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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은 Nov 03. 2021

시골이 뭐가 좋아서 민주주의와 계엄령 사이

진돗개 하나 발령 - 육아의 늪 

 도랑물이 범람할까 마음을 졸였을 만큼 많은 비가 내렸던 초여름을 지나 드디어 본격 여름이 왔다. 시골에서 맞이하는 여름방학엔 해질녘 마당에서 먹는 과일이 빠질 수 없다는 나름의 관념 때문에 맨 먼저 나는 복숭아를 한 박스 샀다. 냉장고가 작아서 도저히 보관이 안되었지만 생산자가 아침에 재배해 바로 공급해주는 지역 로컬푸드 과일은 너무 매력적이었다. 복숭아를 시작으로 먼저 귀촌한 친구 소개로 구입한 참외도 정말 맛있게 먹었다. 며칠의 유통 과정을 거쳐 공급되는 도시의 과일과는 다르게 하품(下品)이라 할지라도 당도가 아주 좋았다. 몇 번의 복숭아와 참외가 박스채 우리 집으로 옮겨질 때 나는 먹을 일에 설레는 동시에 '언제 다 먹지?'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과일을 보관하기엔 냉장고 용량이 적어서 어쩔 수 없이 실온에 꺼내 뒀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과일이 무르고 날파리가 꼬였기 때문이다. 많이 먹겠다는 욕심의 끝에 기다리는 날파리 걱정은 둘 다 가지는 것은 욕심이라는 교훈과 동시에 늘 내 안에 존재하는 양가감정을 들여다볼 기회가 되었다.


 여름방학 중에도 돌봄 교실이 열려서 아이들은 오전에 학교에 갔다가 점심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난 그때 점심밥과 간식, 저녁밥까지 해 먹이고도 좋은 소리는커녕 "맛없다.", "먹기 싫다."는 말을 매일 들어야 했다. 집에서 살림하는 게 일인 사람에게 매일 날아오는 반찬투정은 내가 얼마나 무능한 주부인지 알게 해 주어 마음이 아팠지만 진짜 장을 보러 가도 마땅히 살게 없었다. 여름 밥상을 차리며 나는 '먹든지 말든지' 자포자기의 상태로 일관했다가 남은 음식물을 고스란히 버리게 되는 설거지 시간이 오면 진심 짜증이 나서 울고만 싶었다. 

 그 무렵 우리의 주요 규칙이었던 '돌담에 올라가지 말기, 나무에 매달리지 말기'는 완벽하게 지켜졌다. 아마 누구 하나 돌담에 올라갔다가는 용광로를 쏟아붓는 듯한 화염에 타 죽고 말았을 것이다. 바깥 날씨가 너무 뜨거워지니 아이들은 에어컨을 켠 집 안에서만 놀려고 했다. 그러나 집 안은 좁고 별다른 장난감도 없고 아이들 각자의 주장도 세져서 아이들은 별일 아닌걸로도 투닥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볼 뿐 개입할 자신이 없어서 아이들에게 어떤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을까 고심하게 되었다. 마침 친구들이 내가 사는 곳에 놀러 가도 되겠냐고 연락이 와서 몇 차례 손님 초대를 했다. 여름 손님은 환영을 못 받는다는데 나는 1년 중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가 여름이라 그런지 집에 사람 오는 게 너무 좋았다. 부산에서 친구들이 몇 번 다녀가기도 했고 친정식구들이 하루 자고 가기도 했다. 오랜만의 만남도 반갑고 남편과 떨어져 잘 지내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뿌듯했다. 사는 곳 근처에 유명 계곡이 있어서 간식과 튜브를 챙겨 일행이 다 같이 놀러를 갔는데 계곡물에 아이들이 노는 걸 내려다보며 이런저런 수다로 광대가 아플 때까지 웃고 나니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물론 기분과 다르게 육체는 힘들었다. 내 기준 대식구의 세끼 밥을 이틀간 챙겼더니 손님들이 돌아간 사흘째 날에는 마냥 하루 종일 누워만 있고 싶었다. 그러나 육아는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기에 아이들의 점심, 간식, 저녁밥을 하고 또다시 투닥거리는 걸 바라봐야 했다. 

