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라는 이유로 한동안 너무 아팠다.
사는 일이 벅찼다. 요즘은 어떠냐며 묻는 말을 듣고도 '괜찮아'하기엔 하나도 괘념치가 않다. 그저 '행복하자'는 비문으로 하루쯤 행복할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쓸 거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삶은 얼마나 잔인해지는가. 지금까지의 내 삶은 '무엇'이었나. 이 정도로 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적 있었던가. 수년 전 그리던 지금의 난 어떤 모양이어야 했을까. 그러는 나는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을까.
마지막으로 본 면접의 최종 단계에서 "진보냐 보수냐"는 질문을 받았다. 중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택해야 했을 진영은 어디였을까.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치는 사건은 어느 정당을 지지함과 등치될까. 사랑은 반드시 오른손 아니면 왼손잡이뿐일까. 내 대답이야 어찌됐든 합격은 내정자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가능성이 흥미를 잃었다. 나는 사는 법을 천천히 잃어버렸다.
슬픔은 바다의 물거품처럼 뒤늦게 인다. 몇 달 동안 누워 지내며 흰 벽지만 보았다. 그 위에 뜻 없이 이러한 글자를 쓰곤 했다. 신이 이 세상을 만들 적에 나는 이 세상에서 한없이 쓸모없고 열등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살도록 지은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내가 살아내기엔 너무도 벅차서 내 삶은 그저 뜨겁고 먹먹한 슬픔과 혼자선 감당이 안 되는 사랑으로 가득 찰 뿐이다.
그러고 나면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신이 이 세상을 만들 적에 그가 가장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한없이 쓸모없고 열등하고 나약한 존재로 살도록 지은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뜨겁고 먹먹한 슬픔과 혼자선 감당이 안 되는 사랑으로 가득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발끝에 닿았던 슬픔의 표면이 온몸을 절일 만큼 차오르는 때가 오면 백석에게서도 난데없는 위로를 읽는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맞은 위로는 눈질이며 주먹질 같았다. 나는 청춘이라는 시덥잖은 이유로 아픈 게 아니다. 그러기엔 내 청춘은 너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했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러니까 나는 하루쯤은 더 살아 보기로 했다. 청춘 아닌 다른 이유로도 그 정도는 살 만할 것이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는 이유로 내 청춘은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지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