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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n 21. 2024

잘살게 되면

초단편소설 연작

민서를 만나기 얼마 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어. 인생 롤모델이라 할 수 있는 선배가 있어. 누구보다 사회를 깊이 이해하고 넓게 볼 줄 알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귀 기울이고 그에 맞는 구체적인 대안을 내오고 솔선수범해서 실천하는 선배였어. 선배는 논술학원을 했는데 아이들에게 사회를 비판하는 힘을 키워주기 위해 직접 교재를 만들었어. 역시 선배는 다르구나 했지. 밤낮을 바꿔가며 번 돈으로 지역아동센터를 차리고 독립서점을 내는 걸 보며 선배처럼 나이 들어가야지 다짐했지. 그런 선배가 몇 년간 달라진 모습을 보였어. 학력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거나 기본소득에 대해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인다든가 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때는 외면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확실히 변한 거야. 

선거 바로 전에는 이런 말을 하더라. 


"세금이란 건 국가가 어떤 정책을 할 거냐에 따라 정해야 하잖아. 그런 논의도 없이 갑자기 세금을 올리면 그게 서민 대상이든 중산층 대상이든 당사자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거야. 또 올린다 해도 공시하고 충분히 일정 기간을 두고 시행해야 하는데 그 후보는 급진적이야. 확실히 독선적인 면이 있어. 세금이 한두 푼도 아니고 말이야." 


조곤조곤 말했지만 결국 종부세에 대한 불만이었어. 도대체 언니가 종부세 걱정을 왜 하나 했더니 부동산 가격이 치솟기 바로 전 알짜배기 아파트를 하나 샀다는 거야. 입주도 못해본 집에 세금이라니, 그게 선배의 요지인데 가격이 무려 두 배나 뛰었는데 그럼 그 정도 세금도 안 내려고 했단 말이야? 선배의 뜬금없는 발언에 다들 멍해졌지. 계급을 정의할 때 생산수단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구분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씀이 왜 지당한지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지.  

결국 선배는 투표를 포기했다더라. 선택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라며. 과연 그럴까? 기권은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기득권자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걸 선배가 과연 몰랐을까. 

"그러니까 기권 칸이 따로 있어야 해. 어. 기권 칸이 많을 경우 재투표를 하거나 결승투표를 하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아?"


그러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더라. 누가 아는 게 두려운 걸까. 자기 자신이 가장 두려운 거 아닌가.

"난 사교육 하는 사람은 안 믿어." 

남편은 선배가 사교육 시장에 들어선 것부터가 문제라고 꼬집었어. 남편은 운동권이 어떻게 사교육을 할 수 있느냐는 비난을 오래전부터 해왔거든.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도 교육의 근간을 흔드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지. 교육이라는 대의를 저버리고 사회를 비판하는 논술을 가르친다는 알량한 명분으로 사교육 시장을 확장하는 데 앞장선 거야. 우리 아이들 세대의 문제는 전부 사교육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냐."

남편은 얼굴이 시뻘게 가며 목소리를 높였어. 그렇게 말하기에는 당신은 자본주의의 꽃인 광고로 먹고살지 않았느냐고 말하지는 못했어. 나도 그 덕에 산 사람이라서. 남편의 문제의식이 어디에 있는지 너무 잘 알기도 했고. 

다만 그런 상상을 하곤 해. 우리가 너무 고민 없이 사교육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만약 우리가 사교육 시장을 걷어찼다면, 공교육을 바로잡는 것부터 생활에 밀착된 운동을 해갔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우리 아이들이 겪는 경쟁사회와 그 폐해가 사실은 우리 탓이구나 하는 생각에 무릎이 꺾여. 그 결정적인 폐해가 검사집단인 거지. 


어쨌든 이 중요한 순간에 투표를 안 한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만 둘이나 되는 거야. 한 명은 지긋지긋해서. 한 명은 판단을 달리 해서. 시나브로 변한 거지. 

민서가 말한 지긋지긋함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도 예외가 되지는 않은 것 같아. 우리가 누구냐고? 어쩌면 나 자신. 더 크게는 민주 진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는 건 우리 진영에 대한 부족함, 잘못된 방향, 좀 더 솔직히 말해서 환멸을 나도 느끼고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 환멸은 시나브로 변한 우리들로부터 나오는 거겠지. 


아, 선배한테는 미안하지만 도저히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딜 비밀이었어. 그래도 가장 비밀을 지켜줄 사람에게 말한 거야. 내 앞에서는 길길이 뛰지만 남편은 어디 가서 남 얘기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 음, 남편도 시나브로 변했는데 나만 모르는 거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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