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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un 26. 2022

영혼의 종족 5- 짐승의 경계

 '대다수는 자신이 평범하다 여기지만, 짐승들 세계에선 그마저도 평범하다.'- 숲속의 사냥꾼.



 14.

 누구든 상황과 방문하는 장소에 따라 옷차림을 맞추려 한다. 그곳이 사람의 죄의 유무를 엄숙히 판단하는 법원이라면 말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오늘 아침 법원 일 층 현관에 나타난 이십 대 후반의 여자는 그런 기본 원칙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녀는 자유롭게 헝클어져 있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 바탕에 꽃무늬가 잔뜩 새겨진 헐렁한 반소매 원피스를 입었고 허리엔 얇은 벨트를 찼다. 갈색 가죽 샌들 위에 발톱과 손톱은 빨간 매니큐어로 칠했고, 민얼굴에 바른 립스틱은 그보다 짙은 핏빛에 가까웠다. 얼기설기 양쪽 옆머리를 땋아 뒤로 합쳐 길게 늘어뜨린 풍성한 머리칼은 붉은빛이 감돌았다. 여러 인종을 섞어 놓은 듯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한 그녀의 얼굴엔 차가운 비웃음과 뜨거운 환희가 동시에 배어있었다. 그녀로부터 초록의 향기가 났다. 그것은 금지된 향기였다. 사람들 눈에 그녀는 거친 대지의 끊임없이 피어나 들꽃처럼 보였다. 그 꽃은 발칙하고 순수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근접할 수 없는 고결함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것은 언제나 거칠고 강하다. 중세 암흑시대 종교 재판관을 연상시키는 도덕주의자 복장 차림에 몇몇 판사들이 멈춰 그녀가 지나가는 길을 터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훌륭하고 우월한 법원의 권위는 영혼을 가진 그녀에게 통하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의 걸음걸이에 따라 권위가 갈라졌다. 아니 처음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에 권위라는 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타인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그 위에 올라서 지배하려는 탐욕이 만들어낸 거짓이다. 그녀는 그들의 복잡한 시선을 유령처럼 스쳐 이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오늘은 숙려기간이 끝나고 이혼 확인서를 받는 날이다. 이층 대기실에는 이혼 서류를 손에 든 남녀들로 꽉 차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화난 표정으로 따로 떨어져 앉고, 어떤 사람들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날카로운 말을 주고받고, 또 어떤 사람들은 부동산 세금 문제로 위장 이혼이라도 하듯 다정히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대부분 중년 나이였고 간혹 젊은 부부도 보였다.

 태훈도 일찌감치 법원에 도착해 그들 속에 끼어 앉아 혜림을 기다렸다. 그는 한꺼번에 밀어닥친 불행에 혼란스러웠다. 태훈은 가장 성공했을 때 그보다 큰 파멸이 문 앞에 도사리며 물어뜯을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진실을 몰랐다. 어려선 수재라 불렸고 비싼 등록금을 내고 특목고를 다녔고 명문대를 나와 잘나가는 금융인이 됐다. 여기까지 오는데 수십 년이 걸렸지만, 추락은 한순간이었다. 불과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경찰서에 출두해 불완전 펀드 사기 판매 혐의로 조사받았고 직장에선 자발적 퇴사를 종용했다. 얼마 전까지 본사 본부장급 이상으로 진급할 거라던 동료들의 시기 어린 질투는 동정으로 변했다.

 게다가 이혼까지 감행하게 만든 서른두 살 피트니스 강사와 변치 않을 것 같은 사랑도 결말에 이르렀다. 그 강사는 '다 필요 없어, 오빠만 내 곁에 있으면 돼'라고 위로해줄 여자가 아니었다. 뉴스 기사에 펀드 사기 판매가 나오고 세상이 떠들썩해지자 강사의 말투는 친근한 반말에서 거리감 있는 존대어로 바뀌었다. '오빠'라는 주어를 빼고 부담스러운 중년 남자를 상대하는 여자처럼 경계선을 그으며 대했다. 그의 가치는 숫자였다. 숫자를 잃어버린 남자는 오빠의 자격을 유지할 수 없었다. 피트니스 강사가 사랑한 것은 '머리 좋은 내 남편은 명문대를 나와 수천억을 주무르는 시중 은행 본부장이야'라는 자랑거리와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검은 뒷돈이었다. 피트니스 강사는 지극히 평범한 표준형 여자였다. 불명예 퇴직을 앞둔 미래가 불안한 띠동갑 연상인 남자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불안할수록 디지털 숫자에 집착한다. 태훈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폰을 만지작거리며 주식 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시계를 봤다. 오전 9시 30분을 가리켰다. 그의 머릿속 생각은 투자한 주식에서 혜림으로 옮겨갔다. 돌이켜보면 썩 괜찮은 여자였다. 안정된 직장을 가졌고 매달 시댁 생활비를 보태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외모도 주변의 부러움을 살만큼은 됐다.

