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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Jul 16. 2021

소양강 조교뱃터, 그곳에 가고 싶다

소양강 조교리에서 수산리 산행

지난번 월명리 얘기를 하면서 춘천에서 양구 가는 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소양호가 만들어지고 나서 기존 도로를 대체하는 길을 즉흥적으로 만들었는데, 그 길이 지금의 꼬부랑길이며 양의 창자 같이 끊임없이 굽이쳐 돌고 도는 기형적인 도로가 되고 말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히말라야 산맥의 차마고도와 같다고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몰아붙이기 식 경제 개발의 결과였다.


아무튼, 하지만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소양댐이 건설되기 전의 이야기다. 설악산의 백담계곡과 십이선녀탕 계곡 그리고 한계령에서 발원하는 한계천 등이 합쳐져 북천을 만들고, 백두대간의 깊은 산속에서 발원한 내린천이 굽이쳐 흘러 인제에 당도하여 그 북천과 합류한다. 이제 북천과 내린천은 없어지고 소양강이란 이름이 붙여진다. 1973년 전에는 그 소양강이 인제의 협곡 지대를 지나 완만한 구릉지를 따라 양구와 춘천을 가로질러 흘렀다. 아직 북한강과 만나기 전이므로 그저 작은 강에 불과했다. 여름이면 물이 불어 무동력 줄 나룻배로 강을 건넜지만, 가뭄 때나 봄가을에는 마을 아이들이 얕은 곳을 찾아 도강하며 놀기도 했다. 그리고 겨울에는 꽁꽁 언 소양강을 육지처럼 걸어 다녔다. 특이한 것은 뗏목이었다. 한강에 댐이 만들어지기 전, 인제에서는 한여름 장마가 지난 후 소양강 수량이 풍부해지면 봄에  벌목한 소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서울까지 운반하여 팔았다고 하는데 그 행렬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전해지는 인제 아리랑이 당시 뗏목꾼들이 부른 노동요였다. 인제의 아름드리 소나무는 당대 최고의 한옥 건축 자재였다고 한다.


그 소양강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특히 춘천에서 양구로 이어지는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선사시대 유적도 많이 발견될 정도로 소양강변은 주거지역으로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평야지대는 아니었지만 춘천의 분지와 더불어 먹고살기에 크게 부족함이 없는 자연환경이었다. 그중에서도 북면 면사무소가 있던 내평리는 전교생이 몇 백 명이나 되는 초등학교가 있을 정도로 꽤 큰 마을이었다. 그리고 부창리라는 곳은 춘천에서 양구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서 오래전에는 파발마들이 쉬어가는 역과 주막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부창역에서 바특이 떨어진 곳에는 부창 나루터가 있어서 건너편 품걸리 늘목재를 넘어오는 사람들을 나룻배로 마중했다. 홍천이나 원주에서 춘천으로 가기 위해서는 소양강을 건너 부창을 거쳤다고 한다. 또한 품걸리뿐만 아니라 물노리 조교리 사람들도 소양강을 건너 부창을 통해 춘천으로 갔다.


그 소양강가로 도로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변도로였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소양강가에 사람이 살면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길이었다. 오래전에는 우마차가 다녔고, 자동차 시대 때는 버스 같은 대형차도 다닐 수 있는 신작로였다. 춘천에서 출발한 승합버스는 샘밭장터를 지나 삼막골과 부귀리를 거쳐 십여 킬로미터 달리다 보면 부창 고개와 만난다. 소양강가로 길을 낼 수 없어서 야트막한 언덕에 길을 냈는데 그 고개 이름이 부창 고개였다. 그 고개를 넘은 버스는 북산면 읍내에서 잠시 여장을 풀며 승객들을 갈아 태우고 다시 소양강가를 따라 추전리 수인리 웅진리를 거쳐 양구 읍내 들머리인 석현리를 지났다. 그 지점부터 버스는 소양강과 헤어졌다. 소양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자동차와 사람들이 소양강변을 따라 소통했다.

2021.06.05 / 소양댐에서 본 소양호

하지만 50년 전 그런 풍경은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그 공간은 현재 물속에 잠겨있다. 많은 아이들이 뛰어놀던 내평초등학교도, 메밀꽃이 화려하게 수놓던 강변도, 승합버스가 털털거리며 달리던 도로도, 그리고 3천 세대가 넘는 가옥들도 모두 물속에 잠겼다. 간혹 심한 가뭄이 와 수면이 낮아지면 그 당시의 흔적들이 드러나곤 하여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만들어지곤 했다. 그 잿빛 풍경은 마치 영원히 감추고 싶었던 어떤 오래된 음모의 현장이 모습을 드러낸 듯 무언가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우러나오게 했다.   


