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길을 걷다 03화

멀고 먼 길, 그 겨울의 전설

지장산 잘루맥이 고개에서 대소라치 고개로...

by 안호용

포천시청 앞에서 오전 9시 30분에 관인면으로 떠나는 60-1번 마을버스가 있다. 다른 지자체에서도 자신의 구역 안에서만 마을버스를 운영하는 데, 60-1번도 예외가 아니어서 포천 경계선을 절대 넘지 않았다. 산행 도반한테 어느 날 무슨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이런 얘기를 했더니 별 쓰잘 데 없는 데 신경 쓰느냐는 핀잔을 받은 적이 있었다. 여하튼, 관인면이 동송(구철원) 가는 광역버스가 항상 정차하는 곳이어서 행정 구역이 철원인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 글을 쓰면서 검색해 보니 포천시 소속이었다. 철원과 포천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인면은 철원이라는 나의 고정관념이 일순간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지식에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었을까. 만약 관인면이 철원이냐 포천이냐를 놓고 누군가와 사실 관계에 대해 언쟁이 벌어졌다면 나는 분명 철원이라고 우겼을 텐데, 그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앞을 가릴 수 없었다. 티끌만 한 지식 앞에서도 겸손해야 한다는 것, 앎의 무게에 고개가 절로 숙여질 따름이다.


소도시 마을버스는 도심지에서 방사형으로 퍼져 있는 산골 농촌 마을로 운행을 한다. 그런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상상외로 편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운행시간 간격이 커서 하루에 대여섯 번이나 혹은 한두 대 들어가는 곳도 있지만, 그래도 시간만 잘 맞추면 대처로 왕래하는 데 큰 지장은 받지 않는다. 요즘은 예전과 달리 운행 시간이 정확하며 무엇보다 정보 취득이 용이하고, GPS로 정확한 시간을 예측할 수 있어 흥미로움이 증폭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버스는 공적 자금이 투입된 사업의 일환이기 때문에 약속된 시간만 되면 승객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운행된다는 점이다. 사실 기름값도 안 나오는 버스 운행을 민간에서 운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농촌버스를 잘 이용하면 자가용이나 관광버스를 이용하는 것과는 색다른 여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런 버스들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버스는 광릉내에서 일동을 거쳐 이동까지 가는 포천 7-1번 마을버스이다. 10명 남짓한 승객을 태울 수 있는 그 미니버스는 우선 광릉내 종점부터 많은 승객을 태운다는 것이다. 한 번은 어떡하다 보니까 서서 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좁고 낮은 공간에서 1시간 동안 웅크리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역인 것은 버스의 요동이다. 종점에서 출발한 버스는 큰길로 가지 않고 외딴 마을이 있는 좁은 도로를 돌고 돌아가는데, 도로의 포장 상태가 엉망인 것은 물론 수많은 방지턱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방지턱도 완만한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대충 거칠게 만들어 놓은 것들이었다. 버스는 당연히 분해될 것처럼 요동을 쳤다. 엉덩이가 의자에 붙여 있을 틈도 없이 요동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뉴튼의 운동법칙이 확실하게 적용되고 있는 공간이었다. 야생마를 길들이는 로데오라고 함께 가는 도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론 1시간 동안 계속 그런 진동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고 출발하고 처음 부평리 마명리 마을을 통과할 때 20여 분과 그리고 다른 마을 중심부를 지나갈 때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튼 험지를 달리는 오프로드처럼, 요철 도로와 뱀처럼 굴곡진 구도로 버스정류장을 다 거치면서 가다 보면 처음의 버스여행에 대한 낭만적 감성은 사라지고 피곤이 몰려오게 된다. 나도 그런데 이런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공간의 협소함은 피로를 가중시킨다. 결코 쾌적한 여행이 될 수 없다. 티베트의 산악지역에 있는 어느 비포장도로를 뒤뚱거리며 달리는 폐차 수준의 버스를 연상하면 무례한 표현일까.


