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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May 08. 2021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갯골에서 광치령 너머로

길을 가다 보면 길을 잃어 엉뚱한 길로 갈 수도 있다. 자의든 타의든 그런 상황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치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그 계획이 무용지물이 되어 황망함에 빠질 때도 있고, 계획의 톱니바퀴 하나가 빠져 삐꺼덕거릴 수도 있고, 가벼움으로 시작했다가 엄중함에 봉착할 수고 있고, 그러면서도 슬기롭게 마무리하기도 하고, 때론 길이 거기 있기 때문에 걷는다는 명제를 믿다가 실존적 수렁에 빠지기도 하고, 길이 권태로울 때도 있고, 길과 다투기도 하고, 이 길을 왜 가야 하는지 의문을 던지기도 하고, 의미를 찾다가 의미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의미를 두지 않다가도 의미를 찾기도 하고, 소풍길을 꿈꾸지만 결코 그러지 않다는 것을 통찰하고, 그러면서 길을 걷는다. 그렇다고 길은 어떤 의미나 평화나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걷는 자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상투적인지 모르지만, 길은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겨울 새덕산 임도 트레킹을  때, 아침에 예고도 없던 눈이 내려 불가피하게 당초 일정을 바꿔 힘든 산행을 해야만 했었는데, 이번에는 버스 운행 시간을 잘못 계산하여 혼쭐이 났다. 전철을 타고 춘천으로 가면서부터 지독한 생리현상으로 애를 먹다가 춘천시외버스터미널 해우소에서 겨우 해결한 후 홍천으로 이동했는데, 진짜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9시 25분에 홍천 터미널에서 떠나는 원통행 군내버스를 타는 데까지는 당초 계획대로 성공을 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하지만 그 버스는 예상 시간보다 40분을 넘긴 10시 50분에야 나를 인제 시외버스터미널에 부려놓았던 것이다. 10시 10분 정도에 도착하여 한숨 돌린 후 택시를 타고 갯골로 들어가서 늦어도 10시 30분에 산행을 시작해야 날머리인 가야리에서 원통으로 나가는 3시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 가야리 발 버스를 놓치면 저녁 7시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3시는 마지노선이었다.

      

그러니까 홍천에서 인제까지 가는데 무려 1시간 25분이 걸렸던 것이다. 시간 계산에 치명적인 버그가 있었다. 홍천읍과 인제읍, 두 읍내 사이에 있는 버스정류장들을 경유하면서 가는 군내버스라는 점을 감안하면 45분에 주파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내가 왜 그런 단세포적인 계산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40분은 나올 수 없는 답이었다. 그것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군내버스를 타지 않고 직행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야 옳았다. 승용차를 몰고 신나게 달려도 40분 정도인데, 대로변에 있는 마을이란 마을을 다 돌아가면서, 그러니까 정확하게 70개가 넘는 정류장을 거쳐 가는 군내버스가 45분 만에 인제터미널을 간다고...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신남 터미널에서는 아예 10분 동안 정차까지 했다. 피 같은 30분이 날아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일정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곧바로 택시를 타고 갯골로 들어갔다. 그나마 일용할 양식을 집에서 모두 준비해왔을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시간은 더 지체되었을 것이다.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머피의 법칙을 막을 수 없었다. 갯골에 들어서자마자 택시는 제대로 달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로에서 지중 매설작업을 하고 있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사 현장은 끝날 줄 모르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포장인데 도로 바닥은 공사로 인해 요철이 심하여 택시는 요동을 쳤다. 속도를 내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가야리 3시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택시가 손상될 것 같아 기사에게 괜히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당초 계획대로 출발점 근처까지는 가야 최소한 오늘 일정을 매조지할 수 있기 때문에 중간에 내리려는 생각을 꾹 누르며 기다렸다. 또한 택시기사에게 갯골 역사에 대해 취재를 하려고 했던 나의 의중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게 읍내 택시 기사들은 원주민 출신들이 많기 때문에, 간혹 택시를 탈 때면 그 지역에 대한 역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들에게 정보를 얻기도 했었는데, 그날도 그런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해 볼 작정이었던 것이다.

