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시절 영어 공부 대장정
나는 영어를 좋아한다. 하지만 영어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정복해 보겠다고 캐나다까지 왔는데도 그놈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고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 영어란 놈은 오래된 연인 같은 존재이다. 아직 결혼에는 골인하지 못하고, 계속 밀당으로 나를 힘들게 한다. 어떤 날엔 정말 나에게 힘이 되었다가도, 또 어떤 날엔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정말 포기하고 다시 보지 말고 살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동안 함께한 울고 웃었던 시간 때문에 돌아설 수 없다. 우여곡절이 많은 만큼 추억도 많고 정도 많이 들었고, 이제는 정말 뗄래야 땔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캐나다로 오면서 나는 정말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어학원도 다니고 학교도 다닐 테니 1년 정도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어학원을 수료하고 학교도 졸업을 했지만 나는 여전히 영어에 자신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영어가 쉽게 느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더딘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내가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영어가 늘기만을 기다렸던 것도 아니다.
나의 영어 공부에는 나름의 대서사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처음으로 학원에 가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알파벳 정도는 책을 보고 알았지만, 단어와 문장을 배우기 시작한 때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 거의 30년 간 영어를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중간에 영어공부를 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군생활을 할 때에도 영어 공부를 할 만큼 완전히 손을 놓고 지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 첫 영어시험에서 100점을 받은 기억은 아직 생생하다. 그것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만점짜리 영어성적이었다. 이후로 계속 영어 성적이 떨어지며, 중학교 마지막엔 선생님께 영어 포기했냐는 소리까지 들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다시 심기일전해서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성문 기본 영어, 맨투맨 같은 문법책과 리딩튜터 같은 독해집, 그리고 혼비 영영한 사전까지 들고 다니며 열심히 영어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수능에서 외국어영역은 비교적 점수가 잘 나왔던 것 같다. 다른 영역은 다 망쳤다는 뜻이다.
대학생이 된 후 군대 가기 전까지 열심히 놀았지만 교양 수업으로 생활 영어 과목을 수강했었다. 과제를 열심히 해서 제출하고 발표도 했던 기억이 난다. 군 생활할 때는 상병 휴가를 나와서 토익 문제집을 사들고 복귀를 했었다. 제대 후 바로 토익 시험을 쳐볼 생각으로 일과 시간 후 남는 시간이나 주말에 그 책으로 공부를 했었다. 철이 들어서 그랬는지, 다른 작업을 하는 게 싫어서 그랬는지 군대에서 공부할 때는 자투리 시간까지 쪼개가며 의욕적으로 재미있게 영어공부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제대 후 처음 본 토익 시험의 결과는 500점을 겨우 넘는 수준!
나의 영어 실력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즈음에 현재의 와이프를 만났다. 나의 본격적인 영어공부는 제대 후 만난 와이프 덕분이었다. 당시 와이프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잠깐 하다가 진로를 영어교육 쪽으로 변경하고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와이프는 만날 때마다 영어공부 관련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나를 영어공부의 세계로 초대했다. 얼마 후 와이프는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났고 나는 복학을 해서 학교생활에 전념했다. 한동안 떨어져 지냈지만 우리 둘은 함께할 희망찬 미래를 위해 노력했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1년 후 와이프가 업그레이드된 영어 실력으로 돌아와 나의 영어공부 멘토가 되어주었다. 같이 영어 학원도 다니고 토익시험도 보러 다녔다. 정말 사이 좋은 연인이였지만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때는 싸우는 일도 많았다. 한 번은 주말 아침에 듣는 학원 영어 수업 중에 내가 졸았다고 엄청 화를 내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한 일에 화를 내는 여자 친구를 이해할 수 없어서 대판 싸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나를 진심으로 위하고 생각해주는 그녀가 늘 고마웠었다. 그녀와 함께 희망찬 미래를 위해 노력하면서 많은 것에 도전할 수 있었다.