 혜림과 한 달 전 잡은 약속 시간까지는 10분 남았다. 그동안 몇 번 통화를 시도했으나 그녀의 폰은 항상 꺼져있었다. 어쩌면 법원에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혼 절차는 무효가 된다.

 그가 알고 있는 혜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답지 않게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다. 친정과 왕래도 없고 터놓고 지낼 친구도 없었다. 오죽하면 오다가다 만난 16살 된 로운이라는 여자애에게 정을 주고 지낼까 싶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안정된 직장에서 나오는 수입이 자신이 재기를 할 수 있게 도와주고 품위를 잃지 않게 해 줄 거로 생각했다. 둘이 함께 살던 아파트는 그새 일억도 더 올라 매물을 거둬들였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다. 어차피 아이는 못났게 홀로 살아야 할 여자였다. 한때 실수해서 미안하다고 적당히 사과하고 다시 합치면 될 것이라 결론 내렸다.

 태훈이 본인 편리한 방식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재정립했을 때 대기실 문이 열렸다.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사람들은 어떤 멍청이가 저런 여자와 이혼을 결심했을까 하고 두리번거렸다. 흉악한 범죄자라도 찾는 듯했다. 태훈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는 방금 대기실로 들어온 젊은 여자가 혜림과 무척 닮았다고 여겼으나 설마 그녀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잘 있었어요?"

 그녀가 태훈에게 다가와 말했다.

 상큼한 목소리였다.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구분을 못 한 태훈은 앉은 채로 뒤돌아보며 그녀가 말한 대상을 찾았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대기실에 초록의 향기가 퍼졌다. 그는 전에 혜림에게서 났던 향수 냄새가 떠올랐다. 태훈은 자신 앞에 꼿꼿이 서 있는 여자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샅샅이 흘텄다. 화들짝 놀라는 통에 의자가 들썩거렸다. 분명히 그녀였다. 주변 이혼 대기자들이 허탈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누군가 꾹 참고 있다 뱉어낸 한숨 소리 들렸다.

 지난 한 달, 자신이 파멸의 시간을 보냈다면 그녀는 마법의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현대 의학 성형술인 지방 흡입과 보톡스로는 만들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백번 양보해 전신 성형 시술받았다 쳐도 한 달 안에는 불가능했다. 외모뿐 아니라 외모와 스타일까지 영 딴판이었다. 자신이 아는 그녀는 격식에 맞게 옷을 입고, 머리도 깔끔히 뒤로 말아 올리고, 화장도 옅게 하고 다닌 단정한 여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 알록달록 제멋대로 헝클어진 스타일에 건강미가 넘쳤다.

 순식간에 오만가지 의문이 들었으나 태훈은 기괴한 세상에 대부분의 똑똑한 엘리트처럼 입력된 수치만큼만 출력할 수 있는 맞춤형 안드로이드(AI)였다. 초자연적 신은 섬기면서 초자연적 현상은 믿지 않았고, 지능은 뛰어났으나 지적 사고력은 형편없었다. 눈 코 입이 달린 셋톱박스 안에 있는 안드로이드 형 뇌는 단지 기억력 처리 속도만 뛰어났다. 설정된 범위에서 벗어난 정보가 뇌로 전달되자 과부하로 인해 엉키기 시작했다. 육체노동과 관계없이 헬스로 만들어진 그의 울퉁불퉁한 몸에서 열이 나며 남성 안드로이드가 느끼는 흥분감은 최고치로 치솟았다. 그녀는 그를 미치게 만들어버렸다.

 그녀는 태훈과 한 칸 건너 자리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고 그는 그녀를 힐끔거렸다. 법원 직원이 호명하면 신분증을 확인하고 합의이혼 확인실로 들어가 5분 만에 나오고 또 다른 부부가 들어갔다. 그리고는 각자 떨어져 어색하게 걸어 나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이름이 불렸다. 앞으로 몇 번만 더 불려지면 줄어들다 사라져 버릴 이름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앞으로는 브리지트로 살아갈 것이다. 사실 그녀는 오늘 법원에 올 필요도 없었다. 저절로 지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괴한 세상에서 짧게 살다 가야 할 태훈은 그렇지 못하다. 가족관계 증명서에 자신의 옛 이름이 남아 있으면 다른 사람과 만날 수 없다.



