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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an 27. 2020

나는 이제 꿈이고 싶다.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행복 찾기



땀 흘려 먹고사는 것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 40kg짜리 포대를 올리고 싣고 내리고 하는 작업을 천 번은 해야 일이 끝난다. 두발로 대지를 굳게 딛고선 농부의 입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은 차가운 밤공기와 부딪쳐 몹시 선명했다. 콩 수확하는 기간은 20여 일 밖에 되지 않지만 크리스마스 날 밤에도 새해 첫날에도 바싹 작업을 했다. 그 후, 두 번에 걸쳐 수매를 하고 나니 모든 일이 마무리됐다. 다음 수확 철인 12월까지는 많이 바쁘거나 크게 신경 쓸 일이 없다. 이제 다시 밤하늘 별빛 비추는 농막에 들어앉아 글도 쓰면서 가끔은 산 넘어 파도치는 바다도 가고 아이들이 있는 서울도 갈 것이다. 이렇듯 몸은 땀 흘리고 머리는 생각하고 마음은 바람 같이 살아가는 난 행복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우선은 설을 아이들과 보내기 위해 서울로 왔다. 도로는 꽉 막혔고 희뿌연 하늘 아래 한강을 총총히 막아선 멋스러운 고층 아파트가 흉물스럽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도로는 넓어졌지만 밀리기는 마찬가지고, 아파트는 많아졌음에도 살 곳은 없고, 누구나 대학을 가지만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다. 국민소득 3만 3천 불이 넘어섰다고 떠들지만, 여전히 불행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숫자다. 늘어난 차량, 도로, 아파트, 국민소득 등의 수치다. 하긴, 사람이 변하지 않는데 세상이 변할 일 없다. 그렇게 살다 간 인생 허탕 치기 딱 좋다.


우습게도, 물질이 개인의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됐음에도 사람들은 그것만을 끈질기게 신봉하고 전파한다. 징글징글할 정도다. 흡사 고대 물질을 우상화하는 토테미즘 전도사가 된 듯하다. 현재를 송두리째 희생하며 불확실한 미래를 꿈꾼다. 그래야 훗날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서다. 착각이다, 절대 풍요로워질 수 없다. 물질은 삶의 지극히 작은 부분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하나가 전체를 장악하고 흔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게다가 인간이 만든 것은 완전하지 않다. 불완전하기에 언제든 훅하고 사라질 수 있다. 가진다 해도 겉보기만 요란스럽고 화려하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내적 빈곤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적 풍요로움은 허상이다.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경제력과 지위로 사람을 평가하는 천박한 비교문화가 생겨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무슨 아파트에 사는지와 출신 대학과 연봉은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다. 사람에게, 마트의 상품 진열대 가격표 붙여 놓듯 시장가치로 수치화시켰다. 사람을 물질로 평가하는 무리들, 소름 끼치고 정나미가 떨어진다. 살다 보면 따라오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하고, 잊고 있으면 알아서 찾아오기도 하는 변화무쌍 간사한 것이 물질이다. 아무리 명품으로 치렁치렁 도배를 해도 내적 비루함은 확연히 표시 나고, 많이 배웠다 해도 지식은 지성이 되지 못한다. 자신들이 물질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실제론 노예일 뿐이다.


그들의 대화 속에는 삶의 풍요로움을 결정하는 다른 요소인 사랑, 슬픔, 열정, 공감과 같은 감성들이 빠져있다. 부부간의 대화에서도 물질이 우선이다. 서로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감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각자가 외롭다 못해 불행하다. 법원에 가기 전까지 남편과 아내의 역할 분담만 있을 뿐이다. 머릿속에 물질이 부족한 행복은 상상할 수 없어서다. 본인들이야 단단한 물질로 감싸고 있어 안전하고 여길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얇은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불행한 선택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처럼 미련한 것은 없다.


그래서 난 오래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도시를 떠났다. 나와 아이들을 물질이 지배하는 삭막한 세상에서 지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별, 바다, 바람 같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흔하고 쓸모없는 것들을 삶의 일부로 집어넣었다. 아들이 고등학교 때로 기억한다. 녀석은 현관 앞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아빠, 별을 바라보는 게 너무 좋아”


내가 “더 많이 보여줄까”하고 머리를 쥐어박으려는 시늉을 하자 녀석은 웃으면서 멀찍이 도망쳤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흐뭇했다. 가르쳐주려던 소중한 감성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서다. 난 한 번도 아이들에게 별을 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별을 보는 방법은 스스로 알아가는 것이다. 부모는 데려다 주기만 하면 된다. 녀석의 삶에 힘든 시기가 닥친다면 다시 별을 바라보고 자신의 아빠처럼 두발로 대지를 굳게 딛고 버틸 것이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다양한 감성들이 물질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난 자유롭고 풍요로운 감성이 넘치는 초라한 이방인이다. 그리고 이제 꿈이 되려고 한다. 나와 내 아이들을 물질이 넘실거리는 세상에서 지킨 것처럼, 나의 글을 읽는 얼굴도 모르는 소중한 독자에게 꿈이 되고 싶다. 세상이 가르친 데로 살지 않아도 벗어날 용기만 있다면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려 한다.


올라오기 전에, 참나무 한 무더기 잘라놓았다. 농막 뒤 작은 공간에 모닥불을 피우고 찻물을 끓여 탄내 나는 진한 커피 향을 맡고 싶어서다. 간혹, 이 글을 읽고 샘이 나서 지나가는 길에 들른다면 커피 한 잔 정도는 끓여 줄 수도 있다. 커피를 싫어한다면 코코아나 허브차라도 알아서 준비해 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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