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Apocalypse, not now"

by 블랙베어


훼이싸이에서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길은 세 가지다. 버스, 느린 보트, 빠른 보트. 라오스는 전 국토가 산지에 길도 호락호락하지 않아 버스는 잘 이용하지 않는다. 메콩강을 따라 내려가는 보트는 두 가지인데 느린 보트는 중간에 1박을 해야 하고 빠른 보트는 6~7시간이면 간다. 빨리빨리 한국인! 빠른 보트를 선택했다. 난 기가 많이 딸려 남이 느릿느릿 움직이거나 행동하는 것을 보면 참기 어려워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바늘귀에 실을 꼽지 못하고 바늘귀 주변만 실로 꼼지락대고 있는 것을 보면 바늘을 빼앗아 콱 그 사람의 허벅지를 찌르고 싶어 진다.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라 기가 딸려서 그렇다.



6인용 보트였는데, 친구사이인 태국 처자 2명과 일본인 처자 1명, 나 요렇게 4명이 탑승했다. 라오스에서는 여행객으로서의 인연은 이들이 처음이어서 설렜다. 특히 태국 처자 2명은 나에게 관심이 많아서 선착장에서 같이 사진도 찍으려는 등 적극적이었는데 내가 미적미적대는 촌놈인 줄 알자 쓰리썸은 포기해버리는 듯했다. 일본 처자는 종일 일관된 새침한 표정만 지었는데 간이 선착장에서 화장실을 급히 찾을 때 똥줄 타는 표정 한 번 보여줬다. 아! 삐진 표정도 한 번 보여줬지. 삐진 이유는 잠시 후에.



나 역시 간이 선착장에서 화장실을 찾을 때는 같은 표정이었을 것이다. 화장실을 찾을 수가 없어 강변에서 노상방뇨로 해결. 사실 화장실을 하나 찾았는데 강 위에 놓인 가느다란 통나무를 밟고 3미터 넘게 건너가야 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똥물에 빠질까 무서워 인적 드문 강가 수풀에 쌌다. 참고로 겁 많은 남자는 고추도 작다는 속설이 있다. 그냥 그렇다고. 내가 그런 건 아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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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는 살가운 태국 처자들, 뒤엔 새침한 일본 처자




보트 탑승 후 처음 5분간은 후회했고, 그다음 30분은 짜릿했고 나머지 시간은 평온했다. 타자마자 굉장한 소음과 맞바람, 개 같은 승차감으로 후회가 똬악. 특히 소음은 아주 지랄맞았다. 소음에 약한 건 내 장애 때문이다. 나는 가는귀를 먹었다. 어릴 적 이어폰의 과다사용 때문이다. 가는 귀가 먹었으면 오히려 큰 소리에 둔감할 것 같지만, 오히려 남들보다 소음에 더 약하다. 어디선가 둘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 가지 장애가 더 있는데 안면인식 장애다.


안면인식 장애는 조금 심각한데… 여러 번 인사드렸던 친구 부모님 얼굴을 기억 못 해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눈을 마주쳤을 때도 쌩깠고, 엉뚱한 사람에게 아는 척 한적도 수차례. 한 번은 교정기 끼고 나온 여자 동창생을 못 알아봐 "쟤는 누구야?"라고 물었다가 동기들에게 한참을 까였다.


5분 정도 지나자 슬슬 승차감도 익숙해지고 보트도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소음은 그냥 포기. 텡!텡!거리며 메콩 물살에 마빡을 찧으며 나아가는 보트가 꽤 재미졌다. 처자들은 좋다고 난리다. 기분 좋아진 태국 처자들이 바나나며 과자며 나에게 막 퍼주었다. 헤헤, 굽신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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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톳빛 누렇게 뜬 얼굴로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는 메콩강. 메콩강에 대한 첫인상은 의뭉스러움, 시큰둥함 같은 것이었다.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사람 같은 메콩강을 보면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다.




메콩강을 바라보니 문득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생각이 났다…라고 내 여행일지에 적혀있다. 무슨 감정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을 못 하겠다. 다만 미루어 짐작컨대 이런 걸 거다.

