질을 유지하는 집단이 등장하였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런 반 정착민을 습격하여 거침없는 폭력과 약탈을 일삼았다. 신석기시대로 돌입하자 이런 집단 간의 공격과 방어는 일상이 되었다고 인류학자들은 말한다. 아무튼 나타룩 원주민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한 공동체에 대한 몰살 사건은 당시에 성행한 전쟁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럼 잠시 발굴한 유해에 관심을 돌려보겠다. 27구의 유해 중에서 치명적인 외상을 남긴 유해는 모두 12구이다. 이들에게서 화살에 의한 외상, 곤봉에 의한 두개골 타격, 무릎과 손과 갈비뼈 골절 등의 병변이 조사되었다. 남성으로 보인 두 구의 유해가 겹쳐져 있었는데 그 안에서 3개의 석기가 발견되었다. 이중에 2개는 흑요석이었다. 이 흑요석은 다른 지역에서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물물교환이나 약탈한 것인지 출처는 모르지만, 성향이 다른 두 집단이 폭력적으로 충돌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흑요석으로 투사체를 만들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사안이다. 아무튼 다른 남성 한 구의 두개골에서도 화살촉으로 보이는 작은 흑요석 칼날이 박혀 있었다. 그 밖에도 이 남성에게서 다양한 외상 흔적이 관찰되었다. 최소한 두 발의 투사체로 추정하는 무기에 의해 머리 오른쪽 앞부분과 얼굴이 깨져 있었고, 둔기로 무릎에 타격을 입고 복합골절이 된 채 추락하여 석호의 얕은 물속에 얼굴을 처박고 죽었을 것으로 추리한다. 또 다른 남성은 오른쪽 눈 위와 두개골 왼쪽이 깨진 채 발견되었다. 놀라운 것은 임신한 젊은 여성의 유해였다. 6~9개월 된 태아의 유해가 그녀의 복강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녀는 손과 발이 묶이고 잔뜩 웅크린 자세로 무릎 일부가 땅에서 노출 채 발견되었다.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강력한 어느 집단의 폭력이 행사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전문적인 사냥꾼이었던 호모사피엔스는 프로페셔널한 자신의 능력을 인간에게도 행함으로써 다른 차원의 폭력성을 후대에 전이시켰는지 모른다.
발굴자는 논문에서 12대의 유해를 생물인류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해 놓았다.
1. 남성, 두개골에 발사체 흔적, 오른쪽 두정골 관통 병변, 무릎 함몰 골절
2. 남성, 왼쪽 측두골 둔기 외상, 척추 관통 병변
3. 여성, 전두골 관통 병변, 하악골 예리한 둔기 외상, 손 골절
4. 여성, 손 결박, 임신 상태
5. 여성, 척추 관통 병변, 손 골절
6. 왼쪽, 측두골 둔기 외상
7. 남성, 흉부 대 발사체 발견, 손 결박
8. 여성, 갈비뼈 골절, 무릎 함몰 골절, 왼쪽 발 부자연스러움, 손 결박
9. 남성, 손 결박
10. 미상. 전두골 예리한 두기 외상
11. 미상, 왼쪽 측두골 둔기 외상
12. 미상, 전두골 둔기 외상
하지만 마르타 미라존 라르 교수의 논문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은 ‘두개골 골절이 이전에 토양이 눌러서 발생했을 가능성, 분산 형태를 볼 때 해골들의 연대가 같지 않을 가능성, 구덩이에 매장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 학살의 증거가 아니라는 점’을 들며 그 논문의 일부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직도 나타룩 현장에 대한 사건의 재구성은 온전하게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발굴팀은 해부학과 법의학적으로 볼 때 치명적인 폭력으로 사망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완강하게 주장한다. 논문이 2022년에 발표되었으니 아직은 토론의 시기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7구 전체가 폭력에 의한 사망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10명 정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완연한 홀로세에 접어든 지구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안정적인 환경이 조성되면서 풍요의 시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수단 중부 제6나일 폭포라고 불리는 지역의 사발로타 산맥 서쪽에서도 많은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백나일강과 청나일강이 합류한 후 본격적으로 나일강이 흐르기 시작한 지점이었다. 2011년, 이곳에서 체코 카를 대학교 사발로카 탐사대가 하트룸 문화 유적을 찾고 있었다. 이 지역은 4,000년 동안 인간이 거주하며 층층이 쌓아 올린 문화의 잔재들이 즐비했다. 따라서 엘바르가, 와디 엘 아랍, 알키다이, 엘 아합다, 아네이비스, 스핑크스 등 총 17개의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각 매장지마다 정착촌이 형성되었다는 방증이었다. 이 공동 매장지에서 모두 265구가 발굴되었다. 그중 스핑크스 매장지에서는 11개의 무덤에서 45구가 발견되었는데, 이중 매장 14번에서 PD8로 명명된 유골이 눈길을 끌었다. 탄소연대측정 결과 8,720~7,847BP 즉 기원전 6,770~5,897년으로 나타났다.
30세 이상의 남성으로 보이는 PD8의 뼈에는 타살의 흔적이 명확하게 관찰되었다. 오른쪽 복부와 하지 위에 화강암 조각 6개가 놓여 있었고, 그 밖에도 4개의 분쇄된 석기 조각이 머리 뒤 오른쪽 어깨 근처 그리고 무릎 위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오른쪽 견갑골과 갈비뼈 사이에서 검게 변해 있는 동물 뼈 조각을 찾아냈다. 탄산염으로 결석화 된 채 근육에 박혀 있었는데 대형 포유류의 골반뼈로 추정되었다. 가공된 것으로 보이는 동물 뼈는 강력한 힘에 의해 근육을 뚫고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불로 가열하여 단단하게 만든 동물 뼈를 이용해 만든 창으로 강력한 힘으로 찔러서 살해한 것이다. 뼈를 낮은 온도에 가열하면 검게 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살상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정도로 강하게 변성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당시 하트룸 사람들이 일회용으로 한정해서 사용했다면 이해할 수는 있어 보인다. 뼈에 불을 가하면 유기 성분이 없어지고 탄성이 사라지지만 한편으로 강성은 증가하여 예리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밖에도 45구 중 6구에서도 갈비뼈 골절, 척골 골절, 반경골 골절, 손뼈 골절, 왼쪽 치골 외상 등의 병변이 발견되었는데 그 정도로는 직접적인 사인이 되지 않는 것으로 분석팀은 밝혔다. 하트룸 문화 유적을 분석한 결과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시대였다는 것에는 동의를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형태든 최소한의 폭력이 행사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이 상흔들이 물론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타박이나 낙상에 의한 병변이라는 것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단지 현재 축적되어 있는 데이터와 과학적인 방법으로 현상을 추정할 뿐이다. 뼈 이외에서 폭력의 법의학적 증거를 밝히지 못하는 것은 현재 인류학의 한계이기도 한다. 뼈에서 정답을 찾을 수 없다. 추정만 할 뿐이다.
3. 유럽
프랑스에서 해저동굴로 유명한 코스케 동굴 벽화에 의미심장한 암각화 하나가 있다. 2만 년 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 암각화에는 이미 사망한 듯한 사람이 누워 있다. 그 상체 앞부분을 통해 허리 쪽으로 창이 관통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도 위에서 창을 던져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의 동물 벽화처럼 사실적인 표현이 결여되어 의미심장하지만 그림의 도상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직관적으로 살해라는 추론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목적인지 모르지만 누군가 죽였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그림은 아닐까. 나에게 대항하는 자는 이렇게 죽을 것이다라는 어느 권력자의 엄포 인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파그리치 동굴에서 발굴된 2만 1천 년 전의 석판 그림에서도 살해 장면을 보여준다. 도상학적으로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얼굴에 창이 관통하고 몸통에는 여러 개의 화살이 꽂혀있는 그림인데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살해 상황을 묘사한 것 같다고 한다. 2만 년 전후의 구석기시대 벽화에서 이런 형태의 벽화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프랑스 로트 지방의 쿠냑 동굴 벽화와 역시 같은 지역의 페슈 메를 동굴벽화에서도 창과 화살에 맞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그 외 여러 동굴에서도 이런 유사한 벽화가 발견되었다. 그중에 도르도뉴 지방에서 발굴된 수 그랑 락 동굴 벽화에서는 더욱 노골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등 뒤에 7개, 엉덩이에 1개의 화살이 꽂혀 있고 성기에도 무언가 꽂혀 있는 그림이다. 성기를 절단한 것을 표현한 것인지 모른다. 어떤 사건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한 것을 보면 당시에도 폭력은 그다지 새로운 행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벽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사람의 몸에 박혀 있는 창과 화살이다. 많은 장면의 주인공들을 보면 여러 개의 화살이 꽂혀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한 사람을 향해 여러 사람이 활을 쏘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여러 개를 동시에 맞고 죽은 것인지 아니면 이미 죽은 시체한테 확인 사살을 한 것인지 모르지만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런 장면을 그림으로 기록했다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가령 어느 아무개가 망나니짓을 해서 이렇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그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폭력은 당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라는 사실을 도출할 수 있다.