포천에서 탄 7~8명의 승객은 영중 읍내를 지나면서 다 내리고 이제 홀로 남았다. 미니버스와 대형버스의 중간 크기 정도 되는 공간엔 이제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버스에 홀로 있는 풍경은 이제 익숙했다. 버스는 포천에서 출발해 한 시간 정도를 달린 끝에 지장산 입구에 나를 내려놓고 얼마 남지 않은 관인 읍내를 향해 줄행낭을 쳤다.

6년 전인가, 지장산에 가기 위해 포천에서 이 버스를 타려고 했으나 서울에서 포천까지 가는 과정이 녹녹하지 않아 버스를 놓치는 불상사가 벌어졌었다. 산행 도반과 고민 끝에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광역버스로 관음까지 가서 다시 택시를 타고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돈은 돈 대로 들어가고 시간은 시간대로 들어간 엉망이 되어버린 일정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역꾸역 이곳에 당도했고 따라서 등반 일정은 단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대중 버스 GPS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시절이었고 또한 버스 운행 시간도 연착이 밥 먹듯이 일어났기 때문에 지장산에서 포천으로 나오는 데도 순조롭지 않았었다. 정말 길고 지난한 하루였다.

2021년 2월 27일 / 지장산 계곡 초입

2월 말의 지장산 계곡은 을씨년스럽게 텅 비어 있었다. 봄을 알리는 새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지만 아직도 새싹이 돋아나려면 요원한 것 같았다. 여름이면 수많은 피서객으로 북적거리겠지만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처럼 계곡은 차갑게 메말라 있었다. 나는 계곡 상류를 향해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지장산과 관인봉 갈림길인 잘루맥이 고개까지 가려면 1시간 30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잘루맥이 고갯길은 지장산과 향로봉을 잇는 능선과 오밀조밀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관인봉 능선을 장작 패듯이 가로지르는데, 그 초반부의 풍광은 주왕산 계곡과 버금갈 정도로 매우 뛰어나다. 예전에는 왜 그렇게 방치했는지 모르지만, 계곡 중반부까지 자동차가 다닐 수 있어서 여름이면 야영하는 피서객들이 유독 많았다. 그리고 상부로 올라가면 오프로드 차량들이 다닌 흔적이 역력했었다. 지금도 유튜브를 검색해 보면 4륜 구동 차량을 몰고 이 언덕길을 파헤치며 올라가는 동영상을 볼 수 있다. 물론 10여 년 전의 동영상이지만, 당시엔 강씨봉의 논남 계곡처럼 오프로더들의 성지와도 같은 계곡길이었다. 이 평화로운 계곡에서 마치 락 크롤링하듯 4륜 구동 차량이 엔진 소리를 토해내며 오르는 광경을 떠올리면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억제하지 못한다. 적나라하게 파헤쳐진 바위에 훈장처럼 선명하게 박혀있는 시커먼 바퀴 자국은 그날의 광란의 축제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오프로드 스키드 마크가 아직도 남아있는지 염려하며 계곡을 올라갔지만 안타깝게도 볼 수 없었다. 오프로드 차량이 다니던 굴곡진 고갯길은 그대로 방치하고, 옆으로 1톤 트럭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널찍한 도로를 고갯마루까지 새로 내는 중이었던 것이다. 포클레인과 소형 트럭과 관계자 차량들이 계속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고갯길 전체는 현재 공사 중이었다. 더구나 그 공사는 마루금을 넘어 몇 백 미터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잠깐 쉬어갈 장소를 계속 물색하다가 결국은 생각을 접고 말았다.

2021년 2월 27일 / 지장산 계곡길은 공사 중이다

그래도 1시간 30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왔기 때문에 웬만하면 마루금에서 잠시 쉬려고 했으나 공사와 관계된 흔적들로 어수선하여 쉬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그리고 고개 넘어 동마 내미 고개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점심을 먹을 요량으로 사진 몇 장 찍고 바로 너미길로 들어섰다. 멀리 금학산과 고대산으로 이어지는 보개산 봉우리가 보이고, 그리고 그 두 봉우리 사이로 몇 시간 후 내가 가야 할 대소라치 고개가 어떤 성스러운 아우라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실루엣은 수풀 가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겨우내 묻혀 있던 습한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2021년 2월 27일 / 잘루맥이 고개마루 / 왼쪽이 지장산, 오른쪽이 관인봉 / 공사 차량 흔적이 역력하다. 마른 잡풀이 덮혀 있던 빈터는 지금은 타이어 자국에 짓눌려 있다.

