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길의 애정 Jun 20. 2022

메말랐던 마음에 들풀이 피었다

서울 중구 | 구세군 역사박물관 & 고종의 길 & 덕수궁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예기치 않게 일이 생겨 광화문에서 내렸다. 일을 다 본 후 어디를 갈지 고민을 하다 구세군 중앙 회관 근처를 걸어보기로 했다. 덕수초등학교가 있는 새문안로 뒷길은 과거 새문안로에 위치한 회사를 다니던 시절 가끔 산책을 다니기도 했던 길이다. 이직을 한 지 꽤 시간이 지났으니 제법 오랜만에 와 보게 됐다. 


 점심시간을 보내며 동행인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닌 휴일에 카메라를 들고 오니, 닿는 시선의 범위가 넓어진다. [구세군 역사박물관]이라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이날 처음 알게 됐다. 박물관보다는 기념관에 가까운, 채 30분도 걸리지 않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만큼의 작은 규모의 전시관은 정동길을 걸으며 잠시 들러보기에 나쁘지 않다. 우선 1920년대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이기에 건물 자체가 갖는 역사적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며, 붉은 벽돌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멋을 자아낸다. 정동의 진가는 이러한 근대 건축물이 주는 아름다움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구세군 중앙 회관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못 보던 곳이 생겼다. [고종의 길]이라고 이름이 붙은 곳이었는데 길이 난 곳을 보니 (구) 러시아 공사관을 가는 길이었고, 왠지 '아관파천'이 떠올랐다. 길을 따라 약간의 오르막을 지나면 보이는 안내문은 역시나 예상했던 내용이 적혀 있다.


 경복궁의 건청궁 복원처럼 덕수궁과 그 일대는 과거의 모습을 찾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돈덕전'을 비롯해 '선원전', '광명문'이 '덕수궁 제자리 찾기' 사업에 포함된 것 같다. 당장은 주변부와 어울리지 않는 '새 것'의 느낌은 세월이 지나 손때가 묻고, 자연의 손길로 세월의 흔적이 묻으면 어느새 더 옛 과거의 것들과 잘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보이겠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내려오니 서울 시립 미술관 갈래길이 나온다. 생각해보니 정동 교회와 서울 등기소 사잇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것 같아 길을 따라 걸어가니 저 멀리 이화여자고등학교가 보이며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보인다. 근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교육기관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다. 후에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곳이 아닌가. 처음 가보는 길에 서있는 역사박물관이라. 오늘은 왠지 새로움에 설레는 날이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은 다음을 기약하며 지나쳤지만 건물이 취향을 저격해 조만간 시간을 내서 오지 않을까 싶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습한 날씨 탓에 시원한 무언가가 절실했고, 여름이면 석조전 앞 분수대가 더위를 삼켜주는 모습이 떠올랐다. 마침 나는 배재대학교 길을 따라 나오던 길에서 좌측으로 걷고 있었고, 시청을 가는 방향이기에 덕수궁을 가보기로 한다. 경희궁은 아주 조용하고 사람의 발길이 잘 닫지 않는 곳이라 조용히 앉아 쉬고 싶을 때 자주 찾지만 덕수궁은 집회 때문인지 몰라도 최근에는 잘 가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시청은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곳이 됐다. 한때는 정말 좋아하던 곳이었는데 여러모로 안타깝다.


 대한문을 지나 보이는 적어도 수백 년은 된 노송과 고목은 신비로움과 편안함을 동시에 준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있는 아름드리 보호수는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그려보게 만든다. 또 괜히 나무를 안아보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한다. 

  단청의 오방색은 색을 덧입힌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흐린 하늘 표정에 화려함보다는 차분함이 돋보인다. 한옥이 주는 아름다움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으려 애써봤지만 나의 부족한 식견과 어휘로는 설명할 최적의 단어를 찾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새로움을 찾는 일에 탐닉하고 있다. 새로운 시선, 새로운 구도, 새로운 단어, 새로운 행선지, 새로운 감정, 새로운 경로, 그리고 새로운 '나'처럼 여러 방면에서 새로움을 열심히 찾고 있다. 더 많이 익히게 되면 '한옥의 아름다움'에 대한 주관적 정의를 보다 명확히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여름의 덕수궁은 역시나 석조전 앞 분수다. 대단히 화려한 분수는 아니지만 덕수궁의 이미지는 등나무 아래 방향에서 바라보는 삼면이 심어준다고 늘 생각해왔다. 서양식 석조 건물과 동양식 목조 건물은 꽤 조화롭다. 오묘하지만 아름답다. 미러리스 56mm 렌즈의 꽉 찬 화각은 이곳의 부조화 속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다 담아내지 못해 아쉽지만, 이날은 예정된 행선지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 와 있었고, 16mm 렌즈는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였기에 다른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뷰 파인더로 눈을 더 바삐 옮겼다. 

 사진을 정리하며 보니 이날은 유난히 카메라에 [관계]가 많이 담겨 있었다. 80대는 되어 보이는 세 어른의 오랜 친밀함이, 유모차를 잠시 세워두고 분수대를 배경 삼아 아이와 함께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남기려는 아빠의 따스함이, 연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그의 자상함이, 서로의 카메라로 서로를 촬영하는 어린 커플의 풋풋함이 담겨 있었다.

사람에 지쳐 사람이 싫었고, 사람이 주는 생채기를 견디지 못해 사람이 미웠는데 어느새 누구의 강요 없이 스스로 사람을 담는 걸 보니, 어떠한 생명도 살지 못했던 메말랐던 마음에 작은 들풀이 피어났나 보다. 





이전 16화 이번 주말은 '용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