폭력을 묘사한 벽화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시칠리아 아다우라 동굴에서 발견된 암각화이다. 연대는 후기 에피그라베트 문화시대 즉 기원전 10,000년으로 추정된다. 20명에 가까운 사람과 여러 마리의 사슴과 소들이 산만하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떤 의식이 행해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상부의 그림을 보면 중앙에 의미심장한 포즈를 취한 듯한 사람 2명이 누워 있고 그 둘레에는 8명이 각각 어떤 동작을 행하고 있다. 8명 중에 3명은 중앙의 두 사람을 보고 춤을 추고 있는 것 같고, 두 명은 구경하고, 한 명은 허리를 구부린 자세를 취하고 있고, 외부를 감시하고 있는 듯 등을 돌리고 있는 나머지 두 명 중 한 명은 창을 들고 있다. 각각 독립된 이런 동작들은 스틸 사진처럼 순간을 포착한 듯 생동감이 있다.
이제 중앙에 있는 두 사람을 주목해 보자. 이 두 사람은 구석기시대 회화에서 가장 유명한 호모 사피엔스다. 아랫사람은 두 다리와 목이 끈으로 연결되어 허리가 뒤로 저친 채 엎드려 있고, 위에 있는 사람도 똑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는데, 아마도 아랫사람은 죽은 듯한 모습이고 위에 있는 사람은 아직 죽지 않은 듯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 같다. 팽팽한 끈의 장력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그리고 남성의 성기 모양을 보란 듯이 그려져 있는 것은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이 두 사람은 왜 그런 동작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일종의 성인식으로서 혹독한 고통을 경험하게 하는 의식이라는 설과 샤머니즘의 의례로서 사람을 신탁에 바치는 행위의 일종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유력한 설은 어떤 규범을 어긴 범죄자를 고문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 고문 방법은 고문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고문의 하나로서, 목과 두 다리를 뒤로 묶어 두면 펴지려는 두 다리의 힘이 끈에 장력을 발생시키고, 그 장력은 목을 조이게 하여 결국 시간이 경과하면 목숨이 끊어지는 고문으로서 중세 때도 이런 고문이 있었다고 한다. 혹은 다른 부족과의 싸움에서 생포한 적군을 고문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유야 어찌 되었든 사람의 신체에 물리적인 힘을 가해 고통을 주는 행위인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이유 없는 폭력은 없기 마련이다.
유럽에 국한했을 때, 구석기시대는 가장 혹독한 빙기였다는 지질학적 사실에 비추어보면 호모사피엔스의 인구 분포는 대단히 미미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대인 폭력을 행사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많은 인류학자나 고고학자들이 주장한다. 구석기시대가 평화로운 시대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는 공감은 하지만 위의 예에서 보듯이 무결점의 무폭력 시대였다고는 단정 지을 수 없다. 적어도 대인간의 갈등과 다툼 같은 감정들은 살아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폭력적 충돌로 발전할 수 있는 동인이었을 것이다. 당시 전문 사냥꾼이었던 호모사피엔스는 이미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굴하지 않고 생존하며 진화까지 이루어낸 최상위 포식자였다.
20세기 인류학자들은 이런 구석기시대의 평화가 신석기시대로 이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지금은 그런 가정은 점차 균열이 생기고 있는 상황이다. 세기 내내 유럽에서는 인간의 선악을 두고 구두선 같은 논쟁을 벌였다. 폭력으로 점철된 유럽의 역사는 20세기 초반에도 세계 1,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인종청소 급의 온갖 학살을 자행했음에도 인간의 선을 찾고자 부단히 위선적인 논설을 쏟아냈다. 하지만 현재는 신석기시대 인간의 폭력은 구석기시대처럼 일회성에 국한하지 않고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추세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이다. 2011년 스티븐 핑거의 방대한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출판되자 이를 비판하는 역사 관력 학자들이 분기하여 필립 드와이어를 중심으로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라는 제목을 붙인 책을 출간하며 핑거에게 반격하였다. 이 책에는 18개의 반박문이 들어있다. 핑거가 말한 평화의 시대에 접어든 기원전 3,000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것으로 보이는 대량 매장지 유적들이 속속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핑거 반대론자들은 신석기시대 이후의 인간도 결코 선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쟁의 시대를 연 폭력적인 시대였다고 확신한다.
유럽의 50% 이상을 덮고 있었던 뷔름 빙기의 대빙하가 해빙되면서 십만 년 동안 갇혀있던 기름진 땅이 다시 햇빛을 보았다. 울창한 숲과 강줄기가 형성되고 동물의 개체수도 증가하였다. 이런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자 인구의 이동이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고, 서로 교류하면서 정착도 하고 인구수도 빠르게 증가하였다. 이런 인구의 증가는 비옥한 땅을 찾아 이동해 온 남동쪽 사람들이 중요한 한몫하였다. 기원전 6,500년에서 기원전 5,500년 사이에 아나톨리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주민은 선형토기와 농경이라는 선진 기술을 가지고 와서 중유럽 곳곳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수렵채집생활을 벗어나지 못한 기존의 공동체와도 접촉하며 서로 협력도 했지만 갈등도 빚으면서 이웃해서 살아갔다. 인구가 증가하자 대인간의 갈등은 증폭되어 집단 간의 갈등 양상으로 나타나 일찍이 겪지 못했던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중부 유럽에서의 폭력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상당한 인구의 증가는 폭력의 성격과 규모 그리고 전술, 목표, 사회적 개념의 변화를 야기한 배경과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이런 폭력의 증거는 명확하다. 구석기시대의 폭력의 증거는 동굴벽화나 암각화에서 발견되었지만, 신석기시대에서는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의 유골이 발굴되면서 당시 사건의 진실을 보여주었다. 구석기시대의 증거가 간접적이라면 신석기시대의 증거는 명징하고 실재적이었다. 또한 정착지에 조성된 울타리와 도랑 등의 구조물은 방어용으로써 당시 전반적인 폭력의 정도를 가름하게 한다. 삶의 질이 향상하면서 그에 따라 폭력의 형태도 발전을 거듭한 것이다.
