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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20. 2020

득위의 비결

뭉기적뭉기적 익숙하지않게

많이 하지 않고 매일 하나의 그림을 그릴 뿐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오래오래 시간을 두고 나를 벼린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간절함이 적거나 시간이 많아서는 아니다. 너무 애쓰는 것을 스스로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다독이는 거다.

배움의 깊이는 얕으나 지금 서있는 자리, 나의 포지션을 안다. 내 포지션에 맞는 공부를 한다. 똑같이 묘사하는 그림은 가능하면 그리지 않는다. 연습은 하지만 목표로 삼지 않는다. 남들이 훨씬 잘하니까. 남들도 하는 것을 해봐야 비교만 되니까. 오래 단련되어야 가질 수 있는 기법은 피한다. 다양하게 시도해보고 내게 맞는 것을 찾아보는 것은 필요하지만 굳이 좌절하게 될 짓은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다르게 보려는 노력을 한다. <오래된 서울을 그리다>라는 책에서 김효찬 님의 드로잉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구도가 정말 남달랐다. ‘그림은 흥미를 끄는 재미있는 구도와 분할이 전부’라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 들었다. 책상 위에 붙여놓고 명상하듯이 바라본다. 김효찬 님의 드로잉은 딱 그랬다. 이분은 다르게 보려는 노력을 오래 단련했기 때문에 이런 구도가 나왔을 것이다. 나도 따라 해 보는 거다. 새로운 시선을 따라 나도 가보는 거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사람과 물건과 풍경을 유심히 보던 방식을 바꿔 위에서 보고 아래에서 보는 상상을 해보았다. 기울여보고 깎아서 보고, 자세히 보고 멀리서 보고. 그림을 핑계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다양하게 보게 된다.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도 그려본다. 기분이 안 좋을 때 진하고도 과감하게 붓을 움직이고 나면 선 속에 색깔 속에 분노와 두려움과 외로움이 담긴 듯하다. 나만 그렇게 보이겠지만. 그림은 보이기 위해서 그리는 것뿐 아니라 쏟아내기 위해서도 그리는 거 아닐까.          


새로운 건 누구나 어렵지만 갱년기에는 더욱 어렵다. 갱년기는 쓸데없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안 하고 싶어 진다. 갱년기는 생물학적 과제를 끝냈으니 본능적으로 휴지기를 갖고 싶다. 동시에 내가 좀 살아봤다고 아는척하고 싶다. 살아온 대로 사는 게 삶의 전부인 줄 안다. 그렇게 꼰대가 된다. 다르게 보지 않으면, 더 이상 살던 대로는 살아지지 않는다는 각성을 할 수 없다. 벌떡 일어나 새로운 일을 벌이고 흥미 있는 것을 찾아 나설 힘은 없지만 그래도 다르게 보기 위해 매일 뭉기적거린다. 뭉기적이지만 내게는 모험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에게는 꿈이라는 놈이 따라다닌다. 그놈은 끝을 모른다. 뭐라도 들고 해내라고 독촉한다. 내게는 그놈이 그림에 달라붙었다. 그림은 내게 가만히 앉아 안주하지 않고 해보지 않은 것을 하라고, 자유로워지라고 들들 볶는다. 이제야 처음 그림 그릴 때 들었던 말, 너무 의도대로 그리지 말고 자유롭게 그리라는 말을 이해한다.      

        

여전히 잘 못 그리고 여전히 자신 없고 여전히 혼자만 모자라는 것 같다. 신영복 선생님은 <담론>에서 득위(得位)를 설명하면서 70%의 자리가 득위의 비결이라고 하셨다. 자신이 가진 능력이 100이라면 70의 역량을 요구하는 자리에 가는 게 득위라는 거다. 애써 100을 채우고, 120을 노력하다 보면 부족한 부분을 권위나 거짓으로 채우게 되고 결국 자기도 파괴된다는 설명을 하셨다. 30의 여유가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것, 100의 자리가 본인에게는 기회일지 몰라도 주변 사람들에게는 고통의 시간이 된다는 말은 욕심을 부리던 나를 뜨끔하게 했다.

어떤 드라마에서 술잔을 내려다보며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있었다. 인생도 딱 8홉이야. 아주 어렸을 때 본 것인데 그 말이 잊히지 않았다. 선인들의 말씀은 본능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인류의 유산인가 보다. 

 나는 왜 굳이 가지지 못한 무엇을 해보겠다고 애쓰는 걸까. 120을 가져보겠다고 덤비는 일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그린다. 내가 가진 모든 역량의 70만 하고, 그중 그림에 대한 역량에서도 70만 하자, 마음을 다스린다. 아마도 못난 내가 드러날 것이다. 남들보다 못한 그림 솜씨로 70만 드러내면 당연히 못날 수밖에. 못난 나를 드러내는 것에 익숙해지면 된다. 위(位)에 욕심내지 않으면 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즐겁냐면 딱히 그렇지만은 않다. 어릴 때 언니 그림을 보면서 꾸며내는 이야기들을 들었던 때가 제일 좋다. 내가 그리는 것보다 남들이 그린 것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그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재미지다. 그래서 그림책을 좋아하나 보다.      

그럼에도 그린다.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무심히 넘겼던 순간을 붙잡고 그것에 의미를 담고 나라는 사람을 새겨 넣는다. 내가 그린 그림을 들여다보며 나를 다시 돌아본다. 내가 그렸지만 그림을 보며 다시 그림이 하는 말을 듣는다. 대단치 않은 말이다. 세상에는 이런 것도 있네요. 저런 생각도 하네요. 그런 얘기를 들으며 내가 되어가는 순간을 목도한다. 

언니가 그려주며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와 그림은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지만 거기에는 내가 없다. 인간은 얼마나 자신을 중심으로 사고하는가. 오로지 자신의 행위를 중심으로 세계가 만들어진다. 이 본능은 얼마나 힘이 센지 나같이 게으른 사람도 움직이게 한다. 본능에 충실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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