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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Dec 16. 2019

들녘에서 춤추는 사람

춤을 추면 내 세상은 변한다



며칠 전, 다시 농막으로 돌아왔다. 도시를 꽉 채운 지나가는 차 소리와 불빛도 없다. 주변이 적막함이 몸에 밴 듯 익숙하게 느껴진다. 천천히 주변을 살펴봤다. 밤하늘의 차가운 별빛이 반가웠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변한 것은 없었다. 실내로 들어오자 약간의 웃풍이 느껴졌다. 작년 2월에 농막으로 왔기에 느끼지 못했던 추위다. 하는 수 없이, 요즘 유행하는 이만 팔천 원짜리 보온텐트를 주문해서 침대 위에 쳤다. 작고 아늑하고 따뜻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아이들이 빈 박스에 들어가 노는 것을 좋아하듯 나도 다르지 않다. 작은 공간이 만들어 주는 아늑함을 느낀다. 차이점이라면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제 콩 수확을 해야 한다. 새벽에 완전무장 갖추고 나가서 저녁 7시가 넘어야 들어온다. 수확을 마칠 때까지는 숨 돌릴 새도 없이 보낸다. 문제는 한낮에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이다. 이 추위에 속옷이 젖고 땀띠가 다 났다. 밤이면 노트북과 책을 옮겨 놓고 음악을 듣는다. 어느새 몸은 나른해지고 눈꺼풀은 스르륵 무거워진다. 



밭일을 하는 동안,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머리는 생각에 빠져든다. 재미난 습관도 생겼다. 일하면서 음악을 따라 부르고 가볍게 설렁거리며 춤도 춘다. 하다 하다 별 짓거리 다 한다. 왜 이렇게 변했는지, 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주로 밴과 폴킴 그리고 앨리펀트의 노래다. 춤이라면, 대부분 흥겨운 음악을 떠올리지만 난 그렇지 않다, 잔잔한 노랫말에서 퍼져 나오는 감성과 몸이 하나 된 것처럼 리듬을 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이가 들어서도 유년 시절의 감성을 잊지 않고 산다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심심할 틈도 없다. 글을 쓰고 농사를 짓고 음악도 들으면서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오늘도 그랬다, 들판에서 일하는 중에 음악을 들으며 춤을 췄다. 길 가다 동네 사람이 차를 세웠다. 다가와서 뭐 하냐고 물었다. 난 있는 그대로 장난기 섞인 투로 대답했다.


“보면 몰라, 일하면서 춤추잖아”


나보다 5살이나 많은 그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쑥스러워하며 얼버무릴 줄로 생각한 것 같다. 사람들은 나를 너무 모른다. 층간소음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사방팔방 툭 터진 내 밭에서 춤추는 것까지 남 눈치 볼 필요가 있을까. 내가 춤춘다고 세상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고작해야, 밭일하면서 춤추는 사람이란 소리밖에 더 듣겠는가.

나도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십 대 초반까지는 극심할 정도로 소심했다. 음치에 춤도 출 줄 모른다. 그냥 마음 가는 데로 움직이는 것뿐이다. 서울에 살 적에도 노래방은 가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광대 노릇 하기 싫었고 그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러나 대다수의 현실은 나와 다르다. 춤과 노래는 고사하고 작은 감정조차도 드러내는 것을 힘겨워한다. 관습을 도덕으로 착각하고, 권위주의적이고, 그릇 된 체면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선 꽤 흔한 일이다. 가정에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부모는 지시하고 자식은 무조건 들어야 한다. 부모가 잘못된 행동과 말을 했어도 자식은 ‘아니요’라고 할 수 없다.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다. 억눌림은 습관이 되어 몸에 배이고 정신을 지배한다. 그 강도가 심할수록 상급자나 나이가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된다. 주변에선 그런 사람을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이라 부른다. 남에게 그런 평가를 여러 번 받다 보면 점차 자신이 잘 못 됐다고 여기게 된다.

가면 갈수록, 습관적으로 위축되고 사람과 만나는 것조차 두렵게 느껴진다. 자존감이 바닥이다. 남이 무슨 말을 하면 바보처럼 한 마디 반박도 못 하고 듣고만 있다. 결국 돌아와서 혼자 운다. 자신은 왜 이렇게 눈물이 많고 약해 빠졌는지 푸념을 한다. 세상 살고 싶지 않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더 심각한 게 남아있다. 그 모든 원인이 자신의 부모로부터 비롯했다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다.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니면 둘 다 그러지 않았다면 하는 원망을 하게 되고 미움이 생긴다. 엎친 데 덮쳤다고 해야 하나, 이젠 부모를 미워한다는 죄책감까지 시달린다. 난 이것을 ‘관습적 죄책감’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부모란 완벽한 존재이자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되는 성역이다. 가슴이 꽉 찬 듯 답답하다. 내뱉으면 다소나마 시원할 성싶어도, 부모를 원망하고 탓하는 것은 이 사회의 금기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도 없다. 참다 참다 스스로 정신병 의사를 찾아가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먹는다. 원인 제공자는 모른 척하고 당한 자식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살아간다.


그 어떤 관습도 사람을 넘어설 수는 없다. 잘못된 예의고 관습이다.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다. 먼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낸 말이다. 군주와 스승과 부모는 같다는 것이다. 통치자인 황제에게 대들지 못하도록 부모와 황제를 동일시함으로써 불만 표출을 미연에 막아버린 것이다. 쉽게 말하면, 황제를 자신의 부모처럼 섬기란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부모를 불변의 진리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우린 사람이기에 감정이 있다. 미워하는 마음도 감정의 일부이다. 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것을 죄책감으로까지 확대해서 자신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 사회도 그것을 죄악시해서는 안 된다. 부모라고 완벽하지 않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부모도 잘 못 했으면 자식에게 사과해야 하고, 자식도 부모가 틀렸으면 ‘아니요’라고 해야 한다. 올해 초, 아들아이에게 말해줬다.


“혹시, 아빠가 네게 잘 못 한 것이 있다면 용서해다오, 아빠는 처음이라 많이 미숙했다.”


내가 특별히 뭐를 잘 못 해서 한 말이 아니다. 조금이 있으면 아빠의 품을 떠나는 아이에게 응어리를 남겨 주고 싶지 않았고, 돌이켜 보면 몇 가지 살짝 걸리는 일도 있었다. 대충 간단히 퉁치고 넘어가고 싶은 얄팍한 심사이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모진 세월을 안겨준 그들처럼, 부모란 권위 뒤에 비겁하게 숨고 싶지 않았다. 난 내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극복하고 다르게 살았다. 아들아이가 말했다.


“아빠가 언젠가 그랬잖아, 우리를 키우면서 아빠도 같이 배웠다고, 아빤 훌륭했어.”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고 감성적 음악을 듣는 난 분명히 내성적인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래도 난 할 말은 하고 들판에서 춤을 춘다. 아니, 어쩌면 이전부터 마음속에서는 춤을 추었는지도 모른다. 내 아이들에게 ‘아름답다’ ‘예쁘다’ ‘최고다’라는 말을 수시로 해주었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평생 속삭인 말이다. 살면서,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끊임없이 속삭였다. 현실이 고통스러워도 마음은 항상 너풀거렸다. 내가 지닌 아름다움은 화려함이 아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는 강한 아름다움이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64년생인 나는 당신들보다 더 권위적이고 그릇된 관습에 젖어있는 시대를 겪어왔다. 그렇지만 나는 보란 듯 춤을 췄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맘껏 춤추는 법을 알려주고 싶어서다. 당신들이 내성적이든 소심하든 세상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차라리 춤을 추면 내 세상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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