당시 사용했던 무기는 돌도끼, 자귀형 곡괭이, 화살, 창과 투창기, 부싯돌 칼, 단단한 나무로 만든 곤봉, 뿔 송곳, 여러 곡각기, 새총 등이 있다. 이들 중에는 동물 사냥이나 농경에 사용하던 기구도 있지만 살상 전용 무기로 만들 것도 있었다. 이들 무기는 유골에 독특한 골절 패턴을 남겼다. 실험 생물고고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하면 특정 무기의 골절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 고고학과 인류학에서는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수집한 인간 유해를 데이터화하여 정량화시켰기 때문에 보다 쉽게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두개골 함몰이나 천공 같은 골절, 패리 골절, 뼈에 박힌 돌촉 같은 유형은 사고에 의한 상처일 수는 없고 부상 패턴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으며 이는 개인이나 혹은 집단 간의 고의적으로 자행된 폭력을 증거 한다는 것이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6개국에서 발굴한 유골 중에 두개골 2,300여 개를 분석한 결과 일반적인 외상 흔적이 있는 비율은 10.9%였다. 수량으로 따지면 영국 56개, 덴마크 44개, 프랑스 50개, 독일 48개, 스페엔 24개, 스웨덴 11개이다. 돌도끼나 자귀 같은 도구에 의한 치명적인 머리의 타격은 3.2%이고 나머지 7.7%는 일상적인 사고로 보이는 외상이었다. 하지만 대량 폭력 사건으로 보이는 집단 매장지에서 발굴한 두개골에서는 50%의 외상 유병률이 나타난다. 농경과 관련된 영토의 중요성 증가와 다양한 잉여생산 그리고 불가피하게 커지는 공동체의 규모와 그에 다른 공동체 간의 갈등과 불화 등으로 폭력이 발생할 기반을 제공하였지만 그럼에도 신석기시대 전체 시기를 호전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대량 살상 폭력 사건의 증가이며 이는 특히 중부 유럽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는 사회의 복잡성, 경제적인 차이, 인구 압력 등의 변화에 직면하면서 후세에게 불가역적인 전쟁의 개념을 상속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동안 신석기인의 폭력의 양태를 식별하는 과학적 방법은 많은 발전을 이루어 왔다. 발굴 유골을 연구하는 생물고고학은 폭력의 형태와 규모와 영향을 조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매장지의 형태, 묻힌 장소 등에서도 폭력의 전반적인 양상을 추론할 수 있다. 폭력의 증거는 골격에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특이한 매장 처리도 폭력 사건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고 웅크린 채 발견된 유골은 일반적인 묘지로 간주할 수 있지만 불규칙하게 주검이 쌓인 채 발굴되는 유해는 폭력의 형태로 예측 가능하다. 또한 뼈에서 상흔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서 타살이 아니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화살에 의한 부상은 33% 정도만 뼈에 남을 수 있다. 이는 화살 부상의 67%와 전체 부상의 50%가 골격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뼈 증거가 없더라도 폭력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폭력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죽음의 구덩이로 불리는 탈하임 매장지에서도 폭력의 명백한 뼈 외상 외에도 화살과 같은 날카로운 무기로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과거에는 유골에서 나타난 유합 되거나 유합 되지 않는 부상 분석 결과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많은 데이터가 축적되어 새로운 병변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을 하였다. 또한 폭력 관련 부상 수준을 잘 이해하려면 매장지와 주변을 세밀하게 살펴보는 것이 필수라고 한다. 매장의 형태, 형식, 크기와 규모 등은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대량 매장과 다중 매장에서 발굴된 유해 중 어린이와 여성이 다수라면 그것만으로도 학살이라고 규정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은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그리고 구석기시대 호모사피엔스의 유골 화석이 다수 발견된 고인류학의 보고이다. 그곳에서 중석기시대 이후 신석기시대의 많은 매장지도 발굴되어 고고학과 생물인류학의 발전을 이끌었는데 그중에서도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등 중부유럽에서는 집단 간의 폭력 흔적이 유별나게 많이 발견되어 선정성과 더불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이 지역의 사회문화를 이끌었던 호모사피엔스는 기원전 5,500년경 발칸반도 혹은 아나톨리아에서 당시 첨단 기술의 산물인 선형토기를 가지고 들어와 정착하고 처음으로 농경을 시작한 이주민이었다. 고고학자들은 당시를 선형토기문화(Linear Pottery Culture)라고 분류한다. 이 시기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하류에서 동석기시대를 주도한 우바이드인이 에리두에 공동체보다 큰 규모의 도시를 건설하고 혁명적인 문명을 창출할 때이다. 아무튼 이제 폭력사건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겠다.
(1) 쇼네크-킬리안슈타텐
2006년 독일 헤센주 쇼네크에서 건설회사가 도로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선형토기문화 시대의 집단 무덤을 발견하였다. 고고학 발굴단이 긴급 투입되어 조사한 결과 길이 7.5m, 넓이 0.3~7m의 협소한 구덩이에서 불규칙하게 쌓여 있는 26구의 유골을 발견하였고, 그 외에도 토기파편, 구운 점토 조각, 동물뼈, 석기 파편 등의 정착지 폐기물도 함께 발굴하였다. 이 유물의 조각 형태를 볼 때 죽은 자의 부장품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 무덤 주변에서 유럽 신석기시대를 이끌었던 선형토기인들이 모여 살던 특유의 긴 장방형의 주택 부지도 함께 찾아내어 그곳이 정착지였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 발굴지에서 고고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26구의 유골이었다. 방사선탄소연대 측정을 한 결과 기원전 5,207~4,849년의 유골로 판명되었다. 또한 유골을 세척하는 과정에서 인골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매장 당시 신체 내부에 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것은 대인 간의 폭력적 충돌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매장 상태도 일반적인 매장 관행이 아닌 마구잡이로 버려진 형태였다. 또한 도자기, 조개장식, 석기, 남성의 경우는 돌도끼 등 부장품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인 폭력에 의한 학살임을 확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2015년 크리스천 마이어와 그의 동료들은 PNAS(미국국립과학원) 저널에 쇼네크에서 발굴한 유골을 전수 조사 분석하여 논문을 발표하였다. 생물인류학적 방법론을 동원하여 분석한 결과 26구의 유해 중 6개월에서 21세 사이 13구, 22~40세 11구, 불확실 2 구로 조사되었다. 성별을 확인할 수 있는 개체는 11 구였고, 이중 여성이 2구, 남성이 9 구였다. 나머지는 골반 뼈가 심하게 파손되어 성별을 구별할 수 없었다. 골반 뼈는 성별 구분의 핵심이다.
마이어 팀은 현대 과학기술을 총동원하여 좀 더 세밀하게 유골의 병변을 조사하였는데, 그들에게서 결핵 징후, 비타민C 결핍, 골수염, 그리고 갈비뼈와 장골의 골절 치유 흔적 등 다양한 병변을 확인하였다. 현대인을 기준으로 당시 호모사피엔스들의 영양상태와 질병을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그럼에도 그런 분석은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고 무엇보다도 그 뼈에서 외상의 흔적을 찾아낸 것은 대단한 의미를 제공한다. 개개의 두개골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좌측 두정골에 완치된 함몰 골절, 좌측 두정골에 분쇄된 둔기에 의한 손상, 좌측 두정골에 외두개상의 흔적과 관통되지 않는 둔기 손상, 전두골에 외두개상과 둔기에 의한 손상 등 외력에 의한 외상 유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쇼네크 매장지의 특징은 사망 전 두개골 골절이 많은데 이는 탈하임과 슐레츠 매장지와 유사한 형태이다. 물론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손상의 모양으로 보아 도끼와 자귀 같은 여러 가지 무기로 타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농후한다.
또한 성인과 청소년 이하 유골을 분석해 보면, 두 그룹 모두 좌측 두정골에 외상이 집중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전형적으로 근접거리에서의 타격을 시사한다. 두 번째 많은 부위는 후두엽 좌측이고 세 번째는 전두엽인데 이는 청소년 이하 유골에서 많은 발견된다. 성인 두개골 손상부는 두정골 정면, 후두부, 광대뼈와 하악골 등이고, 청소년 이하는 두개골 정면, 두정골, 후두부, 상악골과 하악골 등이다. 그 밖에도 상완골, 척골, 대퇴골, 정강이뼈, 종아리뼈 등에서도 골절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런 많은 외상 흔적을 종합해 볼 때 돌도끼, 화살, 창 등에 의한 명백한 학살의 법의학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한 무리의 공동체로서 전체가 학살당한 것으로 합리적으로 추정한다. 또한 26구 중에서 여자 유해의 수가 적은 것은 공격자들이 포로로 잡아갔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당시 한 공동체의 총 구성원 수는 일반적으로 30~40명이며 성별 비율도 거의 같았다. 슐레츠 매장지에는 9대 2의 성별 분포가 나타나는데 이는 여성 포로설의 공통된 인류학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쇼네크 매장지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하지 부분에 폭력의 징후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특히 정강이뼈와 종아리뼈에 둔기로 타격을 받은 징후가 보이는데 인류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지만 이는 살해하기 전 고문의 일종일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가 폭력의 대상이 된 것은 다른 매장지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이동 제한, 탈출과 저항 억제, 공포 유발, 복종 예속 등의 목적으로 행한 폭력으로 추정한다. 물론 이런 골학적 증거가 고문과 시신 훼손으로 특정되는 것은 위험한 추측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가능성까지 배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선형토기문화기의 중부 유럽은 갈등과 폭력의 시기였다는 주장에는 다수의 인류학자들이 동의한다. 무차별한 학살은 곳곳에서 반복되었다. 납치, 고문, 절단, 매장 등 폭력의 패턴은 인류학에서 정의하는 선사시대 이후의 전쟁 개념과 일치한다. 대인 살해 행위는 당시 공동체 간의 전쟁에서 강력하고 유용한 전략이 되어 빠르게 진화하였다, 작은 공동체는 더 큰 공동체의 공격을 받아 합쳐지기도 하고 때로는 쇼네크처럼 섬멸되기도 한다. 공동체의 영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설정되고, 서로 인접한 다양한 공동체에게 식민화되고 흡수되어 사라졌다. 쇼네크 매장지는 가임기의 젊은 여성 납치, 고문, 상해, 그리고 살해 등이 당시 성행했다는 사실을 골학적 기록으로 증명해 준다.