나는 원래 공대에 입학을 했었다. 그때만 해도 남자는 공대였다. 1학년 때는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아 몰랐지만, 복학을 하고 보니 공대 공부는 내가 좋아하지도, 잘 하지도 않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는 걸 깨달았다. 2학년까지는 수업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교재 내용과 문제 풀이 등을 통째로 외워가며 꾸역꾸역 버텼다. 하지만 "이렇게 졸업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말 내가 이 분야를 전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과감하게 전공을 바꾸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전공을 바꾸는 김에 이왕이면 학교도 더 좋은 곳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편입을 준비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대학 편입 시험은 영어 시험이었다. 예전 대입 학력고사나 공무원 시험의 영어 과목과 비슷한 성격의 다소 올드한 스타일의 문제들이 많았다. 트렌드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나의 부족한 어휘력을 높이고 문법의 이해를 높이는 데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 사실 그때 익혔던 어휘와 문장 분석 실력이 이후 영어 실력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선발 인원이 적고, 경쟁율이 높은 명문대 편입 시험의 벽은 높기만 했다. 결국 나는 지원한 학교 시험에서 모두 낙방하고 말았다. 많은 시간을 영어공부에만 매달려온 터라 영어에 질려있었고, 편입 실패로 인해 영어에게 배신을 당한 느낌이었다.
이후 한동안 영어는 꼴도 보기 싫었다.
다시 원래 다니던 학교로 돌아와 예정대로 다른 과로 전공을 바꾸기로 했다. 전과 신청을 하려고 보니 3학년 전과라 남은 자리가 별로 없었고, 시험을 보고 성적순으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었다. 전과 시험도 영어 시험이었다. 편입 시험 준비로 영어실력이 업그레이드되어 있었기에 전과 시험의 벽은 무난히 넘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3학년부터는 경영대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나의 의지로 강행했던 첫 번째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편입과 전과 선발자를 모두 영어 능력으로만 뽑는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나라가 영어를 필요 이상으로 중요시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욕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영어 실력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것도 잘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해주고 싶다.
경영대로 옮기고 보니 영어 원서로 공부를 해야 하고,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도 들어야 했다.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에는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영어를 잘하는 학생이 많았다. 그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더욱 더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취업 준비를 위해서 토익 공부도 열심히 하고, 영어 스터디 그룹에도 가입했다. 영어 공부에 대한 관심을 넓혀갈수록 세상에는 정말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잘하는 사람들을 많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긍정적인 자극을 받게 되었다.
나름 꾸준히 영어공부를 했지만 토익점수도 회화실력도 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학연수를 갔다 와야 영어실력이 늘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모님께는 경제적 부담이 될 것 같아 차마 어학연수를 보내달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아르바이트로 어학연수 비용을 벌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새로운 학과 공부도 해야 했고, 토익 성적도 올려야 하고, 자격증 공부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 할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여름 방학 동안 해외 자매결연 학교에서 어학연수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 참가자를 모집했다. 다행히 자격조건은 턱걸이로 충족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남은 건 영어면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프로그램 참가를 위해 나는 처음으로 영어 면접을 경험했었다. 영어면접은 교수님과의 1:1 면접이었다.
어학연수 프로그램 참가자로 내가 선발된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큰 기대는 할 수 없었다. 많은 지원자 중 5명만이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발자 발표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 컴퓨터실에 들러 웹사이트에 게시된 선발 결과 게시물을 열어보았다. 정말 믿을 수 없게 선발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나는 소리치며 컴퓨터실을 나와 캠퍼스를 뛰어다녔다. 지금 생각해봐도 내 생애 가장 기뻤던 순간 중 하나였다.
그렇게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다른 나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어학연수를 받게 된 자매결연 학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대학교였다. 그곳에서 3학년 여름방학을 보내며 원어민 선생님들께 문학, 작문, 발표 등의 수업을 들었다. 주중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 그랜드캐니언, LA 등지로 여행도 많이 다녔다.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해외 생활이다 보니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영어실력도 늘리고 견문도 넓힐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여름방학 동안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그곳의 생활이 계속 그리웠었다. 그리운 만큼 다시 해외로 나가고 싶다는 마음도 간절해졌고, 그것은 영어공부의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후에도 꾸준히 영어공부를 하고 4학년이 되어서는 취업준비를 위해 토익 성적을 올리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4학년 여름방학 때에도 학교에서 해외 체험의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이 없는지 알아보다가 새로운 기회를 찾게 되었다. 바로 해외 인턴쉽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지원했다. 이번에는 해외 인턴을 주선하는 에이전시와의 면접도 있었고 현지 회사 인사담당자와의 전화 인터뷰도 진행되었다. 긴장이 많이 되었지만 지난해보다는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선발 과정에 최선을 다해 임했다. 해외인턴쉽도 선발 인원이 많지 않았고, 두번이나 나에게 그런 좋은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이번에도 학교 컴퓨터실에 게시물을 찾아보았다. 순간 데자뷰같은 것이 느껴졌다. 지난번 어학연수 선발자 발표때의 상황이 재현되고 있었다. 나는 선발자 리스트에서 내 이름을 확인했고, 또 다시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 나왔다.