통계에 의하면 당시 3153세대가 수몰되었으며, 1만 8천여 명이 춘천시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대대로 살던 터전이 사라진 것이다. 지금은 몇 안 되는 그들의 후손들이 소양호 주면 언저리에서 어부와 소농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그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먼 미래에 소양댐의 필요성이 없어지거나 아니면 지구적 격변이 발생한다면 강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복원될 것이며 어느 누군가 그곳에 다시 정작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러 형태의 매스 미디어로부터 현재의 소양호 주변 마을을 오지마을이라고 소개받고 있다. 특히 대다수 지방자치단체에서 특정한 테마를 가진 길을 단장하고 홍보하는 데 발맞추어 소양호를 관할하는 춘천시에서도 물로리와 품걸리 주변에 ‘소양호 나루터길’이라는 이름의 오지마을 탐방을 주제로 한 테마길을 만들었다. 그런 아웃도어 활동에 관심을 가지는 대중들은 소수이지만, 그래도 자연의 숨결을 동경하는 대중들에겐 귀가 솔깃하는 단어이긴 하다. 평균 수면이 50미터 이상 높아짐으로 해서 수몰 후의 수면은 산속 깊이 계곡을 잠식해 들어갔고, 자연스럽게 소수의 사람만 사는 오지로 변하였다.


사실 소양호 주변은 인간이 만든 오지이다. 예를 들어 상대적으로 춘천시내와 가까운 신이리와 품걸리는 소양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어렵지 않게 왕래를 했지만, 그 후에는 배가 하루에 두 번밖에 들어가지 않는 후미진 곳으로 바뀌었다. 사람이 살기에 매우 불편한 곳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곳을 가리켜 ‘육지 속에 섬’이라고 불렀다.


소양댐 준공 후, 그 드넓은 호수에 뱃길이 만들어져 한 때는 하루에 10편 정도 운항할 만큼 여객선 시장은 활황을 이루었다. 소양댐 선착장에서 출발해 양구 석현리 선착장까지 왕복하면서 삼막골 내평리 조교리 물로리 품걸리 등 주변에 있는 여러 마을들을 경유했다. 지역민들에겐 낯선 이동 방법이었지만, 현실적으론 여객선은 유용한 교통편이었다. 소양호 북쪽 마을에 꼬부랑길이 만들어진 후에도 차편과 이동 시간 등이 만만치 않아 배편 이용자가 줄지 않았고, 남쪽에 있는 마을도 홍천이나 인제로 돌아서 가는 불편함 때문에 꽤 오랜 기간 동안 배편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대 양구나 인제에서 군 생활을 한 사람들의 전설 같은 전언에 의하면, 휴가 나올 때 시외버스를 타는 것보다 소양호 뱃길을 이용하는 게 빨라 여객선을 타고 춘천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뱃길은 한 때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경제가 고도성장을 함에 따라 자가용 이용자가 늘어나고 도로도 신설되면서 자연스럽게 배편도 줄었고 현재는 하루에 두 번만 운행하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2021.06.05 / 소양댐 선착장. 우리가 타야 할 배.