그들은 왜 무차별한 공격을 받고 차갑고 협소한 땅에 파묻혔을까. 공동체의 크고 작은 변화와 붕괴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기후변화는 빙기 이후 안정적이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신석기 중부 유럽의 기후는 믿을 수 없었다. 이는 곳곳에서 인구의 증가에 따른 식량 자원의 압박 현상이 일어났고 그와 더불어 공동체 간에 생태학적 불균형 현상도 발생하여 어느 누군가는 결국 극단적 폭력적 선택을 하기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폭력 행위는 질 좋은 농지와 풍부한 식량과 장식품 같은 명예 물품과 이와 더불어 욕망의 분출구도 보장해 주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 설명할 대량 집단 매장지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된다. 결핍을 충족하기 위한 폭력 행위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서 가부장의 권위는 높아가고, 전사의 필요성이 등장하고, 질서와 규범의 개념이 세워지며, 이로 인해 공동체는 계급화되어 불평등이 만들어진다. 또 다른 개념의 폭력이 그들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럼에도 구성원은 강력한 카리스마 뒤에 숨어 타 공동체로부터 안위를 보장받는다. 결국은 욕망과 폭력과 권력욕이 사회의 중심이 된다.
(2) 탈하임, 죽음의 구덩이
1983년 독일 탈하임에서 경악할 만한 고고학 유물이 발견되었다. 바텐-뷔르텔베르크의 하일브론시 인근 탈하임 마을에서 포도 과수원을 운영하던 에르하르트 쇼흐가 자신의 주택 옆에 냉장창고를 건축하기 위해 터파기 작업을 하던 중 한 무리의 혼재해 있는 인간의 무덤을 발견한 것이다. 불과 한 평 남짓한 면적의 12cm 땅 아래에서 34구의 유골이 7,0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난 것이다.
이 유골을 전수 조사한 결과 기원전 5,100년 선형토기문화기의 사람들이었고, 어른 18구 중 남성 9구, 여자 7구, 성별 불능 2구 그리고 어린이가 16 구로 밝혀졌다. 복원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분석 결과 유해가 심하게 엉켜 있었고, 팔다리도 포개져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유해는 아무렇게나 구덩이에 던진 후 묻은 것으로 보였다. 유골 대부분에서 치명적인 외상과 완치된 외상 흔적이 뚜렷하게 발견되었다. 폭력이 일상적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상흔이었다. 18구의 두개골에서 선형토기문화기의 전형적인 날카롭게 부서진 외상 자국이 보였고, 14개의 두개골에서도 도끼 같은 무기에 의한 외상이 발견되었으며, 2~3개의 화살에 의한 자상도 찾아냈다.
인류학자은 뼈에 나타나는 외상 병변과 신체 부위 관통 각도와 폭행 당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세 등 폭력의 전반적인 양상을 파악할 수는 골학적 분석능력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법의학과 유사한 점이 많다. 탈하임 유해에서도 뒤에서 공격당한 것과 무릎을 꿇은 채 폭행을 당했다는 것을 밝혀냈고, 주로 둔기와 돌도끼와 돌화살촉 같은 무기가 사용되었다는 것도 찾아냈다. 두개골에 외상이 집중된 것으로 보아 도끼 형태의 무기로 오른손잡이가 뒤에서 머리를 타격한 흔적들로 추정되었다. 그 밖에도 목덜미, 후두부, 측두부에도 골절되어 있는 유해도 있었고, 팔과 다리뼈에도 심한 타박상을 입은 흔적도 발견되었다. 유해의 전반적인 외상을 분석한 결과 일방적인 폭력 행위였다. 가해자가 무방비 상태의 피해자들을 살해한 즉 학살을 한 것으로 강하게 의심할 수 있다. 새벽녘 잠자는 부족을 습격하여 아이들을 무차별하게 도륙을 하고, 도망가는 성인의 뒤를 쫓아 타격을 하여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인류학자들은 주장한다.
현재 인류학계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치아 법랑질 동위원소 분석 방법으로 탈하임 사람들의 치아를 분석하였다. 발굴된 당시에는 이들 34명 모두가 하나의 집단이었다고 분석을 하였지만 새로운 기술로 분석한 결과 이들은 3개의 집단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중 한 집단만이 해당 지역 원주민이었는데, 특이하게 이 구성체의 유골 중에서 여성 유골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여성 납치 사건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다수다. 반면 다른 두 집단의 여성들은 살려두지 않았다. 또한 주목할 것은 4세 이하 유아들 유골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는 다른 매장지에서는 볼 수 없는 유해 분포라고 한다.
현대의 지식으로는 사건의 재구성은 물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불가능하다. 언론에서는 탈하임 매장지를 죽음의 구덩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시각으로 볼 때 충격적이고 괴이한 죽음의 의식을 치른 듯한 오컬트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다양한 형태의 다른 죽음의 구덩이들이 발굴되어 충격 강도가 낮아졌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그들은 왜 구덩이에 묻혔을까.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탈하임에서의 특징적인 가설은 여성 탈취이다. 여성은 공동체의 구성원을 유지하는 모체이면서도 욕망의 도구이기도 하다. 선형토기인이 왔다고 하는 발칸반도 혹은 더 멀리 아나톨리아의 타스 테페 군락의 여러 유물을 보면 남성의 성기를 과시하는 형태의 석조물을 볼 수 있는데, 이미 당시보다 오래전부터 남성의 욕망 표출은 감출 수 없는 자연적인 현상이었는지 모른다. 다산의 신 조각상도 이와 비견된다. 탈하임 주변의 전사들은 여성을 탈취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공동체를 공격하였고 이 과장에서 함께 살던 다른 공동체와 충돌하면서 무자비한 폭력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추리해 본다. 이런 집단 간의 폭력 혹은 전쟁은 경작지와 식량자원 탈취, 복수와 원한, 우월성 과시, 노예납치, 그리고 위에서 논한 여성 납치와 다양한 갈등 등 여러 가지 원인이 겹쳐지기도 하면서 거리낌 없이 발생하였다. 결과적으로 죽음의 구덩이는 폭력의 역사를 증거 하는 핵심적인 현장으로 남아있다.
(3) 아스파른 슐레츠
오스트리아 남부 아스파른 주 슐레츠 지역에 대단위의 선사시대 정착지가 있다. 비엔나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이곳을 항공 촬영하면 타원형 형태의 정착지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1983년부터 시작된 발굴 작업에서 평균적으로 넓이 4m, 깊이 2m, 길이 330m에 이르는 긴 도랑이 정착지 외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는데 방어 요새의 도랑으로 추정된다. 도랑을 파고 그 안쪽으로 나무로 만든 방책을 만든 것 같다. 그 울타리 안에는 12개의 긴 장방형 형태의 주택 터가 있는 것도 조사되었고, 도랑 곳곳에는 흙으로 만든 다리 통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하였다. 그 요새 안에서 아마도 수백 명의 선형토기인이 모여 살았던 것 같다.