편입 시험에서 모두 낙방한 것을 보상 받는 기분이었고, 학교를 옮기지 못하게 된 것이 잘 된 일로 느껴졌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두번씩이나 이런 기회를 잡게 되다니... 정말 믿을 수 없었다.
인턴 생활을 하게 된 나라는 아일랜드였다. 어학연수를 다녀온 친구들을 부러워 하던 시절, 언젠가 나도 어학연수를 갈 수 있다면 어떤 나라가 좋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한국학생들이 비교적 적은 나라로 가고 싶었던 내가 선택했던 나라가 바로 아일랜드였다. 꿈만 꾸던 곳에 실제로 갈 수 있게된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 위치한 금융서비스 회사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해외에서 직장생활을 경험하게 된 좋은 경험이었지만 사실 기대만큼 영어 실력을 늘릴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얻을 수는 없었다. 출근해서 퇴근 때까지 컴퓨터 앞에만 앉아 주어진 일을 했고, 그때까지 만족할 만한 토익 성적을 받지 못했기에 퇴근 후엔 홈스테이 숙소 방에서 토익 문제집을 풀었다. 주말에는 같이 인턴쉽에 참여한 한국 친구들과 주변 도시나 다른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여 시간을 보냈다.
즐겁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니 현지인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려는 노력은 할 생각조차 안 했던 것이었다. 하루는 퇴근을 하고 숙소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현지 직원 몇 명이 지나가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녁 먹으러 가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당황했고, 그 자리에 끼는 것도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I have to go home." 고민 끝에 나는 너무나 멍청한 대답을 내뱉으며 그 제안을 거절하고 말았다. 그날 나는 숙소에서 혼자 토익 문제집을 풀다가 문득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현지인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굴러왔는데도 그렇게 내발로 차버리다니...
영어 실력이 크게 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어학연수와 해외 생활을 경험했지만, 그것들이 내 영어 실력을 저절로 높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학연수도 해외인턴쉽도 영어실력의 향상보다는 견문을 넓히고 소중한 체험을 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다양한 경험을 쌓고 성장하기 위해 계속 적극적으로 여러 가지에 도전했던 것 같다. 나의 적성에 더 맞는 학과로 전과도 했고,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프로그램들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얻으면서 나도 모르게 많은 부분이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하지만 영어실력에 대해서는 계속 만족스럽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목표했던 토익 900점 돌파는 성취하지 못했다.
- 영어... 그놈 2에서 계속
간추린!
내가 경험한 영어 시험과 해외 생활
- 대학 편입 시험 : 대부분의 대학교에서 편입 시험으로 영어 과목만 본다.
과거 대입 학력고사나 공무원 시험의 영어 과목과 비슷하게 어려운 어휘와 복잡한 문장 해석 능력을 평가하는 문제가 많아 준비기간 동안 어휘력과 독해력이 많이 늘었다.
영어 시험에서 거의 만점을 받아야 합격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 토익(TOEIC) : 듣기 4개 Part와 읽기 3개 Part로 구성된 영어 시험.
최근에는 영어 말하기 시험 점수를 공인 영어 성적으로 인정하는 기업이 많아졌지만, 한동안 취업준비에 꼭 필요했던 필수 영어 시험이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거의 매달 시험을 본 것 같다.
짧은 시간 안에 문제 유형을 파악하고 유형별 전략에 따라 문제를 푸는 연습을 많이 했다.
읽기 영역의 경우 시간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시험이 시작되고 설명이 나오는 순간부터 문제를 풀기 시작하면 시간을 좀 더 벌 수 있다. part7부터 먼저 푸는 전략을 사용하면서 시간 종료 시간이 임박했을 때 긴 지문에 당황하여 많은 문제를 포기하게 되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 어학연수 및 해외인턴쉽 : 어학원 수업이나 인턴 일자체에는 충실했지만, 현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현지인들과 함께 많은 경험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여행을 다니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지만 한국인 친구들끼리만 모여서 놀다보니, 해외에 있다는 장점을 충분히 이용하기 어려웠다.
짧은 기간이라 영어실력 향상에 대한 너무 큰 기대를 가지기보다는 영어의 필요성을 느끼고 원어민들의 대화 방식과 문화를 경험하는 것에 의미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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