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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은 Nov 22. 2020

33년생 수강생

나의 최고령 학생


 복지관 피아노실의 문이 열린다. 체구가 아주 작은 할머니 한 분이 설레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희끗한 짧은 머리에는 귀여운 핀 하나가 꽂혀 있다. 할머니는 소녀 같은 귀여운 미소를 머금고, 조금 부끄러운 듯한 몸짓으로 걸어오시며 나를 향해 말한다.


“선생님, 나 피아노 배우러 왔어요. 피아노가 너무너무 배우고 싶었는데 이제야 내 순서가 되어서 왔어요. 이렇게 늙어서도 배울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 학생은 1933년생, 88세 나의 최고령 학생이다. 내가 수업하고 있는 복지관의 피아노 수업은 배우고자 하는 수강생이 많아서 먼저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후 순서가 되면 들어올 수 있다. 몇 개월의 기다림 끝에 수강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으면 그때부터 설렘이 시작된다고 한다. 33년생 고령의 학생도 설레는 마음으로 첫 수업을 기다리다 드디어 문을 열고 오셨을 것이다. 이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손을 건반에 올려놓고 건반을 누르는 순간 기쁨이 가득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고령의 학생을 가르치며 이 분이 살아오신 인생의 기운을 받아 삶의 지혜를 얻게 된다.


 나는 대학생일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 짧지만은 않은 17년이라는 시간 동안 피아노 레슨을 하고 있다. 그동안은 주로 어린 학생들의 레슨을 했다. 그러던 중 6년 전 복지관의 성인 피아노반 수업을 맡아 강사로 일하게 됐다. 이 곳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레슨의 역사를 쓰게 됐다. 주로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만나왔던 내가 이제는 적게는 20대에서 많게는 80대에 이르는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어리게는 38개월의 학생을 가르친 적은 있었지만 60대 이상의 학생은 처음이었다. 결국 나는 모든 연령과 건반 앞에서 만나고 그들의 인생을 간접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복지관에서 레슨을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그저 즐겁고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어른들과 대화를 하는 것도 어려워하던 내가 하루에 20여 명의 어른들을 마주하며 아이들도 어려워하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었다. 음표와 쉼표의 박자를 몇 개월에 걸쳐서 얘기해도 잊어버리시는 순간을 맞이하면 마음속에서 답답함이 올라올 때도 있다. 혹은 수업 시간에 맞춰서 오지 않고 본인의 스케줄대로 아무 시간에 오셔서 막무가내로 레슨 해달라고 하시면 난처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몇 개월을 힘겹게 버티고 1년이 지나니 고령의 학생들을 대하는 게 편해졌다.  


 그동안 힘든 순간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 번은 어릴 때부터 너무나 배우고 싶었던 슈베르트의 즉흥곡을 1년 가까운 시간 매일 몇 시간씩 연습하셔서 힘들게 완성하시고, 완곡하셨을 때 너무 감동을 받아서 같이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고령의 학생이 한 곡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은 나에게는 더 큰 감동과 보람을 주었다.


 레슨 시간, 건반 앞에 앉으면 수강생과 나의 둘만의 시간이 생긴다. 비밀의 공간과도 같은 레슨실에서 학생들은 나에게 속마음을 터놓을 때가 종종 있다. 삶의 철학을 종종 꺼내 툭 던지듯이 말씀하시기도 한다. 피아노 건반에 놓인 손가락을 보며 자신의 손이 그동안 해왔던 일을 말하기도 하시고, 굽어진 허리에 담긴 사연을 들을 때도 있다. 피아노를 치며 어릴 적 추억이 떠올라 그때의 추억을 꺼내기도 하시고,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던 과거의 어린 소녀가 되시기도 한다. 이렇게 복지관에서 6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것은 나는 이분들께 피아노를 가르치지만 동시에 나도 그분들의 삶을 옆에서 바라보며 어떻게 나이들 것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배워간다는 것이다.  


 최고령 학생은 가방에서 오래되어 낡은 역사가 담긴 피아노 교재를 주섬주섬 꺼내신다.

“우리 딸들이 배웠던 책이라서 몇십 년 지났는데 이걸로 배워도 되나 모르겠어요.”

손때 묻은 책을 꺼내 들고 설레는 표정을 지으시는 얼굴을 보며 나는 그분의 인생의 한 페이지에 들어가게 됨을 느낀다. 이제는 굳어서 잘 펴지지 않는 굽은 허리를 펴는 것으로 레슨이 시작된다. 피아노와 의자의 간격을 맞추어 안정된 자세를 취한다. 굳은 손가락 관절을 유연하게 풀어주고 ‘도’를 찾는 법부터 알려드린다.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은 굵고 굽어 있다. 90년이 다 되는 시간을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시고 얼마나 힘들게 딸들을 키워 내셨는지 내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선생님, 나는 집에 있으면  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피아노 배우면 치매 예방이 된다고 해서 왔는데요. 피아노 건반을 눌러보니 너무 설레좋아요. 어릴  동네 부잣집에 작은 건반이 하나 있었는데, 몰래 담장으로 살짝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나 몰라요. 이제라도 배우게 되니 너무너무 좋아. 우리 딸들한테는 하기 싫다는 피아노 억지로 가르쳤는데, 정작 나는 바빠서 배울 엄두도  내고 있다가 이제야 왔어요. 이제 늙어서 눈도  보이고, 배우는 것도 느린데 앞으로  부탁드려요. 선생님 만나게 되니 진짜 반가워요.”


 이렇게 설렘과 열정이 느껴지는 의지의 말은 많은 레슨들로 열정을 잃어가고 있던 나를 깨워준다. 앞으로 피아노를 배우면서 많은 어려움을 마주할 것이다. 그 난관들을 마주할 때 도움을 주는 선생님이 되어서 그동안 삶의 무게에 힘들었던 거친 손이 자유롭게 건반을 눌러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내는 즐거움을 선사해 드리고 싶다. 그리고 나도 피아노 앞에 앉으신 인생의 선생님들께 잘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의 지혜를 배우고 싶다.

오늘도 33년생 최고령 학생은 소녀 같은 표정을 지으며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선생님,  잘하고 있나요?  잘하고 싶은데 자꾸 깜박깜박  잊어버려. 그래도 너무 재밌어요.”


 처음 복지관 수업을 시작하면서는 수강생들이 음정과 박자를 정확하게 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잘 고쳐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몇십 년의 세월 동안 가족들을 위해서 본인을 내려놓으셨던 이 분들에게는 자신을 위한 시간을 선물할 수 있도록 옆에서 따뜻하게 지켜 봐주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격려의 말을 전하는 것, 응원의 기운을 드리는 것, 기쁘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같이 공감해주는 것,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더 필요한 일이었다. 이런 것들이 선행되고 나서 마음이 부드러워지면 그다음에는 음악 안에서 즐거워하셨다.

 나는 그렇게 3살의 어린 학생도 88세 최고령 학생도 피아노 앞에서 음악으로 마음을 위로하는 것을 도와주는 그런 선생님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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