          

2021년 3월 27일 / 갯골 시작점

상상외로 공사구간은 계속 이어졌다. 풍경을 즐길 여유도 없었다. 이 좋은 계곡 숲길의 정취를 느끼지 못하다니, 더구나 이 먼 길을 왔는데... 정말 처음의 기대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 산행을 오래전부터 구상했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면서 상상의 나래를 폈던 갯골 풍경은 애석하게도 지금 공사 중이었다. 기대와 상상은 환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던 나는 공사용 소형 덤프트럭 꽁무니를 쫓아가고 있는 택시가 안쓰러워 더 이상 가지 못하고 택시를 세웠다. 한 10분 남짓 걸으면 산행의 시작점이었다. 전체적인 스케줄에 영향은 크지 않겠지만, 그래도 시간이 빡빡한 상황에서 단 몇 분이라도 아껴야 할 판국에 10분은 작은 게 아니었다. 택시를 다시 험악한 길로 되돌아 보낸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했다. 오늘 개시부터 재수 없다고 궁시렁거리는 택시 기사 목소리가 귓가에서 앵앵거리고 있었다.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갯골은 공사 중이었다. 인제군에서 추진하는 갯골 자연휴양림 건립 안이 몇 년 전 사업승인을 얻어 이제 본격적인 착공에 앞서 기반 시설공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청정지역에도 개발의 광풍이 비켜가지 못하고 있었다. 갯골은 숨어 있는 청정지역이었다. 흔히 말하듯, 맑고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갯골천은 기괴한 바위들과 울창한 숲과 어우러져 수려한 풍광을 만들고 있었다. 비교하자면 설악에 있는 계곡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특히 인제 읍내를 관통하는 소양강 줄기에서 갈라진 갯골은 삼십 리 길을 산속으로 굽이쳐 들어가는데, 그 사이에 그 흔한 펜션이나 전원주택 하나 없는 자연환경의 보고였다. 그렇게 실핏줄처럼 길게 들어간 갯골은 능선부를 따라 3킬로미터 이상 큰 모양으로 굽이치면서 더 올라가고 드디어 광치령 가는 옛길과 합류한다. 그 마루금이 갯골령이다. 여름이면 원시림과 계곡천은 자신의 능력을 120% 발휘하여 대자연의 화려함을 연출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공사 중이었다.

        

2021년 3월 27일 / 갯골의 전형적인 모습. 갯골 휴양림 건설로 이제 이 계곡도 한동안 치도곤을 당할 것이다.

장장 6킬로미터가 넘는 공사 구간을 지나 '유아 숲 체험원' 부근에 당도하니 그제야 학수고대했던 원래 숲길이 나타났다. 이제 고난의 행군은 끝나고, 오랫동안 품고 있던 샹그릴라가 눈앞에 펼쳐지리라는 기대감에 여유롭게 사진도 찍고 주위를 둘러보며 계속 걸었다. 하지만 부푼 기대감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오아시스처럼 잠시 평화로웠던 숲길은 곧바로 바리깡으로 밀어버린 것처럼 헐벗고 삭막한 조림지역으로 변모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아프리카 열병 방역 울타리가 해발 900미터 능선부까지 길게 이어졌다. 동물의 이동을 차단하기 위한 울타리인지, 그 대상이 사람인지, 때론 구분하기 어려운 심리적 경계선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험준한 산등성이를 벌목하는 산판 작업과 지루하고 긴 울타리 설치 작업을 하면서 버려진 각종 부산물과 쓰레기들이 길가에 즐비했다. 고되고 험난한 작업 흔적들이 신경질적으로 길가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 흔적들이 생생한 것으로 보아 산판 작업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고, 그 작업자들의 찌든 땀내가 아직도 곳곳에 배어 있었다. 좀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변변히 쉴 만한 곳이 없었고 사실 쉬고 싶은 마음도 있을 리 만무했다. 택시에서 내려 두 시간 동안 오르면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몸은 힘들고 마음도 천근만근이었다. 산길을 다니다 보면 산판 현장과 조우하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이런 불편한 감정은 처음인 것 같았다. 나의 이런 행위와 그들의 노동, 나의 세계와 그들의 세계는 영원히 접점을 찾을 수도 없다는 이질적 충돌이 불꽃을 튕기고 있었는지 모른다.

