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울란우데까지 3박 4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 적이 있다. 3일 동안 고양이 세수만 겨우 하면 4일째 기차역에 내릴 때는 노숙자의 모습이 된다. 일본인이 살았었다는 어느아담한 숙소의 동그랗고 긴 욕조에서 4일 만에 씻었을 때의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더러워질 데로 더러워졌다가깨끗해져서 시원했던 그 순간의 기억은 기분이 바닥까지 내려갈 때면 다시 떠오른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들고 우울해질 때면 못 씻고 더러웠을 때의 찝찝한 기분이 된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몸에서 독소가 나온다니 더러워지는 기분이 드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20-30대에는 우울의 늪에 빠져있는 시간이 길었다. 마치 그게 멋있는 것처럼 그 시간을 즐기는 사람처럼 '나 우울해요'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보냈다. 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을 끌어올리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면 열이 나고 한동안 아플 걸 알면서도 일부러 비를 맞는 사람처럼 우울이 찾아오면 내 몸이 부서져라 힘껏 안았다. 그때는 나를 아끼고 사랑할 줄 몰랐다.
그림책 <감정 호텔>
그림책 <감정 호텔>의호텔 지배인은 감정이 온갖 크기와 모습으로 찾아와도 다양한 감정들을 보살피는 법을 안다. 슬픔이 찾아오면 조용히 기다려 주고 분노에게는 가장 큰 방을 내어준다. 무엇보다 어떤 감정이 찾아오든 언젠가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얻은 깨달음을 그림책으로 만들었다.
나도,나를 돌아보다가 나를 돌보게 되었다. 이제 우울이 찾아오면 우울이 왔구나 하고 인지한다. 슬픔이 찾아오면 또 슬픔이 찾아왔구나 알아차린다. 그림책 <감정 호텔>의 지배인처럼 내 감정 손님들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안다. 이제는 기분이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주기가 많이 짧아졌다. 20대에는 한 달이 걸리고 30대에는 일주일이 걸렸다면 40대인 지금은 하루 이내가 되었다. 그만큼 회복탄력성이 좋아졌다. 단지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다. 삶과 책에서 얻은 깨달음이 나를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꾸어놓았다. 요즘나는 그 이야기를 써내고 있다.이렇게 쓰고 나면 깨끗이 씻고 보습로션까지 듬뿍 바른 것처럼 마음이 가볍고 산뜻하다. 이 맛에 글을 쓰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