 이혼 합의실 안에는 직업을 존엄한 신분으로 여기는 듯한 인상의 사십 대 중반의 판사와 두 명의 사무관이 있었다. 사무관 한 명이 서류를 뒤척이더니 판사에게 말했다. 서류에 적혀 있는 그녀의 나이대와 모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들이 들릴 듯 말 듯 수군거렸고 그녀는 의문이 들었다.

 '공부 잘해서 사법 시험 잘 친 자들이 같은 인간의 죄를 판단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사람을 판단하는 직업이 혐오스럽지 않을까? 저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했을까? 부끄러움은 없었을까?'

 판사가 서류의 적힌 나이를 확인하고 고개를 쳐들어 그녀를 살폈다. 콕 집어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젊은 여자였다. '스물아홉? 서른아홉?' 아무리 봐도 이십 대 후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로부터 초록의 향기가 났다. 호기심이 동한 판사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다. 그러다 유난히 푸르스름한 흰자위 안에서 일렁이는 투명한 검은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의 모습처럼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부끄러움이 물밀듯이 올라왔다. 그녀의 기묘한 눈동자가 자신만이 아는 부끄러움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떼려고 했으나 한번 붙잡힌 시선은 뗄 수 없었다. 판사는 마녀의 눈동자에 걸려들었다. 이어서 그녀로부터 거역할 수 없는 지독한 명령이 떨어졌다.

 '인제 그만 너의 부끄러움을 말해 봐. 네가 타인을 판단할 자격이 있어?'

그러나 그녀는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단지 궁금했을 뿐이다. 환각 상태에 들어선 판사 본인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을 그녀가 묻는다고 착각한 것이다.

 주변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어느새 판사는 법정이 아닌 숲속 공터에 서 있었다. 발밑으로부터 덩굴이 솟아나 온몸을 감아 올라왔다. 환각이라 여겼다. 깨어나려고 움직여 보았으나 칭칭 감아 조여 오는 굵은 덩굴로 인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숲에서 사람들이 나와 판사 주위로 둥글게 둘러쌓으며 모여들었다. 모두가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이 호의를 베풀려던 남자와 그의 아픈 딸도 보였다. 자기 딸과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저 아이와 아버지는 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덩굴은 계속 자라나 결국에는 얼굴만 남기고 몸을 덮었다. 얼마나 꽉꽉 조여 오는지 숨이 막혀왔다.

 "인제 그만 너의 부끄러움을 말해봐."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떠올랐고 말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나왔다. 그 안에는 형사 재판부에 있을 때 직위를 이용해 저지른 범죄도 있었다.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사람들의 비웃음이 들렸다. 미칠 지경이었다. 수치감에 잠식당한 판사에게서 불쌍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하나씩 끄집어내어 고백할 때마다 부끄러움을 가져다준 당사자들이 하나씩 사라져 갔다. 그러나 자신이 호의를 베풀려던 가난한 부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들 부녀에 대한 부끄러움을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 부녀에 대한 부끄러움만 빼고 속속들이 전부 게워내자 모여든 사람도 칭칭 감아 조여오던 덩굴도 사라졌다. 환각에 빠져들 때처럼 주변이 흐릿하게 변했다. 마법에서 풀려났다. 다시 이혼 확인 전담 판사석에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요?"

 "시간이라뇨?"

 사무관은 판사의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판사는 자신이 잠깐 졸면서 끔찍한 악몽을 꿨다 생각하고 앞에 앉은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미소 짓는 모습이 보였다. 네가 숨겨놓은 부끄러움이 뭔지 알고 있다는 뜻이라 여겼다.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그녀는 판사의 부끄러움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 판사 본인만의 시간이 멈추며 스스로 부끄러움을 떠올렸다는 것뿐이다. 혜림에서 브리지트로 돌아온 그녀는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이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 확실히 파악했다. 그래도 저 판사는 본인의 부끄러움 정도는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지 짐승은 아니었다. '말하는 짐승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복종하는 노예를 일컬었고 다른 하나는 짐승처럼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뜻했다. 브리지트는 사람들 속에서 짐승을 구별하는 능력을 갖춘 카린을 떠올렸다. 그는 오래전 숲과 대지를 뛰어다니며 짐승을 사냥하는 거친 사냥꾼이었고 지금도 그가 가진 능력이었다.




 15.