          

2021년 3월 27일 / 벌목 작업으로 황폐해진 갯골 상부

아무튼 세상이 무너져도 민생고는 해결해야 하는 법, 고갯길 중간에서 대충 식사를 한 나는 마지막 경사면을 크게 한번 휘감아 돌아 용을 쓴 후에야 드디어 능선 안부에 당도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 광명이 나를 반겨주었다. 이제 갯골은 자연휴양림을 건설하느라 한동안 어수선할 것이므로 다시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인제 읍내에서 걸어서 20리 길의 공사구간을 걷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택시를 대절해도 아마도 비포장 요철 도로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빨리 찾아온 것이 다행인지 모른다.


이제야 능선 길은 제대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 갯골의 혼란스러운 풍경을 멀리하고, 나는 계속 걸었다. 습한 지하실에서 한참 동안 숨어 있다가 지상으로 올라온 듯 숨이 탁 트였다. 경사가 거의 없는 널찍한 숲길이 양탄자처럼 펼쳐져 있었다. 자칭 지맥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명명한 도솔지맥의 주요 지점이었다. 그 능선을 따라 10여 분 가다 보면 양구 청리 무쇠정골에서 올라온 갯골령 마루와 조우한다. 작년 가을, 어느 청명한 날 산행 도반과 함께 올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은 흔히 말하는 코발트색 하늘이었다. 그 갯골령을 지나 능선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오늘 내가 가야 할 광치령이 나온다.

          

오래전 이곳 사람들은 해발 900미터가 넘는 이곳에 고갯길을 내고 넘어 다녔다. 그리고 갯골령에서 광치령으로 가는 능선 상에 서로 연결하는 오솔길을 냈다. 능선이 완만하여 길을 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강원도는 산도 많고 평균 해발이 높지만 완만한 구릉지역이 많아 산이 험하지 않기 때문에 상상외로 산과 골 따라 산길이 발달되어 있다. 이런 능선 상에 산판길이 있었고, 아직도 임도의 기능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접근이 수월했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그 골과 고개마다 이름을 지어 오늘까지 내려오게 했다. 인제에서 양구로 가는 지름길이 바로 내가 걷는 이 갯골령이었다. 짚신 신고 봇짐을 맨 남정네가 갯골을 올라 이 능선 길을 걷는 모습이 잠시 상상되고 있었다.

2021년 3월 27일 / 갯골령. 왼쪽이 양구 무쇠정골에서 올라오는 길이고, 오른쪽이 광치령 가는 길.

