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유년 시절의 유치한 꿈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지만, 내가 아는 한 사람이 그렇다. 별것도 아닌 구두닦이를 꿈꾸며 살아온 바보다. 그 초라한 꿈은 그의 일생을 지배했고 결국 이루어냈다. 손뼉이라도 쳐주어야 할지 갈피를 집을 수 없다. 난 그 사람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그 바보에 대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서울 근교 언덕 위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대대로 성당을 나가는 할머니는 네댓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에게 틈만 나면 말했다. 옆집 숙이네는 귀신을 섬기는 무당이라서, 건너편 기철이네는 도둑놈이라서 그리고 저 집은 저래서, 이 집은 이래서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점찍듯 탈락시키다 보니 그 마을 어느 집의 아이들과도 어울릴 수 없었다. 보기 드물게, 밝은 갈색 눈과 옅은 머리칼을 가진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알았다고 했다. 언제나 마을 앞 들판에서 온종일 혼자 뛰어놀았다.
아이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부모 형제와는 멀찍이 떨어져 살았다. 그들은 안방에서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건넌방에서, 서울로 이사를 와서는 부엌 옆에 딸린 작은 방에서 지냈다. 한 번도 데리고 재워주지 않았다. 아이의 부모는 시내에서 원단 가게를 했다. 아침마다, 시내 유치원을 다니는 형과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나갔다. 저녁에 들어와선 뒤돌아보지도 않고 함께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그들의 뒷모습을 큰 눈을 껌벅거리며 바라봐야 했다.
부모는 아이에게 필요한 말 이외는 거의 하지 않았다. 거리를 두는 모습이 무섭게 느껴졌다. 어머니의 격멸하는 듯한 눈빛과 아버지의 신경질 적인 표정을 고스란히 받으며 자라야 했다. 아버지란 존재는 근처에도 갈 수 없을 만큼 공포 그 자체였다. 가능한 아버지와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배운 말은 엄마가 아니라 할아버지였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엄마를 찾지 않고 ‘하부지’하면서 울었다. 할아버지는 아이의 어머니이고 아버지이자 유일한 보호자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리웠던지, 가끔 비워진 안방에 들어가 그녀가 집안에서 입는 분홍 스웨터에 코를 대고 냄새를 들이켰다.
하루는 용기를 내서, 자신도 형과 동생처럼 생일을 차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의 어머니는 끝내 미역국도 끓여주지 않았고, 그것은 성인이 돼서 정상적으로 돈을 벌어다 줄 때까지 이어졌다.
“아... 아저씨.. 오…. 오늘이 며... 며칠에요?”
“오늘은 *월**이야!”
지나가는 동네 사람에게 물어봤다. 아이도 그날이 며칠인지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였다. 그날은 자신의 생일이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이이에게 ‘네 생일은 명절이 가까워서 안 해도 된다’고 했다. 훗날 생각해보니, 명절과는 가깝지 않았다. 시어머니인 아이의 할머니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최대 약점이었다. 어쩌면 그날이 자신이 이 집안에 들어온 날이 아닌가 여겼다.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형제들과 조금은 다른 외모와 아기 때 사진이 없어서다.
그런 상황에서 형제는 수평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부모와 함께 하는 자식과 그렇지 못한 자식 간 자존감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고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게다가 아이는 말을 더듬었고 키도 작고 학습지진아였다. 유치원을 다니고 일찍이 개인과외 교습을 받던 형과 부모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여동생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차츰 형제들에게도 무시당하면서도 자신이 모자라서 그런다고 당연한 듯 생각했다. 그렇게 아이는 바보로 키워졌다.
초등학교 3학년, 할머니가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딸네 집으로 완전히 가버렸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이는 슬픔보다 앞으로 누구와 자야 하는가 하는 현실적인 걱정을 했다. 울타리가 사라지면서 아이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절대로 반찬 투정이나 불만을 말하지 않은 것은 물론 눈치껏 심부름도 알아서 잘하는 착한 아이가 됐다. 내심으론, 날이 갈수록 점점 집과 사람들이 무섭고 싫어졌다. 약간의 잘 못도 혼날 것이 두려워 거짓말을 했다.