 카린을 떠올리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환희로 가득 차 눈부시게 빛났다. 옆자리에 앉아 그녀를 힐끗힐끗 곁눈질하던 태훈은 극심한 욕망에 휩싸였다. 그녀를 놓칠 수 없었다. 판사가 이혼 의사에 변함이 없냐고 형식적인 질문을 한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둘 중에 한 사람만 거부해도 이혼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태훈의 기대와 달리 그녀로부터 도망치기에 바빴던 판사는 형식적인 절차마저 생략하고 서둘러 끝냈다.

 "동일한 내용의 서류를... 두 부 드립니다. 90일 이내 관할 구청에 서류를 제출하시면 됩니다. 둘 중의 한 분만 가셔서 제출하시면 두 분의... 이혼은 성립됩니다."

 판사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심하게 떨렸고 다급했다.

 둘도 다른 사람들처럼 이혼 합의실로 들어간 지 5분도 채 안 돼서 나왔다. 태훈은 허탈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서류를 접수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의지할 곳 없다는 것이 그녀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오늘 법원에 과감한 스타일로 나온 것도 자신에게 보여주려는 의도라 여겼다. 더욱이 자신과 같은 좋은 학벌과 외모에 자기 관리가 잘된 총명한 남자는 드물다고 여기는 세상에 흔한 멍청이 중의 하나였다. 비록 남들이 선망하는 직장에서 불명예 퇴직을 앞두고 있지만 자기 능력으로 충분히 재기할 수 있고 위기가 기회라는 이상한 믿음도 가졌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그녀의 용서를 구하고 달래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태훈은 앞서 법원 현관을 빠져나가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직 아침도 못 먹을 텐데... 우리 식사나 할까?"

그녀가 멈춰 돌아서 마주 보자 좀 전까지 충만했던 그의 자신감은 급격히 축소되어 목소리까지 작아졌다.

 "아니, 배고프지 않아요."

 "그럼 어디 가서 커피라도 한잔할까? 차는 어디에 세웠어?"

 "차는 처분했어요. 매너 없는 운전자들 틈새에서 운전하고 싶지 않아서요."

 그녀의 말투는 여유로웠고 편안했다.



 두 사람은 법원 앞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로 갔다. 평일 오전이라 좌석은 대부분 비었고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창가 쪽에 앉은 그녀는 아파트 단지와 대형교회가 있는 8차선 도로 건너편을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봤다. 아파트 아래 상가엔 부동산 사무실 간판이 빼곡히 차 있는 익숙한 거리였고 얼마 전 기사에도 나온 곳이었다. 집값을 올리기 위해 새로 개발된 근처 다른 지역과 같은 이름으로 아파트 개명 운동을 하는 지역답게 곳곳에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구청장은 해결하라!

 사유 재산권을 보장하라!

 다음 선거에서 보자!


 그녀는 집단 광기를 보고 있었다.

 '저들 중에 교회에 나가는 사람도 있겠지? 타인의 것을 훔치고 살인 강간 따위만 직접 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을까? 저들은 대다수 집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슨 일이든 벌이게 만드는 자들이지. 인간의 역사는 풍요로움이란 탐욕으로 발전되어왔을 뿐이야.'

 아무 말 없이 도로 건너편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서 태훈은 불안한 침묵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태훈은 그녀를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녀는 그가 포기할 수 없는 매력적인 담보물을 가지고 있었다. 독특한 아름다움과 공립학교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원천은 영혼이었고 그 영혼은 벌써 다른 남자 차지가 됐고 공립학교 교사직은 사직했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요즘 어디서 지내?"

 "로운이와 함께요."

 "거긴 로운이 삼촌도 있는데... 불편하지 않아?"

 태훈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뇨, 그는 최고로 멋진 사람이에요."

 태훈은 '최고로 멋진 사람'의 의미를 '착한 사람'이라고 멋대로 해석했다. 태훈도 그를 알고 있었다. 물론 가까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몇 번 그녀를 꽃집 앞에 태워다 주면서 차창 너머로 본 게 다였다. 작은 꽃집을 하면서 16살 된 조카와 사는 별 볼 일 없는 남자였다. 육체노동에나 어울려 보일 정도로 순박하게 생겼다. 감히 그녀를 넘볼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단지 마땅히 갈 곳 없는 그녀가 안심하고 잠시 머물러도 될 정도로 착하기만 한 사람이라 단정지었다.

 "그새 우리 아파트가 2억이 올라 매물을 거둬들였어. 내 생각엔 몇억은 더 오를 것 같아."