바로 이 요새 해자 도랑 일부에서 7,000년 전에 사망한 67구 유해가 발굴되었다. 이들 유해는 선형토기문화 특유의 장례 풍습에서 벗어난 형태로 불규칙하게 한 곳에 쌓여 있었는데 사지가 결손 된 불안전한 상태였고, 팔다리 등도 상당 부분 멸실되었고, 잘린 두개골이 따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는 최대 예상 매장 수 300명의 일부라고 추정하고 지금도 발굴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아직도 나머지 유해는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67구의 유해를 분석한 결과 청소년 이하 27구, 남성 26구(청소년 16구, 노인 10구), 여성 13구(청소년 4구, 노인 9구), 성별 불명 1구 등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뼈와 치아를 분석한 결과 만성 빈혈 징후와 비타민C 결핍, 채식 위주의 먹었다는 것을 밝혀냈고, 상처를 입은 많은 뼈에서 염증성 질환의 병변도 찾아냈다.
무엇보다 이들의 유골에서 선형토기문화기의 돌도끼 또는 이와 유사한 둔기로 맞은 외상이 다수 발견되었다. 즉사의 원인으로 보이는 치명적인 두개골 외상이 곳곳에서 관측되었던 것이다. 이런 대인 폭력으로 보이는 두개골 외상 외에도 이들의 많은 유골에서 파편화된 흔적과 갉아먹은 듯한 동물의 이빨자국도 관찰되었다. 이는 사망 후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하고, 더 직접적으로 추정하면 방치된 죽은 시신을 동물들이 뜯어먹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사망자들의 나이와 성별 분포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성비의 불균형이다. 가임기의 젊은 여성이 매우 적은 것으로 보아 탈하임이나 쇼네크의 경우처럼 가해자 집단에게 포로로 잡혀간 것으로 보인다. 기후 변화로 인한 식량자원 압박으로 다른 정착지를 공격할 수도 있지만 당시 대체적으로 안정적인 기후와 잉여 생산물 등으로 인구가 급증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다른 원인이 작동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감정과 욕망이 보다 깊게 폭력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에바 마리아 와일드는 2016년 논문에서 선형토기문화의 농경 사회는 초기엔 평화로웠지만 말기에는 폭력성이 일반화되어 아스파른-슐레츠처럼 요새화된 주거지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그는 67구의 유해를 조사한 결과 이들은 거의 동시에 살해되었다고 밝혔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지역 경제 체제가 붕괴되어 집단은 고립된 상황에 직면하였고 이웃 간에 지엽적인 소규모 전투가 빈번해졌다. 이주의 물결을 타고 인구 압력 상황이 벌어지고 집단 간에 적자생존과 더 나아가 약육강식의 시대가 펼쳐졌는지 모른다. 기원전 4,000년 기 중반에 선형토기문화가 갑자기 사라진 것은 당시 이런 시대적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결과일 수도 있다. 당시 유럽은 대 이주의 시대였다. 이 유적지에서 이후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정착지의 불가역적인 종말을 의미한다고 그녀는 설명했다.
2023년 야곱 마우러는 비엔나 자연사박물관 등의 지원으로 슐레츠인들의 유해를 DNA분석했는데, 이들은 대가족의 형태가 아니라 매우 느슨한 관계였다고 결과를 발표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슐레츠 요새는 어느 한두 개의 집단이 모여서 형성한 주거지가 아니라 일종의 주변 정착민들의 피난처 역할을 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주변 커뮤니티에 어떤 갈등이 심화되면서 집단 간의 동맹을 결성하여 거대한 요새를 구축하기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누군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슐레츠 정도의 요새를 공격하려면 그들보다 규모가 크고 강력한 집단이어야 한다. 그렇게 어느 누군가가 이끄는 대규모 집단이 결국은 슐레츠 요새를 무너뜨리고 그 안에서 저항하던 무리를 제압하고 학살을 하였다. 마우러 박사는 슐레츠 정착촌의 규모로 보았을 때 그곳은 기원전 5,500년 경 발칸 반도에서 이주해 온 농경민들의 삶과 문화의 중심지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덴마크의 저명한 전투 고고학자 롤프 워밍은 이렇게 말했다. ‘서구 문화권에서는 당시 농경문화는 대체적으로 평화로웠다고 하지만, 농경사회는 환경과 외부 사회에 대한 방어와 적대적 태도를 품고 있었다. 농업은 땅과 미래의 정복이며, 권력과 통치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며, 이런 특징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 형성에서 흔히 기인한다. 선형토기문화는 유럽이 어떻게 체계적인 전쟁과 대규모 폭력의 유포 방식에 깊이 뿌리내린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를 많이 남겼다. 슐레츠 유적은 여러 면에서 농업생활 방식의 결과를 보여주는 끔찍한 사례이다’
(4)할버슈타트
할버슈타트 사건은 새로운 유형의 특이한 사건 구성을 가지고 있다. 탈하임과 쇼네크처럼 여성 탈취의 흔적도 없고 슐레츠처럼 규모도 크지 않다. 또한 헤르크스하임처럼 식인 풍습과 인신공양 같은 초현실적인 의례의 형태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갈등 구조가 형성되어 돌이킬 수 없는 폭력으로 치달았을까. 선형토기를 가지고 발칸반도 쪽에서 들어온 농경민과 당시 수렵 채집인 사이에 격렬한 갈등과 다툼이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공동체 내에서 벌어진 반란세력을 처단한 것은 아닐까.
2013년 독일 작센안할트주 할버슈타트시 남쪽 외곽에서 주택 신축공사 착공 전에 실시한 사전 고고학 발굴에서 많은 매장지가 세상에 드러났다. 그 발굴지는 6개의 선형토기문화 특유의 장가옥 터가 발견된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며 따라서 그 주변에 매장지가 있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론이 가능했다.
이 고고학 발굴에서 총 38개의 정상적인 무덤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직경 2m의 한 매장지에서 무릎을 구부리고 얼굴을 남쪽과 북쪽으로 향하게 하여 매장한 정형적인 규칙이 보이지 않는 마구잡이로 버린 듯한 9구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이 구덩이에서 부장품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정착지 폐기물로 보이는 적은 수의 도자기 파편만 보였다. 불규칙하게 엉켜있는 유해를 발굴하여 방사선탄소연대 측정을 한 결과 기원전 5,289~4,856년으로 밝혀졌다. 9구 중 25세~40세 남성 7구, 불분명이 2 구였다. 이 인구분포에서 주목할 것은 20세 이하 유해가 없다는 점이다.
2018년 6월 크리스찬 마이어 팀은 이들에 대한 고병리학적인 분석을 하여 네이처에 발표하였다. 이 논문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두개골 외상이 있는 7구 중 4구에서 두개골 손상 1개소, 1명에서는 2개소, 다른 1명에서는 5개소가 발견되었다. 이 중에 두개골 후방 골절이 92%이고, 두정골 후방과 후두골 상부와 전두골에도 일부 외상의 흔적이 나타났다. 두개골 왼쪽이 35%이고 오른쪽이 65%로 분포하는데 이는 탈하임과 슐레츠의 경우와 유사하다고 한다. 또한 외상성 병변의 크기와 형태는 삼각형 2개, 대략 20mm 내외의 천공 3개이다. 3명에게서는 오른쪽 대퇴골, 왼쪽 상완골, 왼쪽 갈비뼈 2개소 절단 등의 뼈골절도 찾아내었다.
이외에도 팔과 다리뼈가 비정상적으로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런 골학적 불연속성은 절단된 상태로 매장되었음을 시사한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살해 후 시신을 훼손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들의 뼈에서 설치류 같은 동물의 이빨 자국도 보였다. 이는 방치된 시신이 뜯어 먹힌 것으로 추정하며 그로 인한 탓인지 많은 뼈들이 유실되어 있었다.