그해 12월 겨울 초입, 그날도 아이는 버스 정류소에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서 있었다. 어디를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주변의 상점들이 환하게 불을 켜놓고 있어서다. 아이는 추운지 양손을 엇갈려 겨드랑이에 끼고 한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정류소 옆 노상에 있는 허름한 구둣방이다. 백열전구의 노란 불빛이 나무틀에 비닐을 잇대어 만든 문으로 비쳤다. 엉성한 비닐 문에 김이 서려 물방울이 되어 흘렸다. 흐릿했지만 대충은 들여다볼 수 있었다. 보글보글 찌개가 끓는 연탄난로에 바싹 붙어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아이는 그들이 가족이라 생각했다. 구두닦이와 아내 그리고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딸이었다. 노란 불빛과 연탄난로 위 찌개에서 끓어오르는 김 그리고 가족이 비좁고 허름한 공간을 환상으로 만들었다. 아이의 밝은 갈색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때부터 아이는 구두닦이가 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소름 끼치고 징그러운 하루가 지나가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망했다. 등을 돌리고 있던 구두닦이의 아내를 보지 못했지만 정말 예쁜 여자 일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덤벙거리며 뜨문뜨문 무슨 말을 해도 미소 지으며 들어줄 것 같았다. 아이는 자라면서 꽤 엇나가기도 했지만, 언제나 다시 돌아왔다. 자신의 꿈과는 맞지 않아서다.
세월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갈색의 머리칼은 새치가 되어 하얗게 변했지만, 눈은 아직도 밝은 갈색이다. 어떤 사람은 그를 괴팍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부드럽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단호하다고 한다. 그런 여러 가지 모습은, 그가 얼마나 세상을 거침없이 살아왔는지 보여준다. 그럼에도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항상 웃고 다정했고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그의 아들의 꿈은 아빠 같은 아빠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대학생인 그의 딸아이가 고등학교 때 물었다.
“아빠 어렸을 적 꿈은 뭐였어?”
“아빤, 구두닦이였어.”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대체로 근사한 꿈을 만들어서라도 보여 주려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아빠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란 것을 알아서일까. 그의 딸아이는 웃지도 놀래지 않았다. 그리고 학교에서 아빠의 남다른 꿈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글을 써서 발표했다.
얼마 전에 아이들이 커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오래전 그때처럼, 다시 혼자가 되어 산골에 남아 농사를 짓는다. 큰 집을 뒤로하고 작은 농막을 만들었다. 비좁은 농막에는 그때 버스 정류소에 있던 구둣방처럼 노란 불빛 조명을 달았다. 그리고 저녁마다 글을 쓴다.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주로 가슴이 먹먹한 사람들이다.
이제는 그가 허름한 구둣방 주인이 된 것 마냥 밖에 서 있는 아이에게 손짓한다. 추우니까 이리 들어오란 소리다. 그는 이름 없는 아이에게는 이름을 지어주고, 추운 북쪽에서 온 아이에게는 따뜻함을 주고, 맨발로 걷는 아이에게는 새 신발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 밖에도, 작고 헐렁한 공간이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이 편하게 제 집 드나들 듯한다. 하나같이 삶에 지치고 아픈 사람들이다.
그의 구둣방에는 이름 없는 아이가 직접 그려서 보내 준 예쁜 그림엽서들이 걸려있다. 바보는 꿈을 이루었다. 남들에게 꿈이라고 말하지도 못할 정도로 초라했던 꿈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이제는 위로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위로하는 존재가 됐다. 똑똑한 사람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을 꿈꾸지만 그는 바보라서 자신이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꿈꿨다. 시험을 잘 보거나 돈을 많이 벌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꿈보다 능력이다.
난 그에게, 이제 꿈을 이루었으니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었다, 자신은 다시 꿈을 꾼다고 했다. 삶이 계속되는 한 꿈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행복한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 바보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실패한 자들은 성공하라고 하고, 성공한 자는 꿈을 꾸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