우리는 ‘육지 속의 섬’ 중에 하나인 조교리를 가기 위해 소양댐 선착장에서 09시에 떠나는 여객선을 탔다. 말이 여객선이지 선장을 포함 7명이 타면 만선일 정도로 선실은 좁고 기름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수령이 몇십 년은 될 것 같은 낡고 작은 통통배였다. 그리고 배 후미의 갑판도 좁아 선실에서 나갈 수도 없었다. 밀폐된 좁은 선실 안에서 보이는 풍경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사방이 탁 트인 공간과 드넓은 호수를 비말을 토해내면서 시원스럽게 달리는 보트를 연상해서는 안 된다. 머리카락과 스카프가 바람에 날리는 장면도 연상해서도 안 된다. 그저 비행기 창처럼 작은 선창을 통해서만 배를 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배를 타고 산행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육지에서 배를 타고 산에 가는 퍼포먼스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소양호와 규모가 비슷한 안동호나 충주호에도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유람선이나 혹은 원주민이 이용하는 여객선이 운행하기는 하지만 등산이나 트레킹을 하기 위해 배를 이용하는 곳은 여기가 유일할 것이다. 물론 지방자치단체에서 둘레길 종류의 길을 만들어 외부인을 유치하는 경우 배를 활용할 수는 있지만 순수하게 자유 여행의 수단으로 배를 타는 경우는 여기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육지에서 배를 타고 산행을 한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잠깐 소양호 여객선에 대해 얘기하고 가겠다. 사실 소양호 여객선 운항 시간을 보면 외부인을 상대로 운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양댐 발 시간이 오전 9시와 오후 4시 두 번인 것을 보면 춘천에 사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그보다 먼 지역 사람들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주말에는 우리 같은 외부인들 한 두 명이 타기도 하고 간혹 가리산에서 하산한 등산객이나 주변 산악도로를 라이딩 한 MTB 라이더들이 이용하기도 하지만 평일에는 그마저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평일이라고 해서 원주민이 매일 이용하는 것도 아니다. 전날 소양댐 선착장에 낼 몇 시에 나가요라고 연락을 하는 경우에만 배를 띄운다. 가령 가리산에 등산을 한 외부인도 전날 미리 전화를 해서 물노리 오후 배편을 통보해야 확실한 귀갓길을 장담할 수 있다. 시간만 되면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했다가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빈 배를 두 시간 가까이 운항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다. 설령 승객이 있더라도 1인 뱃삯 6000원으로 배를 운항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전혀 수지가 안 맞는 장사이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지만 뱃길은 없어지지 않는다. 승객이 없어도 시간만 되면 운행하는 농촌 버스처럼 소양호 여객선도 승객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불만 없이 선착장을 떠난다. 농어촌의 대중교통이 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운영하듯 소양호 여객선도 춘천시의 지원을 받아 최소한의 뱃길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2021.06.05 / 소양호를 가르는 배

늙은 파발마의 거친 숨소리처럼 노쇠한 배는 힘겨운 엔진 소리를 토해내며 소양호를 달리고 있다. 조교리는 춘천 북산면 관할 구역으로서 춘천에서 가장 먼 위치에 자라 잡고 있는 외진 마을이다. 소양강이 흐르던 시절에는 강변에 있던 조교1리가 춘천과 가까워 번성하였지만 수몰 후에는 10리 정도 산속으로 더 들어가 있는 조교2리가 마을의 대표성을 띠게 되었다. 그러니까 조교1리에 살던 대다수의 주민은 다른 곳으로 떠났고, 낚시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몇 명의 원주민만 남아있으며 일부는 조교2리로 이사를 갔다.