너미길은 오름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북향이어서 항상 그늘지고, 폭도 좁고 오랫동안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길이었는데, 아니다 다를까 도중에 길이 파헤쳐져 있었다. 잠시 후 포클레인 기사인 듯한 사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마 점심 먹으러 가는 것 같았다. 짐짓 놀라는 그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지나친 나는 폭격 맞은 것처럼 뒤죽박죽 된 길을 내려가다 조금 전 지나친 운전기사가 몰던 포클레인 옆을 간신히 지나 계속 아래로 발길을 옮겼다. 이런 협소하고 거친 공간에서 포클레인이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기계의 능력은 참 대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전이었다. 새벽녘 지리산 뱀삿골을 오를 때, 도중에 등산로 보수 공사를 하는 인부들과 조우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계곡 옆에 군용 에이형 텐트를 치고 숙식을 하면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보수용 돌들을 주위에서 운반해 와 무너진 길을 보수하고, 텐트에서 직접 밥도 해 먹고 잠도 자는 일상이 며칠, 몇 주 동안 이어졌다. 출퇴근하면서 작업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런 야영생활이 편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런 깊은 계곡에서 작업하는 것은 고된 노동임에는 틀림없었다. 나는 아침 식사를 하는 그들을 지나치면서 인사만 했을 뿐이지만 그들의 지난한 노동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들의 진한 땀 냄새가 한동안 콧 끝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공사 구간을 지나갈 무렵 계곡 숲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고라니나 멧돼지 정도 되는 크기의 물체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산에서 동물과 맞닥트리면 먼저 도망가는 게 동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심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숲 속에서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사람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 듯 보아서는 등산객은 아니고 장화를 신은 것으로 보아 약초꾼이 분명했다. 그는 나보다 더 놀라는 것 같았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 그 사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는 머루 뿌리라고 대답했다. 초봄에 물이 올라와 최고의 품질을 보장한다는 머루 뿌리를 캐다가 나한테 딱 걸린 것이다. 이곳에서 사람을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듯 그는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사실 요즘은 산에서 약초 캐는 것은 불법이었다. 서로 정체를 확인한 우리는 멋쩍은 말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헤어졌다. 저기 아래 큰길엔 동송 가는 버스가 없는데...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목덜미를 잡았다. 동송까지 간다는 나의 말에 버스를 타고 가는 줄 알고 약초꾼이 몹시 걱정하며 혀를 찬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2021년 2월 27일 / 잘루맥이 고개에서 본 대소라치 고개. 오래 전 산행 도반과 지장산 정상 안부에서 본 대소라치, 아득히 먼 풍경 속에 나는 흡입되어 갔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고갯길은 돌부리들이 불규칙하게 울퉁불퉁 솟아나 있고, 너덜화 된 그 길 위로 수많은 잡목 가지들이 빼곡하게 덥혀 있었다. 자동차 한 대는 거뜬히 다닐 수 있었던 길은 이미 오솔길처럼 좁아져 있었다. 오지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곳을 빠져나오자 꽤 넓은 삼거리가 나왔다. 연천 내산리로 넘어가는 동마내미 고갯길과 만나는 분기점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두 시간 이상 불평 없이 달려온 두 다리를 쉬게 했다.

