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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l 04. 2024

가까운 사랑, 채송화

존경하는 분으로부터 “사랑은 사람의 손길”이라는 말을 들었어. 처음에는 스킨십을 말하는 줄 알았지. 우리는 누구나 외롭고 쓸쓸해서 다른 사람의 따뜻한 온기를 바라잖아. 그게 사랑이라고 믿고 행복감과 갈망 쾌락 등을 떠올리지. 그런데 그분은 보살핌을 말하는 거였어. 지친  다리를 쓸어주는 것, 엉망이 되어버린 마음에 위로를 해주는 것도 좋지만 하루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차려져 있는 밥상이나 깨진 화분을 처리해 주는 등 구체적인 행동이 더 간절할 때도 있잖아.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누군가 같이 해주면 좋은 것, 내가 미처 하지 못한 것,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 등. 그런 일상의 것들을 함께 나누어 짊어지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거지. 실제로 사랑을 체감하는 것은 스킨십보다 보살핌이 더 먼저인 거 같아. 사랑이라 하면 당연히 스킨십을 먼저 떠올리지만 일상에서 더 간절한 사랑의 형태는 보살핌이라는 것을 그분은 지적한 거야.     

과연 나는 사랑을 해봤던가,라는 그분의 자조 섞인 말이 내 영혼을 후볐어. 그런 사랑을 받아봤던가, 가 아니라 그런 사랑을 해봤던가. 먼저 살피는 사랑을 나는 과연...     

      

내가 해온 사랑은 보살핌에 대한 요구이거나 그에 대한 저항에 가까웠어. 처음에는 나도 ‘아낌없는 사랑’을 꿈꾸었기에 주는 사랑을 했던 것 같아. 그런데 내가 준 것은 그가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고 싶은 것, 나의 만족을 위한 무언가였지.

얼마 전 이효리가 엄마와 여행하는 예능을 보니까 효리는 엄마를 위해 차 도구를 다 챙겨 와서 차를 마시자고 하고 엄마는 효리를 위해 오미자청을 가져와서 차 대신 오미자를 마시자고 하다가 언성을 높이더라. 상대를 위한답시고 강요를 하고 서운해하는 게 우리네 사랑의 모습 그대로야. 그런데 보살핌이라는 건 상대의 필요를 정확하게 아는 데서부터 시작되잖아. 상대가 불편하지 않게 세심하게 배려하는 게 진짜 사랑하는 마음이지. 그럴 때 우리는 헌신적인 사랑, 존중하는 사랑, 구체적인 사랑을 느끼며 감동하고.      


내 만족을 위한 사랑조자도 시간이 지나면서 주는 만큼 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끝없이 줄다리기를 했었지. 그것을 나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사랑이라고 우겼어. 남자와 여자에게 덧씌워진 성역할로써의 사랑 말고, 우리가 보지 못한 사랑, 경험하지 못한 사랑, 미래지향적인 사랑을 하자고 말이야. 그렇다고 대단히 투쟁을 한 것은 아니고 그저 가부장적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만 가득해서 '하면 안 되는 사랑'만 외치면서 발버둥 친 거야. 상대가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지, 성역할을 내게 요구하지는 않는지를 살피느라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은 살펴볼 여력이 없었어. 동시에 그에게 남자로서의 성역할, 백마 탄 왕자를 바라는 마음도 억누르려고 애썼어. 동등한 사랑을 하려면 내가 가진 허상도 버려야 하니까.       

    

그래서 나를 보살피지 않는 그를 비난하지 않으려고 애썼어. 그 말은 비난하고 싶을 만큼 나를 보살펴주길 바랐다는 뜻이기도 한데 괜찮은 척하느라 늘 서늘했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당연히 백마 탄 왕자가 아니었고, 돈 버는 것 말고 다른 남편의 노릇은 몰랐어. 젠틀하려고 노력했을지는 몰라도 지켜줘야 한다거나 다정해야 한다거나 그런 노력은 보이지 않았어. 적어도 내 눈엔. 만약 했다면 그건 성역할로서의 남자다움을 과시하고 싶었던 거지, 사랑이 보살피는 일이라는 것, 즉 손이 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은 아니야.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보살핌의 욕구를 억눌렀다는 거야. 현실적으로 살림을 맡은 내가 더 상대를 살필 수밖에 없는데도 나는 상대를 보살피고 싶은 마음을 애써 외면했어. 한번 주면 계속 주어야 할 것 같고 그것이 내 역할로 굳어질까 봐. 사랑하지만 보살피지는 않겠다는 모순 속에서, 동반자이지 엄마가 아니라는 말없는 저항을 하느라 사랑의 본질을 돌아볼 여력 따위는 없었던 거야. 그렇게 사랑에 굶주렸고 목말라했어. 

지금껏 내가 해온 행위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결국 스킨십도 손이 가는 일도 제대로 못한 우리의 그것은 무엇으로 남은 걸까.           

여전히 잘 모르겠어. 만일 우리가 손이 가는 게 사랑이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달랐을지, 손이 가는 시간을 통과하며 세상의 고정관념을 하나하나 걷어낼 수 있었을지, 여전히 눈치게임을 하며 '받는 사랑'만 원했을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지금은 다만 보살핌의 욕구를 잃어버린 게 아쉬울 뿐이야. 평생 누군가를 보살피며 살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보살필 수 없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건 나다움을 이루는 소중한 한 조각이었는데 말이야.   


   

누군가가 돌멩이를 모으고 밭을 만들어 가느다란 줄기 하나씩을 심어놨더라. 며칠 비가 오면서 진창이 되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더니 오늘은 어느새 꽃이 활짝 피었네. 아마 매일 오가며 진흙을 털고 다시 세워준 손길 덕분이겠지. 그러니 나는 어디 가서 꽃을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그저 누군가의 손길로 핀 꽃을 보고 즐기기만 하는 주제에 어떻게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겠어.

그래도 자세히 보는 건 해줄 거야. 어릴 때부터 봐온 채송화인데, 꽃잎이 이렇게 하트 모양인지, 꽃잎 속에 흰 꽃이 이토록 선명한지 전혀 몰랐어. 오동통한 이파리는 또 어떻고. 꽃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작고 흔한 것들을 자세히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나 봐. 이제야 채송화를 발견하다니.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지.      


근데 말이야, 오늘 나의 평어가 어땠어? 평어체가 동등한 관계에 더 좋다고 해서 한번 써봤어. 그거 알아? 존대어는 우리나라와 일본 뿐이래. 논어 맹자의 나라 중국도 존대어가 없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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