수몰 후 조교리는 흔히 말하는 ‘육지 속의 섬’이 되었다. 북산면사무소가 소양강 건너편에 있어서 겨울이면 결빙된 강을 걸어 읍내로 갈 수 있었고, 여름에도 줄 나룻배로 간단하게 건널 수 있었다. 강을 건너는 데 큰 불편이 없었지만, 수몰 후에는 수면이 50미터 이상 올라가 거대한 호수가 되어 100미터 남짓하던 강폭이 6킬로미터 이상 벌어졌다. 그리고 소양강 상류 인제 쪽과는 달리 하류 지역에는 대형댐의 특성상 결빙도 되지 않았다. 부동호가 된 것이었다. 당시에는 마을 뒤에 있던 가리산과 매봉 능선에 막혀 너머에 있는 홍천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배 없이는 어디에도 나갈 수 없을 정도로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그 후 가리산 줄기 해발 600미터 능선부에 고갯길이 만들어져 원동리를 거쳐 홍천과 인제를 통과하는 국도와 연결되었다. 표교 차 300미터 이상 되는 고개를 넘어 10킬로미터 이상 나가야 국도와 만날 수 있고, 거기서 홍천읍내에 가려면 그 거리의 두 배는 더 가야 했다. 그리고 관할 관청이 있는 춘천시내에 가려면 그만큼의 거리를 더 달려야 했다. 자가용이 귀했던 시절에는 그 길로 나가는 것보다 배를 타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가구 당 자동차 수가 추월한 현재에는 그나마 교통 형편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외진 농촌의 여건상 불편함을 극복할 수는 없다. 10년 전부터 춘천시에서 자금을 자원하여 11인승 승합차 마을버스가 두촌면 읍내를 종점으로 하루에 3번 왕복 운행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가령 인감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북산면사무소에 가려면 홍천과 춘천 시내를 통해서나 아니면 인제 양구를 통해서나 어느 방향으로 가든 거리가 70킬로미터 이상이며, 그 굴곡진 도로를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 달려야 당도할 수 있다. 아무리 첩첩산중 산골짜기에 살아도 이처럼 많은 시간과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이동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리고 지금도 어떠한 선거가 있을 때마다 주민들은 춘천시에서 내준 행정선을 타고 6킬로미터가 넘는 소양호를 건너 북산면사무소로 가서 투표를 하고 돌아온다. 투표율을 올리기 위한 방편으로 시에서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관할지를 가까운 두촌면으로 옮기면 간단한데, 관은 행정 편의주의와 복지부동으로 무장한 조직이기 때문에 그런 행정적 변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아무튼, 머플러도 없는 배는 따발총 소리를 쏘아대며 검푸른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하지만 물살을 가르며 시원스럽게 달리던 배는 무언가 이상 징후를 보이며 속도를 줄였다. 선체 뒤를 몇 번 돌아보던 선장은 잠시 후 배를 정지시키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뒷 갑판으로 나갔다. 우리는 무언가 불길함을 느끼며 선장의 행동을 주시했다. 선장은 능숙한 솜씨로 갑판 뚜껑을 열어 엔진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엔진 필터를 커내 들었다. 그리고는 "필터를 교환한 지 며칠밖에 안되었는데 이렇게 왜 시커멓게 변했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 키를 잡고 배를 몰던 선장이 선체 뒤에서 평상시 안보이던 연기를 보고는 배를 세웠던 것이다. 그는 시꺼멓게 그을린 원통 모양의 필터를 가지고 선실로 들어와 키 아래 선반을 열고 대체할 필터를 찾았다. 공구들이 어지럽게 모여져 있는 그 안에는 필터가 보이지 않았다. 선장은 혼잣말로 "아니 몇 개월에 한 번 교체하던 필터가 이렇게 며칠 만에 그슬려지는 게 이상"하다고 우리 보고 들으라는 듯 몇 번을 되뇌었다. 그러니까 배는 드넓은 소양호 한가운데 일엽편주처럼 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서늘함이 등골을 타고 흐르고 있을 때 선장은 "필터 없이 배가 가려나" 하고 태연스럽게 중얼거리고는 엔진 덮개를 닫고 들어와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배는 위태롭게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엔진필터가 없으면 당연히 엔진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많기 때문에 선장은 조심스럽게 가속페달을 밟았다.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잠시 복잡했던 생각도 잦아들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눈을 크게 뜨고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2021.06.05 / 조교리 뱃터

배는 본류에서 벗어나 지류에 접어들어 서서히 호수 끝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중간계로 들어가듯 우리는 세상의 자궁 속으로 깊이 잠입하고 있었다. 시퍼런 수면은 붉은 속살을 드러낸 산 밑 굴곡진 부분을 따라 계곡으로 길게 굽이쳐 이어지고 있었다. 수몰 전에는 메밀밭이 있던 구릉 지역이었다. 엔진필터가 없는 배는 다소 불안하지만 32 분음에서 16 분음으로 박자를 늦추면서 조심스럽게 물결을 가르고 있었다. 퉁퉁퉁거리는 엔진 소리의 한 음 한 음 하나가 분명하게 단절되며 크게 뛰는 심장소리처럼 가슴을 때렸다. 그 소리는 이 공간의 유일한 소리였다. 공간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 수면은 숨을 죽이고 뱃길을 터주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물로 향하듯. 잔잔한 파문이 산을 향해 첩첩이 쌓이다 물결이 되고, 그렇게 물은 모든 것을 받아주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또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온 것일까. 사내는 짙은 회한의 눈빛으로 일렁이는 그 물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그 물결 위에 떠 있는 나를 본다. 나는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보고 있다. 눈이 부셨지만 눈을 감지 않는다. 완전한 파란색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늘은 놀라울 만큼 많은 전자기파를 쏟아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가라앉지 않는다. 물은 피둥피둥 찐 비계덩어리를 힘겹게 밀어내고 있다. 숨을 멈추고 심장도 정지하면 그리고 뇌의 회로도 작동되지 않으면 몸의 비중은 낮아지기 마련이다. 그런 물리적인 힘이 아니더라도 물은 세속에 찌들어 무거울 데로 무거우진 몸뚱이를 잡아당기지 않았다. 그렇게 물 입자는 중력을 무시한 채 어떤 초자연적인 힘으로 그 비계덩어리를 거부하고 있었다. 사내는 눈을 감고 자신의 몸뚱이가 물에 분해되어,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이 되는 꿈을 꾼다. 시간은 그렇게 파고에 실려 넘실거리다 사라진다.