내가 내려온 잘루맥이 고개 북쪽 길은 오래전부터 폐허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짧지만 자연의 까칠함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험한 산길이다. 물론 2월이어서 그렇게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5월이라고 해도 통상적으로 연상되는 안온함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아무튼 이 길을 아는 산꾼들이나 약초꾼들이 발자국을 남겨서 그나마 최소한의 길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그마저도 없었다면 폐길이 되었을 것이다. 폐길이 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많던 군시설물도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한동안 군사도로로 사용을 했지만, 요즘은 주변에 도로들이 많이 만들어져 이용 가치가 없어진 것 같았다. 사실 이 삼거리에서 내산리로 넘어가는 동마내미 고개도 군사도로의 일종이고, 이 지역의 산에 있는 도로는 거의가 군사도로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금 높아 보이는 산봉우리마다 크고 작은 군부대들이 터주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고, 조금만 관심을 두고 시선을 움직이면 군시설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20세기 전만 해도 이곳은 흔히 전방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평안하게 아웃도어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 나름 살풍경스러운 분위기를 거부하지 않는 산꾼들이야 가지 말라고 해도 원하면 기어코 찾아가지만, 편안함을 선호하는 등산객들은 거의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세상이 변하여 군부대의 동선과 민간인들의 아웃도어가 겹쳐져 있는 풍경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평일에는 군부대의 훈련 장소로서 역할을 다하고, 주말에는 민간인들이 아웃도어를 즐기는 장소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조금 후에 갈 담터 계곡도 군부대의 훈련 시설과 각종 펜션이나 자동차 캠핑장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튼 산상만찬을 즐기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멀리서 사파리 모자를 쓴 어떤 사내가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행은 없었고 차림새로 보아 지장산에 갈 등산객인 것 같았다. 대게 지장산 코스는 조금 전에 내가 올라온 지장 계곡을 통하는 게 통례인데 반대 방향을 들머리로 잡은 건 이 산을 좀 안다는 방증이었다. 하기사 이 코스가 등산하기에는 제격일 게다. 그것도 홀로 한다면 등산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있을 때 사파리는 어느새 십여 미터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산꾼의 아우라는 보이지 않는 그저 평범한 배불뚝이 등산객 폼새였다. 그는 나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월래는 담터 계곡 입구에 차를 주차해 놓고 금학산을 가려고 했으나 들머리를 찾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지장산에 올라가는 중이라고 여러 개의 문장으로 나누어 떠들어댔다. 생각지도 않게 오지에서 사람을 만난 게 반가운지 그는 좀 기분이 들떠 있었다. 나는 아마도 금학산 능선은 지도에는 길이 있지만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아서 길이 거의 살아졌을 것이고 굳이 가려면 금학산 정상에서 반대로 하산하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고 나는 동송까지 가노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 먼데까지 어떻게 가느냐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우리는 지장산과 대소라치 고개에 대한 정보 몇 개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속사포처럼 쏘아댄 사내의 말이 잠시 그가 서있던 곳에 남아 윙윙거리고 있었다.

2021년 2월 27일 / 담터계곡으로 가는 길. 이 그림은 전형적인 GOP 풍경이다. 소대 보급병과 함께 중대본부로 가던 길, 그 길 풍경이 이랬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많이 남아 있었다. 짐을 챙긴 나는 대소라치 고개를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잘루맥이 마루금에서 본 대소라치 고개는 V자로 정확하게 보였지만 지금은 금학산 줄기에 가려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금학산 봉우리가 가깝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대소라치도 얼마 남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오래된 추억 속의 여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해후의 감정이 잔잔하게 가슴에서 우러나오고 있었다.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던 대소라치와의 해후를 이런 트레킹이란 방법으로 해결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대소라치는 어떻게 변하였는지, 그 옛 모습이 어렴풋이 눈앞에서 가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그 편린들을 짜 맞추고 있었다.

