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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26. 2020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게요

다시, 졸라맨


똥 손으로 매일 3년간 그림을 그리겠다는 결심을 결국 해냈다. 성실, 끈기, 지구력과 상관없이 살아왔던 내가 이렇게 꿋꿋이 해낼 줄 나도 몰랐다. 애초에 장기 계획 같은 걸 세우지 않는 편인데 어쩌다 안 하던 짓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쪽팔리면 안 된다고 배웠다. 이미 떠벌였으니 해야 한다. 그림에 대한 자신감까지는 아니지만 내 근성에 대한 자신감은 얻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두목에게 말한다.

"두목, 당신이 밥을 먹고 무엇을 하는지 말해주십시오. 그럼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게요."

나는 밥을 먹고 매일 그렸으니 그림 그리는 사람이다. 예술가다. 나는 그 문장을 살아냈다.  그림이라는 예술행위에 '매일'이라는 강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만은 지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매일' 그렸다는 거 말고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3년을 그렸지만 내 그림이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지는 않았다. 당연하다. 오히려 예술가는 타고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다만 내 그림과 달리 내 삶은 일취월장 나아졌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누렸으니까. 게다가 자식들에게서 엄마는 마음먹으면 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사실은 오해지만)을 받게 되었다.  

매일 그리기는 나를 해방시켜주기도 했다. 오십견으로 삐그덕거리지만 여전히 내 팔이 쓸모 있음을, 더 이상 손실될 것 없는 근손실 상태인 내 몸뚱이에 아직 쓸 만한 구석이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그러니 그림은 내게 해방이다. 몸의 해방, 나로부터의 해방.


취미로 하는 거죠?라는 말에 목숨 걸고 하는데요?라고 대답해주고 싶다. 하지만 입을 다문다. 애초에 그렇게 재단해서 바라보는 자에게는 어떤 답도 가닿지 않을 것이므로. 일상을 산다는 건 언뜻 가벼워보이지만 실은 삶을 걸고 하는 거다. 안간힘을 쓴다. 그렇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그럼에도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매이지 않고 쉬엄쉬엄 해온 내가 기특하다. 내 그림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성취였는데 결과물도 나쁘지 않았다. 독립출판물로 그림책을 만들었으며 내 책에 삽화 형식의 그림을 넣었다. 그 정도면 훌륭한 거 아닌가. 

인생은 가끔 잘하는 사람 순이 아니라 그저 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오기도 한다. 그러니 그냥 하면 된다. 물론 그것은 행운이다.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나를 돌보고 나서야 찾아온 행운이다. 행운은 훈련 속에 그렇게 오는 것이라 믿는다.       

          

항상 애매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공부를 아주 잘하지도 아주 못하지도 않아서 공부로 밀어주기도 애매했고, 체력도 아주 나쁜 것도 아주 건강한 것도 아니어서 취업하기도 안 하기도 애매했고, 글을 아주 잘 쓰는 것도 아주 못 쓰는 것도 아니다. 힘들 때마다 글쓰기를 하지만 글 작가가 되기에는 애매했다.

요즘 세상은 만능을 원한다. 기본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기계에는 젬병인 내가 회사에서 복사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면서 스스로 엄청나게 기특해했다. 이제 그건 마치 전기밥솥으로 밥하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전혀 상관없는 일에도 토익점수를 요구하고, 기왕이면 사진이며 포토샾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 정도는 다룰 줄 알면 좋겠고, sns도 좀 해서 팔로우 수가 많아 회사 홍보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한다. 심지어 사회성이라는 이름으로 춤이나 노래까지 잘하기를 바란다. 다들 알아서 미리 가득가득 채운다.     

어차피 그런 사람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니 그냥 하는 것이다.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그냥 하는 것이다. 못해도 괜찮다. 하는 게 중요하다. 기본으로 하는 스펙 쌓기와 상관없이 그냥 이유 없이도 할 수 있는 거다. 그림 그리는 유튜버 이연이 그랬다. 스페셜리스트가 되려고 하지 말고 제너럴리스트가 되라고. 애매하지만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한다고.  

그러니 애매함도 다행이라 여긴다. 애매하게나마 뭐든 하니까. 그림이라는 애매함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어설프지만 또 하나의 무기가 된다. 능력이라는 의미의 무기가 아니라 비밀을 품은 자가 가진 설렘이라는 무기다. 남몰래 연애를 하는 것처럼, 발그레한 볼과 두근거리는 기쁨을 감추고선 시치미를 딱 떼는 쾌감이 있다. 그것은 은밀한 긍지가 되어주었다.     


 <요즘 덕후의 덕질로 철학하기>를 읽고 한 독자가 이런 글을 남겼다. 50대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의미 있다고. 그 글이 잊히지 않는다. 한국에서 딱히 내세울 경력 없이 주부로 살아온 50대 여성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 없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제2의 인생이니 인생이모작이니 다양한 정책이 나오고 있다지만 그 또한 경력 있는 이들을 위한 제도이다. 

집필노동자로서 적절한 보상을 받고 싶다. 내 입은 내가 책임지고 싶다. 옷 사 입고 집 사고 이런 건 바라지도 않고 오로지 하루 한 끼라도 내 노동으로 번 돈으로 사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기에 아직 내 능력으로는 꿈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남편에게 빌붙는다. 빌붙을 누군가가 있어서 일상을 그리며 살 수 있었다. 빌붙을 누군가가 없는 이들에게 미안하다. 혼자 누리는 것 같아서. 여유가 있어서 빌붙을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내가 이기적이어서 그렇지. 이기적으로 살 수 있는 것도 고맙다.  

가족들 뒷바라지만 해온 우리네 50대 여성들은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또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을 맡게 되고 더 낮은 곳으로 떠밀려간다. 떠밀리지 않고 내 의지대로,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나 자신을 돌보려 한다. 소식이 없으면 누군가를 돌보고 있나 보다 생각하시라. 꽃은 꽃피우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환경이 맞으면 저절로 피는 거지. 우리에게도 물과 햇빛과 온도가 주어졌으면... 애쓰는 거 그만하게.     

똥 손으로 매일 그림을 그린 것은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가 되는 것이 간절한 게 아니라 무엇으로라도 사는 게 간절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이제는 그런 명분에, 꿈에 매몰되지 않으려 한다. 꿈에 매달려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꿈을 낚고, 누리고 싶다. ‘그리고 싶은 걸 그리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작가'라는 무언가가 되기보다 ‘나’라는 '아무나'가 되어 '아무것'이라도 하는 사람이고 싶다. 동기가 무엇이건 계속 그린다는 행위가 내게 남아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삶의 이유는 아니지만 삶의 방식을 하나 품었다.


그래서, 내 그림이 어떠냐고? 그래도 3년이나 그렸는데 이제 봐줄 만하지 않냐고?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그래봤자 3년은 너무 짧은 기간이다. 그림은 그렇게 단시간 내에 그려지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똥 손의 그림 그리기는 더욱. 그동안 멋진 척하느라고 그럴듯한 그림을 흉내 내보기도 하고 늘어놓기도 했는데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대신 못난 나를 드러내는 당당함이 늘었다. 항상 부족한 내가 부끄러웠는데 여전히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어쩌라고, 하는 베짱이 생겼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필요한 그림을 그린다. 결국 졸라맨 수준이지만 전하고 싶은 내용을 전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이만하면 내손은 똥 손 아니고, 동(動) 손이다! (쓰담쓰담)




이정도 그림도 수없이 다시 그린다. 그래도 머릿속에 것을 그림으로 만들어내는 내가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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