하지만 오늘은 일정이 꼬여 그렇게 한가롭지 않았다. 잠시 쉴 틈도 없이 나는 사진 몇 장을 찍고 광치령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능산 상에 이렇게 긴 임도가 있는 산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산에 꽤 다녔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도 이런 길은 보지 못했다. 임도의 목적이나 지맥꾼들의 길목으로서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군사적인 목적으로 더 필요한 길인지 모른다. 광치령도 한국전쟁 전에는 오솔길 수준의 고갯길이었지만 그 후 군부대가 양구와 인제에 대거 주둔하면서 길이 확장되었듯이 이 능선 길도 그 연장선에서 확대되었을 것이다. 길 곳곳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군 시설물들을 보면 이곳이 군사지역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길은 어떤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대자연이 스스로 만든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길을 걷는 나도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광치령에서 휴식을 취한다면 시간이 촉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나는 가던 두 다리를 거두었다. 광치령 터널 위에 있는 헬리포트에서 잠시 설악산 실루엣을 조망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급해도 그 풍광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지난 초가을 청명한 날씨에 조망되었던 그 설악산은 여기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하면서도 장엄한 모습이었다. 북한산처럼 산은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다르듯, 이곳에서 보이는 설악산도 색다른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산행 도반과 함께 연신 감탄사를 토해냈었다. 오늘은 비록 날씨가 흐려 선명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탁 트인 조망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었다. 사실 봉우리도 아니고 능선 상에서 이런 화려한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은 흔치 않았다.

          

광치령 헬리포터에서 본 설악산 / 오른쪽 2020년 9월 19일 찍은 사진

눈 호강을 한 김에 사과 하나로 칼로리를 보충한 후 광치령 마루에서 원통 방향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피 같은 시간을 10분이나 소비했으니 이제 그 시간을 보충해야 했기에 두 다리는 본능적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광치령은 50년대에 군사적인 목적으로 군에서 확장공사를 했지만, 민초들의 삶이 향상되면서 양구와 원통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한몫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신도로가 생겨 폐길이나 다름없지만, 고갯길 곳곳에 아직도 차도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양구에서 원통으로 가는 민초들을 실은 깡통 같은 버스가 울퉁불퉁한 비포장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 고갯마루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다시 브레이크 라이닝과 미션오일이 타는 냄새를 뿜어대며 뒤뚱뒤뚱 내려갔었다. 오래전 강원도를 여행할 때를 기억해보면, 이런 구절양장 고갯길을 쩔쩔매며 달리는 버스는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강원도 백두대간을 넘나들던 그 많던 고갯길은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 오래전이었다. 아마 삼척에서 홍천 읍내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완행 시외버스였다. 삼척에서 아침에 출발한 버스는 이내 험준한 백두대간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차선도 없는 비포장 도로였다. 마치 죽음의 도로라고 불리는 볼리비아 융가스 도로를 지나는 버스처럼 그 삼척 발 완행버스도 산허리를 감아 돌며 고도를 높이고 능선을 넘고 또다시 시꺼먼 매연을 토해내며 어느 이름 모를 고갯길을 투덜거리며 오르고 있었다. 깡통 같은 버스는 금방이라도 분해될 것처럼 불안했지만 굳건히 버텨내고 있었다. 그렇게 이름도 생소한 마을을 거쳐 정선 읍내 터미널에 정차한 후 승객을 갈아 태우고, 다시 좁고 굽이쳐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흙먼지 휘날리며 힘겹게 달렸다. 그리고 평창 읍내 터미널에 도착한 버스는 파발마가 마방에서 징을 갈고 체력을 보강하듯 한참 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동안에 승객들은 곡기를 채우고 다방에서 시간을 때우며 피곤함 몸을 건사했다. 그렇게 에너지를 보충한 버스는 다시 머나먼 여정을 떠났다. 아마도 버스는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에나 홍천에 도착할 것이다. 마른 흙먼지를 자욱하게 뿜어내는 버스는 산허리를 돌아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 버스는 내일도 그렇게 그 길을 따라 달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따위 완행버스는 중요하지 않았다. 두 다리는 빛보다 빠르게 왕복운동을 하고 있었다. 촌각을 다투어야만 했다. 원통으로 나가는 3시 버스를 놓치면 7시까지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서 기다리던지 아니면 몇만 원을 주고 택시를 부르던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현재 속도로 도저히 갈 수 없다면 마음을 내려놓겠지만 아직은 포기할 시점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 버스기사가 조증 같은 격한 감정이 몰려와 몇 분 더 빨리 출발시키는 불상사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이 앞섰는지 모른다. 설마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최대한 빨리 가면 성공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불굴의 의지와 고진감래 끝에 나는 버스정류장에 당도한 후, 드디어 몇 분 뒤에 버스를 타는 데 성공했다. 조금의 틈도 없이 피 말리는 30분이었다.          


