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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Mar 13. 2020

나를 보살피는 일

왜 그리냐고 물으신다면

평소 요리를 하는 사람보다 어쩌다 요리를 하는 사람이 더 맛있게 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건 평소 요리하는 사람은 살림을 하는 사람이니 재료를 아껴 쓰는 것이고 가끔 하는 사람은 재료를 아낄 줄 모르고 팍팍 쓰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편이 해준 말이다. 요리를 못할수록 아낌없이 요리 재료를 써야 하듯 그림을 못 그릴수록 더 좋은 재료를 쓰고 좋은 그림을 많이 봐야 한다.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하던 내가 그림을 시작한 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기 위해서였다. 익숙한 것 말고 완전히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어느 날 살던 곳을 떠나오고 하던 일을 멈추어버렸다. 그곳에서 더 이상 나의 어떤 것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꼈다. 사람도 공기도 햇빛조차도 나를 밀어낸다고 느껴졌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밀쳐냈던 것 같다. 전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니까 주저앉아 울기에 좋았다. 엉금엉금 기면서 쩔쩔매다가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걷어차이면서 차라리 통쾌했다.                      

아니다. 매일 그리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건 매일 눈뜨고 할 일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내 밥 먹던 삼식이들이 갑자기 자기만의 식단을 가지기를 원하고 자기만의 부엌으로 사용하려 했다. 부엌을 온전한 내 공간이라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쫓겨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키웠으니 원망할 수는 없었지만, 밤마다 내일은 뭐 하지?를 물으며 긴 하루가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가족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여전히 할 일이 있고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매일 달라지는 그림을 보면서 조금씩 지렁이 같이 꿈틀거리게 되었다.        

그것도 아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오로지 나를 보살피는 시간으로 삼고자 했다. 내 안을 들여다보고 아름다운 것만을 보고 내게 필요한 그림 재료를 사고 내가 갖고 싶은 물건을 고를 수 있게 되었다. 내 집의 벽지도 고르지 못했던 내가 한 번에 부엌 타일을 고르고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만족스러웠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수많은 뉴스와 신문에 거리를 두고 마음 따뜻해지는 드라마와 소설을 골라서 봤다. 산책을 하면서도 떠올리던 수많은 아이디어들을 밀쳐 두고 꽃과 하늘과 바람을 흠뻑 느끼고 마셨다. 내 감정의 정체를 찾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학원을 하던 C는 더 이상 이전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다며 아이 손을 잡고 대안학교로 왔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주변 아이들 공부를 조금씩 봐주었다. 다시 그렇게 사나 보다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어느 날 C는 밥집을 시작했다. 밥을 짓고 멸치를 다듬고 나물을 무치고 가스레인지를 닦아내었다. 금방 그만둘 거라고 주변에서는 수군거렸다. 하지만 C는 이미 학원 하던 시간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밥 짓는 일을 하고 있다.            

Y는 유방암에 걸렸다. 가족들은 오로지 치병에 집중하기를 바랐다. 회사도 그만두고 아예 요양원으로 가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보라고 권했다. Y는 치병을 하되 하던 일을 계속하겠다고 고집했다. 회사도 그대로 다니고 마을극단에서 맡은 작은 역할도 그대로 하겠다고 했다. 물론 아이들과도 함께 있고 싶어 했고 예전과 똑같이 엄마 노릇을 하고 싶어 했다. 살던 대로. Y의 의지대로 치병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Y의 태도는 그대로였다. 예전처럼 활기차고 예전처럼 예쁜 옷을 사고 예전처럼 웃었다.                       

누군가 뭐해?라고 물어올 때 그림 그려,라고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무것도 안 해,라고 답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스러웠다. 아무것도 안 하지 않으면서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남기 싫었다.  

친구들은 부러워했다. 사람답게 사는구나,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뭔가 도전하는 네가 대단하다, 애들이 엄마를 자랑스러워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이 아이들은 엄마의 삶에 관심이 없다. 책을 낸 후 아이의 무관심에 살짝 서운해질 무렵, 굳이 엄마 머릿속까지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아,라고 큰아이가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무관심이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지금 정도의 적당한 거리가 좋다.   

   

살다 보면 때로는 일상이, 때로는 변화가, 때로는 멈춤이 요구된다. 그 어떤 것이라도 나를 더 나답게 해주는 것을 선택하고 싶다. 멈추거나 또는 살던 대로 살거나 나는 여전히 나니까. 삶에 잡아먹히지 말고 단독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 가슴이 시키는 대로 나 자신을 잘 보살필 수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 다행이다.   

그림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되어 주었다. 가만히 앉아서 내 손을 움직여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표현해내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렇게 살아도 여전히 나는 나이고 여전히 세상은 돌아가고 여전히 가끔 행복을 느꼈다.     

그럼 된 거지. 그림이 아니면 또 다른 뭔가가 그렇게 내 곁에 남았을 것이다. 마침 그림이 내 손에 잡혔고 그림이어서 다행이다. 다른 무엇이 아닌 그림이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래도, 왜 그리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쓴 것과 쓰지 못한 것 사이에 있다'던 시인 장석주 님의 말을 빌어, 나는 그린 것과 그리지 못한 것 사이에 있다고 말하겠다. 그림으로 내가 살아온 흔적을 남기려는 게 아니라 그리는 일 사이에 내가 되어 가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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