 아파트 시세로 시작한 그의 일방적인 대화는 투자한 주식에서 가상화폐로 옮겨갔고 자신이 앞으로 벌일 금융 대출 컨설팅 사업구상까지 발전했다. 정말 화려한 언변이었다. 한때 잘 나갔던 금융 종사자답게 그는 아주 노련한 대출 담당자처럼 설득력 있게 말했다. 어떨 땐 힘주어 말했고, 어떨 땐 천천히 끊어 차분히 설명하는 것으로 고심한 흔적을 보여주었다. 가만히 자기 말에 집중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하등 상관없는 숫자 이야기였다. 저들의 세상에선 무엇보다 확실하고 달콤한 설득 방식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기괴하게 들렸다. 열을 올리며 숫자만 나열한 것에 불과했다. 태훈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 여기고 계속 가지려 하고 또 계속 잃어버리며 살아가야 할 불쌍한 사람이었다. 훗날 그에게 남는 것은 세상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라 생각했다. 그의 머릿속 장밋빛 계획은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불쌍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척했을 뿐이다. 빨리 자리를 벗어나 카린에게 가고 싶었다. 빈말도 건네지 않았다.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어졌다.

 1시간가량 지나자 그녀가 그만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태훈이 차로 데려다준다고 했으나 그녀는 그의 친절한 제의를 외면하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제의를 거절할 거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멀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태훈은 그녀가 한 번쯤 빼는 것이라 여겼다. 이제 2차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먼저 가서 기다리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차에 태워 전에 함께 갔던 동해안 바닷가로 데려가 해변이 내려다 보이는 호텔에서 하룻밤 보내는 것이 다음 계획이었다. 태훈은 차를 몰았다.


 

 태훈의 차는 건너편 꽃집을 지나쳐 유턴 후 대략 30m 후방에 세우고 그녀를 기다렸다. 지나올 때 살펴본 꽃집'임대'라는 표지가 붙어있었순박하게 생긴 착한 남자가 편의점 파라솔 아래 앉아 있었다. 저 남자도 그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명문대를 나오고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가진 자들은 자신을 엘리트라 착각하고 그렇지 못 한 사람에게 종종 우월감을 느낀다.

 태훈은 다가올 근사한 밤을 생각하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의 남성도 달아올라 꼿꼿한 상태가 되었다. 드디어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는가 싶더니 그 남자가 일어났고 그녀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남자에게 홀딱 반한 가벼운 여자가 되어 그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두 사람은 오가는 행인들의 눈치도 보지 않고 착 달라붙었다. 태훈은 여자가 좋아하지 않을 조건을 수십 가지도 더 가진 싸구려 육체노동자에게 내 것을 빼긴 심정이었다. 

 거짓으로 학습된 행동규범과 사고방식은 허상에 불과하다. 내면이 포학한 자들은 욕구가 좌절될 때 광기에 찬 짐승으로 돌변한다. 태훈은 인간의 경계를 쉽게 넘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부정할 틈도 없이 분노가 솟구쳤다. 목덜미와 이마에 붉은 정맥 줄기가 튀어나왔다. 핏발 선 눈빛은 광기로 번득였고 성대에서 그르렁 소리가 났다. 영락없이 짐승이 돼버린 태훈은 차량 핸들을 쾅쾅 쳐대며 욕지거리했다.

  "천박한 년... 씨발년... 그러고 보면, 저년은 한 번도 내가 만나는 여자에 대해 궁금해해 본 적이 없어... 처음부터 이혼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어... 쌍년..."

 태훈은 혼자 분개하여 욕지거리를 토하다 참을 수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문을 열고 뛰쳐나가려고 손잡이를 잡는 순간 무섭도록 섬뜩한 느낌이 행동을 멈추게 했다.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저 멀리 자신 소유의 여자를 껴안고 있는 육체노동에나 어울릴 것 같은 남자를 쳐다봤다. 30m도 더 떨어져 있고 앞 유리 창이 선팅되어 밖에서 볼 수 없었음에도 똑똑히 느껴졌다. 그 남자는 더 이상 순박하지도 어리숙하지도 착하지도 않았다. 전의 자체를 아예 상실케 만들어 버리는 거친 사냥꾼의 무자비한 눈빛은 악마 그 자체였다. 얼어붙은 태훈은 겁먹어 혼자 짖어대는 한 마리 짐승에 불과했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처참하게 찢긴다는 공포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자신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길가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칠 것 같았다. 태훈은 실수했다. 사냥꾼 앞에서 짐승의 기운을 풍기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액셀을 세게 밟아 중앙선을 넘어 유턴하여 빠르게 벗어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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