지장산 기슭을 빠져나온 나는 본격적으로 담터계곡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형 트럭 한 대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은 넓고, 계곡의 전반적인 폭도 펜션과 캠핑장들이 들어설 정도로 넉넉했다. 그 길은 금학산 줄기와 지장산 줄기를 좌우로 두고 길게 이어져 금학산과 보개산 줄기가 만나는 대소라치 고개 마루에서 끝난다. 이 길은 전형적인 군사도로이다. 지금도 그렇고 오래전에도 그랬다. 근래 들어 민간 시설을 허용하고 있어서 주말이면 캠핑 차량들이 많이 찾지만 예전에는 휴전선과 불과 10여 킬로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는 전방인 관계로 캠핑이라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사실 4킬로미터가 넘는 이 비포장 길을 그대로 두는 이유는 군사도로이기 때문이다. 지방정부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곳은 포 사격장 등 군부대의 중요한 훈련시설이 집결되어 있는 훈련장이며 그와 관련된 군용 기계화 차량들이 수시로 드나들기 때문에 포장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군사적으로 요충지이면서도 민간인에게 개방하여 오토캠핑장을 허가한 것은 현재의 문화적 트렌드에 부합하는 열린 행정의 일환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군의 훈령장으로 인한 주변 민간인과의 갈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군이 존재하고,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고는 이런 문제는 쉽게 풀 수 없을 것이다. 좁은 한반도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훈련 없는 군대는 무용지물이니까 말이다.

아무튼 요즘은 그나마 군부대와 지방정부에서 규제를 많이 풀어 10개가 넘는 오토 캠핑장이 만들어져 여름이 되면 피서객들이 많이 몰려온다. 주말이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웃도어와 군시설 등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공간이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한국적 캠핑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2021년 2월 27일 / 대소라치 고개로 가는 담터 계곡 길. 겨울의 담터 계곡은 그저 군사지역 일뿐이다. 장갑차와 탱크가 다니는...

어찌 되었든, 군용 차량과 캠핑 차량들이 다니는 비포장 길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걸을 때마다 흙먼지가 등산화를 덮은 후 송진가루처럼 솟구쳐 흩날렸다. 마른 흙냄새가 훅하고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겨울 끄트머리여서 다행이지 한여름이었다면 숨이 막혀 걷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가로수나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들도 변변치 않아서 고역을 가중시켰다. 적당히 쉴만한 곳이 없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첫 장면을 보면 도시에서 산전수전 다 격은 주인공 톰 조드가 기차역에서 고향집으로 향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흙먼지 날리는 황량한 길을 걷는 톰 조드의 실루엣이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미국 서부영화를 많이 본 부작용(?)은 아닐까. 나는 픽 웃고는 모래폭풍 전야의 황야를 걷는 톰 조드처럼 한낮의 태양을 머리에 이고 계속 걸었다.

그나마 차량이 다니지 않는다면 걸을만하겠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 역시나 캠핑 차량 몇 대가 흙먼지와 매연을 토해내며 순례자의 옆을 지나 내달린다. 물론 자동차는 속도를 줄여 배려심을 발휘하지만 순례자의 마뜩잖은 마음은 풀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여름철이 아니어서 다행으로 여겨야만 했다. 평일에는 온갖 군용 차량들이 드나들고, 주말에는 캠핑 차량들이 다니다 보면 비포장도로는 밀가루처럼 빻아지지 않을 수 없고 가로수도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황량한 흙길을 계속 걷고 있었다.

계곡이 끝나는 지점에서, 본격적으로 오르막이 시작될 때 문득 오래전 기억이 소환되고 있었다. FABA부대에 근무할 때였다. 주로 작전이나 훈련하던 지역이 임진강 변이었는데, 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항상 비포장 고갯길을 넘어야만 했다. 실전과 훈련과 그리고 진지 보수작업 장소가 그곳이었기 때문에 수없이 넘나들던 애증이 교차하는 눈물 고개였다. 일반 도로로 가려면 몇 배나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친 숨을 감내하며 그 고개를 수시로 넘어 다녔다. 여름철이나 가뭄이 드는 날에는 말라비틀어진 황토색 진흙 가루를 뒤집어쓰면서 행군을 했다. 한여름 그 고개를 넘어서 진지 보수작업을 한 후 복귀하는 늦은 오후가 되면 하루 종일 젖었다 말랐다 반복한 군복은 새하얗게 백태로 변했다. 염화나트륨으로 범벅이 된 군복을 걸친 우리는 보오람찬 하루 일과를 외치며 보무도 당당하게 부대로 복귀했다.

