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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n 02. 2020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뭘까

기록하는 삶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그럴 수 없다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았다는 흔적이라도 남겨야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언제나 그 반대로 생각하고 살았다. 흔적 없이 살다가 흔적 없이 가야지. 

그런데,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기록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동안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 그에 관해 찾아보거나 글로 남겼다. 텍스트 중심으로 기억하다 보니 사진을 보고도 그 작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제 좋아하는 작가는 꼭 얼굴을 그린다.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찾아 느끼는 대로 그림으로 남긴다. 애정 하는 작가를 기록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이 말도 못 하게 기특하다.  

              

글을 쓸 때도 그림이 떠오른다. 그림이 떠오르면 글 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리듯이 쓴다는 말 그대로니까. 이전에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과 그림이 떠오르는 건 조금 다른 뜻인데, 이미지는 구체적이지 않고 대략적이다. 그림은 완전하게 구체적인 모습을 띤다. 다만 아쉬운 것은 머릿속으로만 그릴 때보다 직접 그렸을 때 미천한 내 실력 탓에 오히려 상상력이 쪼그라들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도 기록은 구원이 될 수 있다. 핸드폰 하는 아들놈을 그림으로 승화할 때가 그런 때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이는 하염없이 핸드폰만 바라본다. 아이는 평화로운데 보고 있는 나는 속이 터진다. 나도 핸드폰을 많이 하지만 아이가 하는 걸 보는 건 고통이다. 결국 나의 평온을 위해 핸드폰을 하는 인류의 모습을 시리즈로 기록하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소파에 누운 남편 시리즈도 시작하기로 했다. 참으로 다양한 포즈로 소파와 물아일체를 하고 있기 때문에 후대에 남기면 기이한 기록이 될 것이다.   

   

그릴 게 없을 때면 고양이,라고 마음으로 정해놓았다. 고양이 사진이야 무궁무진하고 고양이의 다양한 포즈는 재미있는 구도를 배울 수 있는 최적의 교재니까. 사실 고양이를 무서워한다. 무섭지만 그리고 싶은 이 마음은 뭘까. 자꾸 그리면서 익숙해지고 편해지고 점차 만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양이 집사까지는 바라지 않고 그저 고양이 턱을 딱 한 번만 만져보고 싶다. 

기록하는 즐거움 중 제일은 덕주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기록이라고 할 만큼 덕주를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게 한이지만 그래도 내 나름 덕주의 기념일을 축하하는 경건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생일이나 앨범 나온 날, 밴드 결성일 등에 맞춰 하루 종일 덕질을 하고도 하루 종일 그림으로 혼을 불살랐다고 말할 수 있어 좋다.      

가끔 진짜 기록할만한 날, 예를 들어 첫 북 토크를 한 날이나 긴즈버그 추모하는 날, 4.3 추념식, 삼일절, 임시정부 100주년, 김복동 할머니 돌아가신 날 등에 맞춰 그림을 그린다. 덕분에 챌린지 같은 이벤트에도 참가한다. 거대한 sns의 홍수 속에 내 그림은 점처럼 보이지도 않겠지만 그러면 어떤가. 도도히 흐르는 역사 속에 나도 점 하나 찍었으면 그만이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뭘까, 항상 그게 스스로에게 궁금했다. 기록을 하다 보니 딱히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다기보다는 내가 보고 들은 것, 내가 경험한 것, 내가 느낀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싶다.  

그림이라는 이미지 속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그 이야기를 찾아나가는 과정도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 하나를 보더라도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면까지 찾아 설명하려고 드는 것일 테니까. 

물론 있는 그대로 예술적 감각을 일깨우는 경우도 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바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봤을 때였다. 미국에 사는 언니 덕에 그 그림을 보았다. 미술관이니 당연히 다른 그림들도 많이 있었고 그림에 문외한인 이들이 흔히 그러듯이 나도 조금 지루해하고 있었다. 한쪽에 다른 그림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이 보였다. 뭐가 있나 궁금해서 나도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얼음! 정말 얼음이 되어버렸다. 빙빙 돌아가는 별무리 속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런 것을 에피파니라 하지 않을까. 결국 이런 예술적 경험도 기록할 거리가 된다.  


아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주변에 선물을 하는 친구가 있는데 주는 행복이 크다고 했단다. 왜 자신은 그런 행복감을 모를까 생각해보니 아마 자신이 그런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고 덧붙였다. 사실 그건 준 경험이 없어서인데 그걸 따질 계제는 아니었다. 아무튼 아들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이 어떤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단다. 아들에게 근사한 선물을 해주기로 했다, 조건 없이. 그리고 인생이란 게 원래  결여된 감정을 찾아나가는 과정인 것 같다고, 엄마도 아직 그런 감정을 찾아 채워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기록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낱낱이 알고자 하는 의지가 아닐까 싶다. 결여된 것이든 숨겨진 것이든 아니면 표출하고 싶은 것이든 자신이 느끼는 것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손으로 붙잡고 한 번 더 들여다보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들려주려는 마음 이전에 내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다. 세상에 흔적을 남겨두고 싶다는 마음과는 다르다.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순간을 간직하려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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