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인문학
분명히 있었는데
없다
누군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자신의 글에 녹여낸 것을 읽다가 나는 왜 세세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빈 폴더만 있는 기분이다. 분명히 있었는데 없다. 겁이 많은데 안아주지 않아서 자주 울던 아이, 소심해서 누가 먼저 말 걸어주기 전에는 혼자 있던 아이, 큰소리 내는 어른이 무서웠던 아이, 사랑과 관심이 필요했던 아이, 하고 싶은 게 많았던 아이... 그 아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누가 폴더 속 자료들을 숨겨놨나? 혹시 삭제되었나?
자기는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잘 기억하더라
가끔씩 남편이 연애 때 우리가 어디에 갔었다, 무슨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할 때가 있다. 진짜로 생각이 안 나는 것들이 가끔 있어서 "거기 나랑 간 거 맞아?"하고 장난을 치곤 한다. 그러면 남편은 억울하다면서 혼자 씩씩댄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것 같단다. 정말 그런가?
사랑과 존중을 받지 못했던 기억, 정말 많이 아팠거나 슬펐던 기억... 어쩌면 나는 그런 것들을 숨겨놓았을지도 모르겠다. 느낌만 있고 구체적인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있었는데 없다.
오늘은 또 어떤 문장으로
브런치 글을 쓰지?
엄마, 엄마 책에서
쓰면 안 돼?
아하!
밤이 다 되어가는데 오늘은 아직 '문장님'이 오질 않아서 고민했더니, 아이가 그냥 엄마 책으로 하란다. 내가 쓴 글에서 내게 온 문장을 고른다? 쓴 지 한참 된 글들이기도 하고 인쇄된 걸로 읽으니 다른 사람 글 같아서 그러기로 했다.
나의 첫 책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글은 그림책 『걸어요』 로 쓴 글이다. 나는 '걸어요'를 산책(walk)이면서 산-책 (living book)이라고 해석했다. 사실, 그 문장을 떠올리게 한 문장은 따로 있다. 걷기 인문학에 나오는 "걸을 때마다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이다.
걷기 앱을 깔아놓으면 오늘 내가 얼마나 걸었는지 알려준다. 인생에서 내가 오늘 얼마나 산-책(living book) 했는지 알려주는 앱도 있다면 재밌겠다.
삼십 대 중반에 결혼하면서 들었던 생각이 '천천히 걷는 사람은 더 자세히 많은 걸 볼 수 있구나.'였다. 그래서 평균 나이보다 조금 늦게 결혼한 게 나쁘지 않았다. 결혼 전까지는 살갑게 손잡고 걷진 않았지만 내가 걸어가는 길에 원가족이 있었고, 스쳐 지나간 많은 친구와 지인들이 있었다. 결혼 후에도 계속 걷고 있다. 나와 다르게 살았던 남편과 서로 맞추느라, 내가 낳은 아이를 키우느라, 이것저것 배우느라 나는 분명 달라졌다. 앞으로 걸으면서 내가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할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끝은 그림책 『걸어요』의 마지막 장면처럼 희망적이고 평온했으면 좋겠다.
ON 문장: 걸을 때마다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
OWN 문장: 하얀 종이 위를 걸을 때마다 나는 아직 쓰지 않은 말들로 발자국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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