변변히 쉬지도 못하고, 한 시간 반 동안 고난의 행군을 한 끝에 나는 드디어 대소라치 고개에 당도했다. 헤어졌던 여인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가슴이 뭉클거렸다. 앞으로 남은 삶의 여정에서 불가능할 것 같았던 대소라치 고개를 이렇게 두 발로 오른 것이다. 지리산 천왕봉에 다시 오른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 금학산에서 고대산으로 가는 능선 상에 위치한 그 고개를 수차례 밟아보았지만 이렇게 순수한 고갯길을 통해 만나기는 처음이었고, 무엇보다도 봉우리 등정을 거의 포기한 입장에서 다른 루트를 통해 찾은 것에 대해 남다른 감정이 우러나왔는지 모른다. 산꾼들이 보기엔 그게 머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흥분을 하느냐며 핀잔을 주겠지만, 그리하여 나 자신도 부끄러움이 발원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인식의 영역에서 보면 히말라야 트레킹에 버금가는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2021년 2월 27일 / 대소라치 고개마루. 저 낙석 옆에 등반 이정표가 서있는데, 처음 그 그림을 보고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몇 번 접한 후에는 묘한 앙상블로 보였다.

대소라치 고개 마루는 전형적인 군사지역이다. 마루금 치고는 중대 병력이 모여 있을 정도로 면적이 상당히 넓고, 군용 차량들이 다닌 흔적들이 곳곳에 굵직하게 박혀 있으며, 낙석과 벙커와 무개호와 본부 진지 등 군 시설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리고 금학산과 고대산으로 갈 수 있는 등반 루트의 중간점이고, 민간인 통제구역도 있고. 나머지 하나는 동송 읍내로 가는 들머리였으며, 그렇게 6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금학산 정상에 있는 부대에게 물품을 공급하는 모노레일이 등산로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당연히 그 부대에 근무하는 장병들도 헉헉거리며 그 험한 등산로를 따라 오르내렸는데, 하지만 지금은 군용 차량이 왕래할 수 있는 산악도로가 신설되어 있었다. 언젠가 등산 도반에게 얘기했듯이 군바리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대소라치 고개는 금학산과 고대산을 연계하는 중요한 길목이다. 등산 이정표와 각종 산악회 꼬리표 등이 화려한 만장처럼 걸려 있는, 산악인들의 애환이 짙게 배어 있는 마루금이다. 이렇게 군시설과 등반 시설이 자연스럽게 혼재하는 이곳은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내가 알기론 대한민국에서 여기가 유일무이 하다. 대소리치도 그렇지만 금학산 정상과 고대산 정상에 데크가 설치되어 있어서 백패커들에게 성지와도 같은 곳이면서, 동시에 터주대감인 군 통신부대도 자리 잡고 있어 두 개의 문화가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이 지역은 휴전선 철책과 불과 10여 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처음 대소라치에 왔을 때의 놀라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금학산의 험악한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와 대소라치에 당도했을 때 마주친 것은 벙커와 야전 대대 본부 터와 그리고 낙석 등의 군 시설물이었다. 한겨울 새벽녘, 혹한기 훈련 나온 부대가 철야 행군 끝에 야전 참호를 만드느라 부산하게 움직이는 광경이 흐릿하게 뇌리를 스치면서 먼 기억의 문을 열고 있었다. 다시는 접하고 싶지 않았던 광경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나의 무의식을 흔들어 깨웠다. 훈련소의 짠밥 냄새를 처음 맞고 속이 울렁거렸던 기억부터 시작해 DMZ GP에서 마감하는 군생활의 길고 긴 기억들이 하나의 거대한 추상적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나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기억의 저편에서 잊고 있던 그 수많은 기억들, 한여름 무장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한 달 동안 야전에서 지독한 장마와 함께 했던 시간들, 소설을 쓰라고 하면 대하소설 분량은 충분히 나오고도 남을 기억들, 세상의 속됨에 물들지 않은 갓 스무 살 넘은 여린 영혼들이 아우성치던 그 기억들, 아물지 않은 아픔들을 가슴에 묻고 버텨온 그 엄혹한 시간들, 도태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동물적 본능에 자신을 맡겨야 했던 시간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수많은 시간들은 용광로에 녹아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 되었고, 그 괴물이 나의 숨통을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부림쳤다. 결국은 가리사니를 상실한 나는 고대산으로 오르는 들머리를 찾지 못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엉뚱한 곳에서 한참 동안 헤매다 겨우 대소라치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다짐했었다. 다시는 이런 군바리 냄새 진동하는 곳에 오지 않겠다고.