버스는 텅 빈 도로를 시원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조금 열고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들어마셨다. 3시간 동안 격렬하게 움직였던 몸은 빠른 속도로 이완되고 있었다. 긴장감도 풀리면서 나른함이 시나브로 잦아들었다. 정확하게 시간을 지킨 버스기사에게 타면서 경황이 없어 하지 못한 감사의 인사를 내릴 때 필히 크게 하겠노라고 나는 다짐했다.

          

2021년 3월 27일 / 가야리 상촌 버스정류장

원통 버스터미널에서 내린 나는 3시 40분에 도착하는 홍천행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에서 기다렸다. 예전에 설악산 등반을 갈 때면 항상 정차하던 원통 버스터미널을 이렇게 발로 밟아보기는 처음이었다. 자동차라는 공간에서 보는 세상과 걸으면서 접하는 세상은 상당한 인식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헤비메탈 공연을 모니터에서 보는 것과 현장에서 라이브로 관람하는 것은 오감의 강도가 확실히 다르듯이 여행도 그렇다.


몇십 년 전부터 버스에서 보아왔던 2층짜리 허름한 터미널 건물 안으로 나는 들어갔다. 시간이 멈춰져 있는 건물 내부에는 대낮인 데도 셔터가 내려가 있는 매점과 변경된 시간표를 A4용지에 프린트하여 덕지덕지 붙어 있는 아크릴 버스시간 간판, 반달 모양의 매표소 구멍 안에서 들려오는 여직원의 투박한 목소리, 그리고 그 공간 중간에는 등받이 없는 플라스틱 의자 십여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버스를 기다리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홍천 가는 버스표를 산 나는 그 의자 틈새에 잠깐 앉아 있다가 구부정한 촌로가 들어온 것을 보고 밖으로 나갔다. 버스가 오려면 아직도 10여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출입문 옆에 있는 교회 의자처럼 긴 나무의자에 앉았다. 읍내버스와 시외버스 몇 대가 건물 앞 주차장에 나란히 정차해 있고, 그 버스 기사인 듯 한 중년의 사내 둘이 서로 밝게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으며, 배가 불룩한 다른 기사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니며 기사들 한데 나누어주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사이로 터미널 직원인 듯한 중년의 여자가 지나가자 서로 얘기를 주고받으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서화리로 떠나는 읍내버스가 시동을 걸자 터미널 건물 안에서 마실 나왔다 들어가는 구부정한 할머니와 유난히 얼굴 주름이 깊은 촌로가 나와 버스로 천천히 걸어가고, 조금 전 나무의자 끝에 걸쳐 앉아 스마트폰을 열독하고 있던 여학생이 황급히 일어나 버스로 뛰어간다. 오후에 내린다고 한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금방 그칠 비는 아닌 것 같았다.

    

속초에서 떠난 시외버스는 정확히 3시 40분에 원통 터미널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들어오지 않고 길가에 정차해 있는 버스에 여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올라탄 나는 비어 있는 맨 앞 좌석에 자리를 마련했다. 갱도처럼 어두운 안쪽에서 습한 열기가 훅 밀려 나왔다. 타고 보니 우등버스였다. 승객을 기다리는 막간에 운전기사는 문 밖에서 우산을 쓰고 서있는 안내 직원과 다정스럽게 사적인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대화 내용을 보니 비슷한 또래인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중년의 남녀는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인제 읍내를 빠져나온 버스는 홍천을 향해 시원스럽게 달린다. 나는 의자 깊숙이 몸은 묻히고 커튼에 반쯤 가린 차장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오전에 올 때 바로 이런 직행버스를 탔어야 정상적인 산행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깊지 않은 졸음이 몰려왔다. 졸음을 거부하지 않은 나는 그 잠에 다 잠시 내 몸을 맡기고 있었다.