2021.06.05 / 조교리 배터

선착장 상태가 다소 불안했는지 배는 속도를 최대한 줄이면서 멈칫거렸다. 수면이 한 1미터 높던지 아니면 낮든지 하면 배를 선착하기가 수월할 텐데 상황이 어정쩡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배는 속도를 더 늦추며 산 아래 콘크리트로 포장된 선착장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키를 움직이는 선장의 동작을 주시했다. 선장은 아까부터 주문 외우듯이 무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배가 선착장에 닿자 선장은 우리 보고 내려서 선채 앞에 있는 밧줄을  바위돌로 대충 만들어 놓은 계선주에 고장시키라고 지시했다. 다소 긴장되어 있던 우리는 좁은 갑판을 딛고 땅에 내려와 캡틴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소양호에는 이곳과 같은 간이 선착장이 여러 개 있는데, 그 선착장의 공통점은 수면의 높낮이에 따라 선착장의 위치가 바뀐다는 사실이다. 가뭄이 들어 수위가 낮아지면 선착장은 육지에서 멀어지고, 홍수로 인해 수위가 올라가면 육지와 가까워진다. 바다와는 달리 육지 호수의 수면은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수년 전 종말이 올 것 같은 지독한 가뭄이 있을 때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어느 날, 춘천 상천리에서 시작해 마적산을 거쳐 오봉산 등반을 마치고 청평사 선착장으로 이동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선착장이 보이지 않았다. 선착장은 월래 있던 장소에서 한 500미터 이상 아래로 내려가 있었던 것이다. 저 멀리 있는 배를 향해 지친 몸을 이끌고 뛰다시피 걸었지만 배는 손을 흔들며 매정하게 선착장을 떠나고 있었다. 청평사에서 출발할 때 배 시간을 맞추어 내려왔는데, 그런 사정을 간과한 결과 아까운 시간만 축내고 말았던 적이 있었다.


여하튼 오늘은 육지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우리를 내려놓은 배는 후진을 하면서 뱃터를 떠나고 있었다. 이제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는 것처럼 배의 형체는 점점 멀어지고 우리는 물끄러미 그 광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엔진 상태로 보아 아직도 온 것보다 더 많은 거리를 무사히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노쇠한 배는 세상의 변화에는 무관심한 듯 담담하게 협곡 사이로 점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검푸른 수면은 가볍게 파문을 일으키면서 그 배의 모습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2021.06.05 / 뱃터에서 마을로 가는 길. 낚시꾼들이 타고온 자동차가 보인다.

우리는 배를 보내고 항상 그렇듯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길은 덩 비었고 하늘도 텅 비었다. 가옥 몇 채가 숲 속에 자신을 숨기고 불청객을 엿보고 있을 뿐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초여름 진한 풀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짙은 실록은 정말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역동하는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기운이 우리의 몸속으로 침투하여 어떤 각성 작용을 일으킨 듯, 뱃터 풍경에 취해 있던 몽롱한 정신이 맑아졌고 평상시 보다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깊은 계곡에나 자랄 법 한 다 큰 고사리 줄기가 길 가에 즐비했다. 풍성한 계곡 물소리가 줄기차게 그 공간을 터질 듯이 팽창시키고 있었다.


이곳은 일명 누리삼 마을이라고도 불린다. 수몰 전에는 메밀도 심고, 콩이나 팥 같은 콩과류를 많이 재배하였으나 수몰 후에는 공기가 습하고 차가워져서 그런 콩과류는 자라지 못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대체 작물로 삼 종류를 재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장뇌삼이 잘되어 마을의 특화된 작물로 대외에 알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우리가 보기에는 그런 분위기는 엿볼 수 없었고 마을은 너무나 한산했다. 그저 대처에서 온 강태공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민박집 몇 채와 텃밭 정도의 밭을 일구는 농가 몇 채가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2021.06.05 / 조교리 가는 길