2017년 6월 10일 / 마지막으로 찾은 대소라치. 그 해에 설치한 등산 안내판은 군사지역 이미지를 희석시켜주었다.

그리고 나는 몇 개월 후 다시 그곳을 찾았다. 내가 왜 그곳에 다시 갔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내 안의 누군가가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는지 모른다. 대소라치 고개의 살풍경을 뛰어넘을 정도로 금학산과 고대산의 풍광이 더 압도적으로 매력적이었다고 나는 합리화시켰다. 사실 두 산의 풍광과 연계 루트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급경사와 오지에서 느낄 수 있는 청량한 숲과 능선 그리고 두 봉우리에서 보이는 장쾌한 풍광은 정말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엑스타시였다. 특히 사방이 탁 트인 시야는 가깝게는 철원 평야와 멀게는 북녘땅을 줌 업했다. 가을이면 황금 호수를 이루는 철원평야와 청명한 하늘의 조화는 경탄을 일으키게 하고도 남았다. 이런 두 산의 연계 코스는 등산 시장에서 최상품의 레벨에 속한다고 장담할 수 있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나는 보증할 수 있었다. 이렇게 등반에서 보상되는 기억들이 나를 유혹했으리라.

그렇게 다시 찾은 대소라치는 처음과는 달리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마중했다. 로캉탱이 나무뿌리를 보고 구토를 한 것처럼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조리한 세상에 내동댕이쳐 존재가 부정당했던 그 먼 시간의 역겨움, 그 실존적 두려움에 동요하던 내면은, 어떤 경계선을 넘은 듯 왠지 모르게 안정되어 있었다. 에고에 고립되어 있던 기억이 이제 일반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독 부각되었던 군 시설물은 등산과 관련된 시설들과 어우러져 이제는 독특한 지역성쯤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산마다 특유의 모습이 있듯이 그곳도 그렇게 내면에서 보편적인 풍경으로 이미지화되었는지 모른다.

2021년 2월 27일 / 멀리 잘루맥이 고개가 모인다. 6년 전 지장산에 함께 오른 도반에게 나는 담터계곡길로 해서 저 대소라치에 가고 싶다고 했었다. 그날이 오늘이다

대소라치를 떠나기 전에 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몇 시간 전에 이곳을 보았던 잘루맥이 고개 실루엣이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의 누군가가 이곳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고갯길에서 마주친 포클레인 기사인지 아니면 약초꾼이나 떠벌이 등산객인지... 시공간의 접힘 현상처럼 어떤 능력에 의해 그 공간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내가 밟은 수많은 발자국들이 마치 유한 수열의 시그마처럼 합해지고 응축되어 어떤 하나의 형태로 형상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형상은 풍선 터지듯이 퍽하고 터지면서 이내 사라졌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다시 이 공간에 놓인 나를 상상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걷는다는 것, 그리하여 그 먼 거리가 하나의 형상으로 남았다 사라진다는 것, 그것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아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인지 모른다.

이제 1시간 남짓 하산하면 금학산 오르는 들머리가 나올 것이고, 하늘공원 데크에서 동송 읍내를 내려다보며 마지막 남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실 것이다. 그리고 오늘 여기까지 무사히 당도한 것에 대해 감사해할 것이다. 언젠가 기억이 소멸되기 전, 지금의 시간을 소환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시간은 흘러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공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난 시간이 현재의 시간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젠가, 아득히 먼 그 시간은 전설이 되어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전설이 된 공간을 떠나 길을 걷기 시작했다.

keyword
이전 02화산행을 떠나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