이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 첫 번째 특징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린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학살 현장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어린아이들도 폭력에서 배제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할버슈타트 사건에서는 그와는 달리 아이들의 유해는 전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학살 사건은 일가족에 대한 공격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정상적인 다른 매장지를 조사하여 그 이유를 밝힐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진상 파악을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폭력의 원인과 양상을 추정해냄으로서 당시 신석기인들의 사회적인 행동 양식을 파악하여 데이터화할 필요성은 있다. 그것은 이후 역사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계산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 번째 특징은 성인 남성이 다수라는 점이다. 이는 공격받은 집단보다는 공격을 한 집단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는 매장지의 유골을 스트론튬 동위원소 분석으로 치아 범랑질을 분석한 결과를 고려할 때 정착민으로 보이는 다른 무덤의 유해와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이는 식습관의 차이를 시사하는 것으로서, 적어도 사망한 사람들은 타 지역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탈하임과 슐레츠와는 달리 의도적으로 통제된 상황에서 명확하게 타케팅 공격을 한 물증도 보인다는 점이다. 사후에 두개골이 손상된 것을 볼 때 적을 잡은 후 처형한 행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처형 관행은 문화적으로 용인된 폭력의 한 형태로서 사회적 응집력을 강화하고 보복이 가능한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줌으로써 다른 집단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고’ 이 논문은 밝혔다.
사실 현재의 인류학과 고고학은 사실을 규명할 수 없고 추정할 뿐이다. 그럼에도 탈하임과 슐레츠와 쇼네크 학살은 공동체 전체를 파괴한 것이라면 할버슈타트 사건은 그와는 다른 형태의 폭력적 경향을 보여준다. 아무튼 7,000년 전에도 폭력의 원인과 형태는 매우 다행했다는 것을 할버슈타트 주검들이 말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5)헤르크스하임
유럽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수많은 집단 매장지 중에서 헤르크스하임 매장지는 가장 미스터리 한 상상력을 유발한다. 선형토기문화기의 전형적인 유물과 함께 발굴된 500여 구의 유골들은 인류학자와 고고학자들의 상상력을 쥐어짜기에 충분한 의구심을 제공한다. 그들의 주검에는 대체 어떤 비밀이 내포되어 있는 것일까. 그들은 왜, 어떻게 죽었을까?
1996년 독일 라인란트팔츠 남부 라인강변에 위치한 헤르크스하임 외곽에서 건설회사가 산업단지 부지 조성작업을 하던 중 거대한 유적지를 발견하였다. 타원형 도랑으로 둘러싸인 6헥타르 크기의 거대한 거주지가 발견되었는데, 헤르크스하임시에서 지원받은 고고학자들이 긴급히 투입되어 발굴한 결과 선형토기문화기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의도적으로 도자기를 파손한 흔적이 보였다는 점이다. 이런 편린을 비롯해 손잡이를 절단한 작은 그릇과 손상된 조각품도 다량으로 발견하였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파편화된 유물에서 정착지의 존속기간이 50년이라는 사실도 밝혀냈고 더 나아가 500구의 유골도 함께 발굴하였다. 이 유골들은 대부분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있었는데, 망가진 기계를 해체한 것처럼 분해되었거나 혹은 부러져 있는 상태였다. 현재도 계속 발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고학자들은 최소 500구 이상이 더 발굴될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불완전한 유골들을 면밀하게 분석한 결과 많은 의문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내용들이 드러났다. 수많은 뼈에서 거칠게 자른 듯한 흔적과 긁힘과 타격 흔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런 징후들은 대게 동물 뼈에서 발견되는 것들이었다. 이는 연조직 분리, 두피 제거, 뇌 제거 등의 흔적으로 보이며,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도살의 증거라고 인류학자들은 말한다, 처음에는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벌여졌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지만 치명적인 두개골 손상이나 뼈의 골절 같은 외상을 찾을 수 없었다. 폭력으로 사망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2차 매장지 가능성이 유력하게 등장하였다. 다른 장소에서 시신을 옮겨 와 어떤 의식을 치른 후 매장을 하였다는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또한 스트론튬 분석을 한 결과 매장된 사람들은 타 지역에서 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토기 분석 결과와 일치했다. 인류학자들은 이들이 아마도 산악지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추정하고, 상대적으로 관례에 따라 매장된 사람들은 원주민이라고 본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은 발굴된 다양한 토기를 분석하여 복잡한 이 사건의 진실을 추리해 냈다. 구덩이에서 9개의 서로 다른 토기를 발견했는데 이것들은 400~500km가 넘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건들이었다. 중유럽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선형토기문화의 고고학적 연구는 잘 정립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믿을만한 분석이었다. 이런 정황들을 종합하여 사건을 재구성해보면 헤르크스하임 주검들은 타 지역에서 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유골에 나타난 여러 형태의 흔적들을 종합하면 적어도 식인 행위라는 추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왜 식인 행위를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뼈는 최소한 그런 행위를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종교적인 의식 설도 있다. 여러 공동체가 어떤 위기를 막기 위해 헤르크스하임에 모여 종교적인 의식을 거행하였다는 것이다.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믿는 신적인 존재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 즉 사람을 봉양하여 어떤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인신공양 설은 소설 같기도 하지만 적어도 생존 목적을 위한 식인 행위일 가능성은 낮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500명이라는 개체수는 식인 행위를 하기엔 너무 많은 것은 사실이고, 모든 현상들을 볼 때 표준화 되고 반복적인 의례의 관행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또한 식인 행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많은 인류학자들마다 많은 가설을 내놓았지만 정답을 찾을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질서 정연한 파괴와 알려지지 않은 의식이 존재했을 것은 확실’하다.
(6) 포토차니
신석기시대 폭력 사건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 장소는 광범위해지고 발전된 폭력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인간이 본격적으로 전쟁의 개념을 만들어내고 정량화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구가 증가하고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고 조직화되면서 사회적인 갈등 요소가 드러났고 그에 따라 정치권력적인 욕망이 그 사회를 지배하기 이르렀다. 폭력과 욕망의 관계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방정식이 되었다. 청동기와 철이 인간의 손에 쥐어지기 전부터 그들은 그렇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7년 크로아티아 북부 표제가 계곡 파푸크 산 남쪽 경사면에서 고고학 조사가 진행되던 중 폭우로 인해 토사가 유실되면서 작은 구덩이가 발견되었다. 가로세로 2m에 깊이가 1m 밖에 안 되는 작은 구덩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구덩이를 파자 불규칙하게 겹겹이 쌓은 41구의 유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고고학 발견은 이후 10년이 지난 2017년, 크로아티아 인류학연구소와 와이오밍 대학 인류학과 등의 지원을 받은 이보르 얀코비치 팀이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매장지는 크로아티아에서 처음 발굴된 대량 무덤으로서 최신의 생물고고학과 유전학과 동위원소 분석 같은 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분석하였다.
유해를 방사선탄소연대 측정한 결과 기원전 4,100년이 나왔으며, 함께 발견된 토기 조각은 라신야 문화기로 판명되었다, 라신야 문화는 신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로 가는 과도기인 기원전 4,300년 ~ 기원전 3550년 사이에 동유럽에서 번성한 고고학적 문화이다. 라신야 문화는 크로아티아를 비롯해 북부 보스니아,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남부, 헝가리 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분포하였다. 이들 유적지에서는 긴 구덩이와 지상 건축물의 흔적과 그리고 발전된 토기와 구리 야금술과 소 사육 등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선형토기문화로 대변되는 신석기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발칸반도 혹은 아나톨리아에서 금속기술을 가지고 새로 유입한 이주민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얀코비치 팀이 사후 외상이 뚜렷한 4개의 두개골을 정밀 분석한 결과 균열, 관통, 함몰, 절단 등의 외상 유형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나머지 9구의 두개골에서도 이와 유사한 외상 분포와 패턴을 보여주었다. 그러면 4개의 두개골을 보다 깊이 관찰해 보겠다.