누리삼 마을이라고 적힌 절집의 일주문 같은 현수막을 지나, 골 깊은 길을 따라 한 시간 남짓 계곡천을 끼고 계속 가다 보면 물로리로 넘어가는 삼거리가 나오고, 조금만 더 가면 조교리 마을이 나온다. 그리고 산등성이를 향해 더 가면 홍천 두촌면과 경계인 가파른 원동 고개와 만나다. 소양호 뱃길이 한창일 때는 이 계곡 길을 따라 많은 주민들이 다녔다고 한다. 겨울 언저리 때, 해지기 전에 막배가 닿지만 골이 깊어 어둠은 일찍 찾아들었다. 그렇게 어둠이 내리면 남동생이 군용 후레시를 들고 학교 갔다 오는 누나를 마중 나왔다. 그마저 식솔도 없다면 칠흑 같은 어둠과 싸워야 했다. 때론 달빛 쏟아지는 밤이면 마실 나갔다 한잔 걸치고 들어오는 순이 아버지의 흥얼거리는 유행가 소리가 구슬프게 들리기도 했다. 조교리 마을 사람들의 삶의 정서와 애환이 배어 있었던 이 길은 이제 사람 발길이 끊기다시피 하고, 먼 기억을 되살리기에도 벅찬 짙은 적막함이 공간대신하고 있었다.

2021.06.05 / 조교리 삼거리에서 무애골 가는 길

하지만 우리는 그 마을로 가지 않고 민박집 있는 삼거리에서 무애골로 접어들었다. 매봉에서 솟구친 차가운 여울목이 한여름 열기를 단박에 식혀주고 있었다. 조교리와는 달리 무애골은 폐쇄된 골이다. 800미터가 넘는 매봉 줄기가 요새처럼 뒤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세계3차대전이 일어나더라도 무애골은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골 안으로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이 길이 유일하다. 그 깊은 곳에 무애골과 영매골이 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유폐된 이곳에 사람이 산다. 골 따라 걸쳐져 있는 농가 몇 채가 텃밭 수준의 밭을 일구며 살고 있다. 골 입구는 호리병처럼 좁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면 그래도 이곳이 사람이 살지 못할 곳은 아니라는 것을 알 정도로 작은 구릉지가 나온다. 화전 하기에 딱 좋은 지형이다. 오래전 화전민이 살던 골이지만 지금은 사연 많은 외지인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오래전 그곳 사람들은 주변의 하찮은 골이지만 그곳에 이름을 붙여놓았다. 아랫마을골, 뒷골, 서낭골, 곤대물골, 신배나무골, 고개골, 건넌골, 도적골... 알 듯 모를 듯, 그렇지만 직설적이면서 해학적이기도 하고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투박하지만 정감이 듬뿍 담겨있는 이름이다. 처음엔 어떤 연유를 가지고 있었을 이름들이지만 지금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왜 골마다 이름을 붙였을까. 그만큼 골은 이곳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피붙이처럼, 골마다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자연 환경을 소중하게 여긴 것은 아닐까. 자신의 생존을 허락한 자연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차원은 아니었을까.


이제 우리는 무애골로 가는 중간에서 임도로 접어들어야 한다.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조교리 뱃터와 무애골과 작별을 고할 시간인 것이다. 세상 어디엔가 자신의 본모습을 숨긴 은둔의 땅이 있다. 이상향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서양에서는 샹그릴라나 유토피아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무릉도원이나 청학동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십승지라고도 한다. 지옥 같은 세상을 벗어나고 푼 세속적 인간이 상상한 이상향들이다. 비경을 감추고 있던 조교리 풍광은 아마도  샹그릴라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그릴라를 보았다라도 외친다. 욕계의 번뇌에 시달린 우리의 지친 영혼은 아마도 그 풍경을 마지막 안식처로 여긴 것은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이제 그 샹그릴라를 떠날 때가 된 것이다.

2021.06.05 / 수산리로 넘어 가는 임도

우리는 아쉬움을 접고, 숙명처럼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길을 따라 올라 능선을 넘어가면 매봉 임도가 나오고 그 분기점에서 하산하면 오늘의 종착지인 수산리 삼거리가 나온다. 산길은 항상 그렇듯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다. 실핏줄처럼 첩첩산중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느다란 길은 누구에게나 실존적 자유를 선사한다. 그 길로 들어서 걷다 보면 항상 접하던 풍경과 만날 것이다. 격동적이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처음 가는 길도 풍경이 별반 다르지 않다. 계곡을 지나고, 산등성이 산길을 따라 굽이쳐 돌고, 때론 고개도 넘고, 그렇게 대자연과 부대끼면서 걸을 것이다. 그리고 배낭을 벗어던지고 나무 그늘에 않아 물 한 모금 마시며 우리는 지나온 길에 대해 얘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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