 나는 1년 중에 여름이 제일 좋다. 모든 것을 불태울 만큼 뜨거운 햇살, 밤이 되어도 식지 않는 열기를 사랑한다. 그 기운에 버텼다. 햇볕 때문에 일시적으로 쓸모 없어진 마당, 소파도 의자도 없는 7평 집,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아이들 5~6명의 소란. 그때가 여름이 아니었으면 못 버텼을 것이다. 내 마음 안에 51:49로 존재하던 행복과 불만족의 양가감정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름의 화염 속에 49의 불만족은 던져 버리고 100만큼 행복한 척했지만 나는 진짜 지쳐있었다. 황령산을 활활 태워버릴 만큼 크게 봉화불을 피워 내가 지쳐간다고 신호를 보냈지만 아무도 응답이 없었다. 


 방과 후 같이 노는 시간을 줄이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음에도 내 컨디션은 회복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름방학을 기점으로 우리 집 둘째가 급속도로 성장해버렸기 때문이다. 첫째인 딸과 다르게 둘째인 아들은 성장이 더디어서 유치원에 다니는 5세가 되도록 우리 집에서 애완견 대접을 받아왔다. 시골행을 결정할 때도 아빠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첫째를 염려했지 둘째는 안중에 없었고 어디 식당에 가더라도 "몇 분이세요?" 물어보면 "3명에 아기 하나요"라고 자연스럽게 대답하곤 했다. 두 명 밖에 없는 남매지만 어쨌든 집에선 막내이고 덩치도 작고 말도 느리고 소근육 발달도 느렸던 둘째가 그야말로 '미친 존재감'을 내뿜기 시작했다. 

 우선 말이 많아지고 표현도 다양해지고 부정확한 감정을 토하며 울어댔다. 뒹굴고 던지고 소리치며 막무가내로 나오는 일이 거의 매일 반복되자 나는 너무 황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처음엔 안아서 달래보고 감정도 읽어주고 위험한 일은 제지하기도 했는데 같은 일이 반복될수록 아이가 보내는 특별한 신호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다 한번 심사가 뒤틀린 게 아니라 정서적 성장의 시기에 가족이 든든한 뒷받침을 못해주고 있어서 그렇다는 직감이었다. 아이는 자신이 더 이상 애완견이 아니고 예민하고 섬세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나에게 알려줌이 틀림없었다. 

 아들만 둘 키우는 윗채 친구에게 우리 집 비상상황을 알리고 답답함을 토로하였더니 친구는 보살 같은 미소를 띄며 내가 말했다. 

"아들들은 원래 좀 그래"

 정말?? 첫째를 키우며 육아 만렙을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들 육아는 이토록 새롭단말인가.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자 나는 그동안의 공동육아가 더 이상은 내 가정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나는 윗채 친구와 먼저 귀촌한 친구에게 앞으로는 방과 후에 같이 놀 수 없다고 알렸다. 딸아이에게도 친구들과 학교에서 만나는 시간이 7시간 가깝게 되니 그 시간만을 소중히 여기고 방과 후 집에 오면 가족만의 시간을 가지자고 했다. 

"그럼 만화 보여 줄 거야?"

 나는 하루 1시간 만화 보는 시간을 보장해 주기로 했다. 딸아이는 뛸 듯이 기뻐하며 알겠다고 했고 그 후 앤과 다이에나 같았던 딸아이와 먼저 귀촌한 친구 아이는 우리 집에서 놀지 않게 되었다. 


 오롯이 세명이 있는 시간이 잠자는 시간 정도였을 때는 씻고 잠들기 바빴는데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이번엔 딸아이와 아들아이가 싸우기 시작했다. 주로 만화 선택을 두고 싸우거나 간식을 담은 그릇 색깔을 두고도 싸웠다. 덩치는 딸아이가 확실히 커서 제 동생을 툭 치기만 해도 아들아이는 장풍 맞은 사람처럼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는데 울고불고하면서도 누나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빽빽 거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이 모든 상황을 남편 없이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니.... 나는 방과 후 집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들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의사를 물어가며 매우 민주적으로 정한듯한 규칙이지만 이것은 사실상 계엄령. 나는 두 아이의 행복과 우애를 위해 온몸을 불사를 각오를 다졌다. 보통의 인간으로 자식을 키워내는 것이 내 삶의 의무이다. 낳은 이상 돌이킬 수 없다. 나는 먼 훗날 아이들이 추억할 어린 시절을 행복으로 물들여야 할 책임이 있다. 내가 얼마나 오래 꿈꾸던 시골생활인가? 이곳에서의 시간을 반드시 아름답게 마무리해야 한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 편도 꼭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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