두개골 1
성인 남성(20~25세) 사후 골절 4개소 ➀우측 두정골 관통 외상-10mm 직경의 둥근 모양, 우측 두정골 관통 외상-직경 13mm의 둥근 모양 ➁후두골-길이 8mm, 사상봉합선-길이 13mm 골절, 깔때기 모양으로 떨어져 나감 ➂후두골 관통 외상-원형 직경 13mm ➃왼쪽 두정골과 왼쪽 측두골-둔기 외상
두개골 2
젊은 여성(20세~35세) 사후 골절 3개소 ➀전두골 좌측 관통 외상-길쭉한 형태 28*9mm 크기 ➁오른쪽 정수리 람도이드 봉한선 근처 골절-길쭉한 형태 37*9mm 크기, 관통하지 않은 함목 ➂좌측 두정골 골절-길쭉한 형태 58*10mm 크기
두개골 3
중년 남성(35세~50세) ➀전두골 중앙부-타원형 21*13mm 크기, 둔기 외상 흔적 ➁전두골 우측 및 정수리 우측 관상복합선 부위-타원형 31*29mm 크기, 둔기 타결 흔적 또는 골절 ➂우측 전두골-22*14mm 크기 두 개 거대한 골절선
두개골 4
젊은 남성(20세~35세) ➀우측 두정골 둔기 외상-28*19mm, 두개골에 타원형 함몰과 골절선 ➁우측 두정골 둔기 외상-26*19mm, 골절선 타원형 함몰, 관통 직전 상태
4개의 샘플 모두에서 오른쪽 측면에 다발성 외상으로 보이는 일관된 외상 양상이 나타나 있으며 사용한 무기도 다양하다고 한다. 라신야문화기에 사용된 작업도구인 절삭날을 가진 자귀, 도끼형 자귀, 소형 망치형 도끼와 간단한 동금속 도구 등이 무기화되어 대인 폭력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른 9구의 두개골에서도 위 4구와 같은 일관된 외상 흔적이 나타났다.
이런 외상 흔적은 전투나 대결이 아니라 일종의 처형 형식을 시시한다. 방어 흔적도 없는 것을 보면 여러 명이 이 폭력 사건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다. 부장품이 없다는 것도 타살을 시사하고, 구덩이에서 소수의 토기 파편이 발견되었지만, 파편의 형태를 볼 때 사후 풍화된 토기가 들어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28구의 유골에서 외상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는 이유도 골격에 외상을 입히지 않은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살해했을 것으로 추론한다. 이보르 얀코비치 팀은 종합적으로 매장지의 구조와 매장 형태와 그리고 유골의 상태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사건은 체계적으로 일관된 방식에 따라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사건의 진실은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합리적으로 추리를 해볼 때 그럴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나중에 결정적인 증거가 나온다면 뒤집힐 수도 있지만 현재의 여러 정황들은 학살로 귀결된다.
2021년 3월 크로아티아 과학기금에서 지원을 받은 마리오 노박 팀이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포토차니에서 발굴된 41구 중 38구에서 샘플을 채취하여 유전자 분석을 한 것이다. 발굴된 유골의 포괄적인 생물인류학적인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38구에서 유전체를 추출하여 데이터화한 결과는 이 사건을 또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들의 조상이 동일하다는 가능성이 93%로 나타났고, 또한 이들은 후기 신석기시대 유럽 농경민 즉 아나톨리아 신석기 조상 계열이라는 것도 밝혔다. 동쪽의 스텝 지역과 관련된 게놈은 전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당시까지만 해도 여전히 아나톨리아계가 동중부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들은 현재의 서유럽인의 조상은 아니다. 유라시아 중앙 스텝 지역에서 청동 기술을 가진 일군의 무리들이 동유럽을 경유해서 중서유럽으로 들어와 마지막으로 정착하였다는 것이 현재까지 게놈으로 밝혀진 정설이다.
이들 유해의 성별 나이 분포를 보면 남성 21명 여성 20명이고, 17세 이하 21명이고 성인이 20명이다. 이들은 다양한 여성 혈통을 가진 대규모 공동체였고 이중 11명이 가족 관계였다. 분석팀은 이들 11명의 가계도를 작성했는데 부자 부녀 관계, 사촌관계, 심지어 이복형제 관계까지 찾아냈다. 그리고 치아 분석을 한 결과 어린이에게서 영양실조의 징후가 있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이보르 얀코비치 팀이 밝혔듯이 마리아 노박 팀도 이들의 두개골에서 외상 흔적이 발견하였다. 2~5세 여자 1명, 6~10세 여자 1명, 11~17세 남성 3명, 여성 1명, 18~35세 남자 1명 여자 4명, 36~50세 남성 2명 총 13명에게서 두개골에 외상 흔적이 있다고 밝혔다.
포토차니 학살은 친족 집단을 표적으로 삼지 않고 여러 가족으로 구성된 공동체 전체를 공격한 전형을 보여준다. 어떤 이유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이 사건은 집단 간의 전투 형태가 아니라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성별과 연령 상관없이 자행한 무자비한 학살극이었다고 분석팀은 강조한다. 씨를 말리는 전형적인 공동체 파괴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유럽에서는 많은 죽음의 구덩이가 발굴되었다. 헝가리 에스테르 갈리 호르타더에서는 기원전 4,856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남성 38명의 유해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에게서 포토차니와 유사한 유골 형태가 나타났다. 스페인 산 후안 안테 포르담에서도 하나 이상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구덩이가 발견되었는데 놀랍게도 338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의 유해에서도 다량의 치명적인 외상이 발견되었다. 폴란드의 코시체에서도 기원전 3,000년으로 추정되는 15구의 유골이 발굴되었고, 영국 차터하우스 워렌의 구덩이에서도 기원전 2,197년에 폭력으로 사망한 37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3. 아이스 맨 외치
유인원 집단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폭력이 빈번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호모사피엔스의 대인 간 폭력은 인류의 시작과 함께 동반되었다는 것을 진화적 관점에서 도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석기시대의 고고학적 발굴이 미미하여 인류학적 해석에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착한 천사’를 제대로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재는 신석기시대에 공동체 간 대량 폭력 사건이 횡횡했었다는 물증이 1980년 이후 우후죽순처럼 많이 발견되었다. 농경을 발전시키며 정착을 시작한 신석기인들은 수렵채집생활로 절대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안정화되자 타살이든 자연사이든 수백 명을 매장할 수 있는 묘지를 만들었다. 사회적으로 관습이 된 이런 장례문화로 인해 폭력적 외상을 입고 사망한 유해를 현대인이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인류학자들 사이에서도 신석기시대의 시기와 장소에 따라 차등을 두지만 선형토기문화기에 유독 치명적인 폭력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는 설에는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추세이다. 그 문화기에 치명적인 외상으로 수십 명씩 죽은 유해가 전방위적으로 발굴되었다. 특히 독일 남부에서는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무차별한 치명적인 폭력으로 하나의 공동체가 전멸한 것과 때로는 고문의 정황이 보이는 것은 일회성이 아니라 일반적인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석기시대 학살에 대해 여러 가지 논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치명적 폭력이 반복적이고 패턴화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학살은 다양한 형태의 집단 간의 갈등과 힘의 불균형에 의해서 발생한다. 피공격자들은 비인간화되어 매장의 전례에 따르지 않고 동물 사체처럼 마구잡이로 매장되고 때론 훼손되기도 했다.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예를 들어보자. 공동체 간 식량 자원의 불균형이 갈등의 원인이 되어, 결국엔 폭력으로 다른 집단을 섬멸함으로써 부족함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익은 놀랍도록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도 그들은 인지하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타인을 해치는 개인의 자아와 공동체의 정체성에도 문제가 발생하지만 폭력에 의한 이익을 앞설 수는 없었다. 독립적인 공동체 간의 관계 네트워크는 이렇게 극단적인 폭력으로 증폭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이런 경향은 신석기 말기와 청동기시대 초기에 와서는 전문화된 전사의 개념으로 정착하였다. 폭력의 양상은 더욱 치명적이 되어 또 다른 형태의 무차별한 폭력으로 진화한 것이다. 전문화된 폭력 무기가 발명되고, 이런 무기를 가지고 전사들이 벌인 대규모 전투가 이어지고, 이와 더불어 공동체 내에서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계급화가 구축된다. 처음엔 생존하기 위해 타 공동체를 공격하였지만 이제는 공동체의 권력자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구성원을 강제로 동원하여 영토 전쟁을 유발한다, 그렇게 폭력의 형태는 빠르게 진화하였다.