          

오후 4시 20분경에 홍천에 도착한 나는 다시 4시 30분에 떠나는 시외버스에 몸을 옮겨 실었다. 원주에서 춘천 가는 시외버스였다. 왜 이런 편견이 있는지 모르지만, 원주에서 춘천 가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렇다고 2인 좌석이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후끈거리는 열기에 순간 현기증이 일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빈 2인용 자리에 앉은 나는 다시 찾아오는 졸음에 나를 맡겼다.

      

아직 갈 길은 멀었다. 춘천에 5시 20분경에 도착하면 다시 남춘천역으로 걸어가서  전철을 타고 춘천을 떠나야 한다. 아마도 한 시간 이상 혹은 멀게는 두 시간 이상 더 가야 집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던가, 산행 중에 집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비수처럼 심장을 찌른 적이 있었다.

      

그날 집을 나설 때는 전날 내린 눈이 폭설 수준은 아니었지만 명지산에는 폭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폭설로 뒤덮인 명지산을 갔는지 모르겠고 더구나 악명 높은 사향봉 능선 코스를 왜 선택했는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아무튼 거의 러셀을 하면서 높낮이 기복이 심한 암릉 수준의 능선을 가다 보니 나의 체력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심한 데는 허리까지 빠지는 곳도 많았다.  급기야 정상 1킬로미터 지점 어느 봉우리에서, 순간 오늘 집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불쑥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맨탈이 붕괴되는 현상이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나는 눈 위에 대자로 누웠다. 어디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공포가 엄습해왔다.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더구나 동쪽 능선 하늘에서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여기서 그 당시의 정신상태를 다 얘기할 수는 없고, 아무튼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나는 정상 등반은 포기하고 합수점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눈과 어둠과 사투를 벌이며 명지계곡으로 하산했다. 그리고 초주검이 된 채 간신히 막차를 타고 가평으로 나왔다. 이런 불상사의 원인은 들어올 때 가평역에서 처음 타야 할 버스를 놓치고 다음 버스를 탔기 때문이었다. 9시 30분 버스를 탔어야 하는데 10시 30분 버스를 탔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면서 페이스 조절을 실패한 결과 맨탈까지 날아가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가지 말았어야 할 등반이었다. 한편으로는 그 맨탈 붕괴 현상은 어떤 회심 같은, 돌발적 각성 현상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 후 의도적으로 산행의 강도를 완화시켰으며, 산행에 대해 전반적으로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 보면 참 많은 곡절을 겪게 된다.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있고, 어렵게 지나가는 경우도 있고 하지만 많은 경우는 슬기롭게 통과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평정심일 것이다. 문득 산티아고 노인이 떠오른다. 84일 동안 한 마리도 못 잡다가 사자 꿈을 꾼 후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간 노인은 사흘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거대한 청새치를 잡지만 결국은 상어에게 다 빼앗기고 말없이 집으로 돌아와 깊은 잠을 청한다. 그리고 사자 꿈을 꾼다. 언제가 그 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있었다. 물론 헤밍워이는 다른 의미를 숨겨 놓았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것은 담담함이었다. 실패를 하는 경우라도 담담하다는 것, 어떠한 상황에서도 담담하다는 것, 그 담담함은 길을 걸을 때 무게 추를 잡아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인지 모른다.

    

피곤이 몰려오고 있었다. 세포 속으로 파고드는 피곤의 파동은 라르고처럼 느렸다. 나는 그 느림을 느리게 음미한다. 긴 하루의 여정이 그렇게 무탈하게 마무리되고 있다는 사실에 8명의 운전기사와 갯골령과 광치령과 그리고 나에게 감사했다. 그렇게 나를 스쳐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리며 나는 달콤한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산티아고 노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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