유럽 전역에 수많은 선사시대 집단 매장지가 분포하고 있다. 이 중에 죽음의 구덩이는 소수이고, 다수는 그들만의 고유한 장례 절차에 따라 매장한 집단 묘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석기시대 이후의 인간의 폭력성이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의 구덩이가 소수라는 이유로 당시 폭력이 많지 않았다고 단정하면 그건 이분법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은 복잡하다. 단지 삶의 환경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당시 적은 인구수로 볼 때 타살된 것으로 추정하는 전체 유해의 수를 비율로 따지면 간단히 넘길 수 없는 수치이다. 또한 현재의 과학기술로 유해의 뼈에서 찾아낸 외상 흔적만으로 치명적인 폭력이 있었다는 사실 밝혀냈지만, 그건 대단히 보수적인 추론이고, 동물이나 인간은 뼈에 상흔을 남기지 않고도 사망할 요인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이는 정상적인 묘지에서도 폭력에 의한 주검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인 2023년 영국 에든버러 대학 고고학자 린다 피비거 박사 팀이 발표한 것을 보면 기원전 6,000년~기원전 2,000년 사이에 사망한 2,300구의 유골 중에 10%가 무기에 의한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는 폭력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호모사피엔스의 진화 과정에서 유럽을 비롯한 신석기시대는 인류 진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지만 폭력이라는 유산도 남겼다. 인류의 문명도 급속하게 발전하였듯이 폭력도 그에 따라 고도화되었다. 어쩌면 인류의 문명과 폭력은 불가분의 관계인지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폭력이 없었다면 인류의 문명은 이처럼 발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극단적인 예가 바로 20세기에 나타나지 않았던가. 지구가 거대한 폭력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지금의 문명을 이룩해 냈기 때문이다. 이런 반전은 조물주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은 자신이 만든 인간이 이루어낸 이런 이율배반적인 결과에 결코 박수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분노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능멸했기 때문이다.
외치라는 사람이 있다. 인류학자들이 아이스맨이라고 별명을 붙여준 이 남성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5,300살이 넘었을 것이다. 그는 1991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경계로 하는 외츠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푼다 디 피날레 산 3,210m 지점에서 당시 등산을 왔던 헬무트 부부에 의해 빙하에 반쯤 갇힌 채 발견되었다. 놀라운 것은 유골이 아니라 미라 상태였다. 이후 다양한 생물인류학과 법의학 등을 동원하여 수 차려에 거쳐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들은 아이스맨에게 외치라는 친숙한 이름도 지어주었다. 외치는 신장 160cm에 몸무게는 50kg이었고 사망할 당시 45세였다. 5천 년 이상 줄곧 빙하에 묻혀 있어서 상피조직은 많이 유실되었지만 대부분의 장기 조직은 제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치아 법랑질 분석을 한 결과 발견된 곳에서 북쪽으로 50km 거리에 있는 벨투르노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였고, 얼굴도 복원하여 언론에 발표하기도 했다. 위속에 남아있는 음식물을 DNA 분석하였는데, 산악지대에 서식하는 산양의 육포와 생고기. 말사슴, 허브의 뿌리와 열매, 외알밀로 만든 빵을 먹은 것으로 밝혀졌고, 외치의 주변에서는 그가 소지했을 것으로 보이는 보리, 아마, 양귀비, 블랙손(야생자두) 등의 식량이 남겨져 있었다. 또한 약재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자작나무송편버섯과 불쏘시게로 사용했을 말굽버섯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다양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화살에 맞은 상처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보이는 혈액 자국에서 놀랍게도 단백질 변형이 일어났지만 적혈구를 축출할 수 있었는데, 분석결과 적혈구 상태는 정상이었다고 한다. 또한 골반, 넙다리뼈, 정강이 뼈가 변형되어 있었고, 갈비뼈 골절, 편충 감염, 충치, 손톱 고랑, 내장에 위나선균 등을 발견하였다. 또한 외치의 남아있는 상피조직에서 문신이 있는 것도 확인했다. 상피조직이 거의 사라졌지만 다파장 스펙트럼 촬영 기법으로 맨눈으로 보이지 않던 문신을 찾아낸 것이다. 다양한 문양으로 이루어진 61개 문신이 전신에 걸쳐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지구에서 발견된 미라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신이라고 한다.
외치가 걸치고 있는 복장에서도 5천 년 전의 복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망토와 여러 가지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긴 외투, 허리띠, 바지, 속옷, 모자와 신발 등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의류는 모두 동물의 심줄로 만든 실줄로 기워서 만들었다. 그 옷 안에는 긁개, 찌르개, 뼈송곳, 부싯돌, 말린 버섯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 시선을 모은 것은 신발이었다. 곰 가죽으로 만든 밑창은 견고했고, 방수와 보온 기능에도 신경을 썼음을 보여주었다. 형태를 보면 전문적인 제화공이 만든 것으로 보였다. 제화 전문가들은 볼이 넓은 것으로 보아 설피 위에 신는 신발이라고도 추정했는데 , 지금 이대로 만들어도 훌륭한 신발이 될 것이라고 놀라워했고 실제로 어떤 제화가는 복제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외치가 소지하고 있던 도구와 무기들도 다양했다. 순도 99.7%의 순동 도끼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머리카락에 비소가 발견된 것을 보면 구리를 직접 제련한 것으로 보인다. 그 순동 도끼는 가죽 끈에 의해 주목으로 만든 자루와 견고하게 매여 있었다. 동기시대에도 여전히 석기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을 정도로 당시 동금속은 대단히 귀했다. 외치가 동도끼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지위가 공동체에서 상당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밖에도 물푸레나무 손잡이에 각암을 부착해 만든 단도, 동개(화살통 세트)에 담긴 14개의 돌화살촉 등도 외치가 소지하고 있었다. 화살대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대신 화살줄은 발견되었는데 그 길이를 추정한 결과 활의 크기는 182cm의 장궁이었다고 한다.
그럼 외치는 왜 그 험악한 곳에서 죽었을까. 인류학자들은 처음엔 외치의 사망 원인은 급격한 자연 재난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폭력에 의한 사망을 배제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설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나타났다. 왼쪽 어깨에 박힌 화살촉이 직접적인 사인이라는 주장이 지금은 정설로 받아주고 있다. 화살촉을 뽑아내려고 했던 흔적도 보였다. 이밖에도 그의 머리에는 둔기로 맞은 것 같은 외상 흔적이 있었고, 엄지손가락에는 뼈 근처까지 깊게 파인 자상도 관찰되었다. 또한 그이 몸에 있는 혈흔을 분석한 결과 단도, 화살촉, 외투에서 4명의 각기 다른 혈액을 발견하였다. 이 혈흔을 가지고 당시 상황을 추리해 보면, 외치가 자신의 단도로 어떤 사람과 결투를 벌였고, 화살로 두 사람을 공격한 후 부상당한 누군가 한 명을 등에 짊어지고 이동하였을 것이다라고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다. 아무튼 이에 대한 반론도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치는 어느 무리와 처절한 싸움 끝에 많은 상처를 입고 이 황량한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무리는 외치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그곳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산속을 헤매다 그곳에서 피를 다 솟아내고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외치는 왜 피 비린내 나는 폭력의 중심에 있었을까.
참조 논문
1. New insights on interpersonal violence in the Late Pleistocene based on the Nile valley cemetery of Jebel Sahaba : 제1저자 Isabelle Crevecoeur
2. Patterns of Violence in the Pre-Neolithic Nile Valley : 제1저자 Petra Brukner Havelková
3. Inter-Group Violence among Early Holocene Hunter-Gatherers of West Turkana, Kenya : 제1저자 Marta Mirazon Lahr
4. The massacre mass grave of Schöneck-Kilianstädten reveals new insights into collective violence in Early Neolithic Central Europe : 제1저자 Christian Meyer
5. Early Neolithic executions indicated by clustered cranial trauma in the mass grave of Halberstadt : 제1저자 Christian Meyer
6. Genome-wide analysis of nearly all the victims of a 6200 year old massacre : 제1저자 Mario Novak
7. Prehistoric massacre revealed. Perimortem cranial trauma from Potočani, Croatia : 제1저자 Ivor Janković
8. Neolithic Massacres: Local Battles or General War in Europe? : 제1저자 Eva Maria Wild
9. Conflict, violence, and warfare among early farmers in Northwestern Europe : 제1저자 Linda Fibi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