떠돌아다니는 지금이 좋다. 참 좋다. 그야말로 좆나 좋쿤!! 그러니, 언젠가는 망하더라도(내가 됐든 이 세계가 됐든) 지금은 제발 죽지 말고 망하지 말자. 현재가 너무 좋으니까. 여기서 지금이란 한 1년쯤을 의미하는 건가? 모르겠다. 그것보다는 좀 짧은 것 같다. 그다음에는 신께서 알아서 하시라. 각설하고, Apocalypse, not now!



가면서 보트가 자주 고장났다. 20대 초반쯤 되어보이는 사내놈이 운전사였는데 종일 담배를 물고 있었다.


하도 고장 나길래 내가 물었다.


"고장 남?"


"예스,예스!"


"고칠 수 있남?"


"예스,예스!"


“수리 안될 거 같은데..."


"예스, 예스!"


"장난하는겨?"


"오~ 예스, 예스!"


이런 식이니 그냥 멍하니 고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짜식, 랜치며 도라이버를 바꿔가며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영 신통찮았다. 결국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완전히 멈췄고 뒤따라오는 다른 보트에 연결해 끌려가듯 겨우 갔다. 이 때문에 일본 처자는 조금 쌜죽해져 있었다. 그 모습이 안돼 보여 과자라도 주고 싶었는데 배낭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배낭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니 배가 고파졌다. 하루 종일 앉아있기만 했는데도 허기졌다. 갑자기 타마삿 대학 구내식당이 생각났다. 방콕에 있을 때 아침에 주로 이용했던 천 원의 행복. 닭고기덮밥, 튀김고기덮밥, 옐로커리, 야채볶음, 짧은교복…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았다.



혹여 빠른 보트를 탈 계획이 있는 님들을 위한 팁 하나. 긴팔, 선글래스, 모자는 필수다. 햇볕 때문이다. 쾌속 보트에는 당연히 그늘이 없다. 최소 여섯 시간은 햇볕에 계속 노출돼야 하는 상황. 다행히 나는 모자가 달린 얇은 윈드스토퍼가 있기에 망정이지 그거 없었으면 하루 만에 토인 될 뻔했다. 얼굴 타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3가지 중의 하나. 지금은 간이 안 좋은지 얼굴이 거무튀튀해졌다. 매일매일이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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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에 쉬어가는 간이 선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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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잦은 보트 고장으로 예정보다 훨씬 늦게 도착. 내려준 곳도 목적지가 아니어서 트럭 뒤에 타고 한 시간은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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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졌는데도 아직 메콩강을 떠돌고 있었다. 결국 고장 난 보트로는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중간에 내렸고, 급하게 트럭을 불러 한 시간을 타고 간 뒤에야 루앙프라방에 입성했다. 어찌 되었건 좋았다. 보트도 트럭도. 문제는 트럭에서 내릴 때쯤 발생했다.


태국 처자들이 나와 일본 처자에게 말한다.


"저기… 보트 운전사가 종일 수고했는데 팁 좀 모아서 주는 게 어때요?"


새침했지만 그래도 일본인 특유의 안면 웃음을 띠고 있던 일본 처자, 갑자기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급정색한다.


"오늘… 예정보다 많이 늦었고… 이미 보트비는 지불했고…쏼라쏼라..맥도나르도~"


랩으로 쏟아붓는데, 결국 싫다는 거다. 태국 처자 2명의 안색이 살짝 불편해진다. 나는 태국 처자들 편. 그녀들이 나한테 바나나도 줬고, 돈도 막 쓰고 싶었다. 며칠 전에 월급이 입금되어 무척 제너로우스한 상태였으니까.


3대 1로 티격태격하다 각자 100바트씩 내서 팁을 주기로 합의 봤다. 태국 처자들과 일본 처자의 말다툼은 짧지만 살벌했다. 나는 한쪽 편에 붙어 추임새만 넣었고. 결국 세 처자 마음 상한 채로 어색하게 헤어졌는데 그 모습들이 귀여워서 당장 함께 호텔로 가서 포썸으로 풀자고 할 뻔했다. ㅎㅎ



트럭에 올라 일본 처자에게 빌린 라오스 가이드북을 보니 조마 베이커리 근처에 숙소가 많다고 하여 그리로 가기로 했다. 조마 베이커리 근처에 내려 골목 초입에 제일 먼저 보이는 게스트하우스 new daraphet villa로 들어갔다. 외관부터 럭셔리해서 잠깐 쫄았는데, 더 이상 알아보는 게 귀찮기도 하고 돈도 막 쓰고 싶어 바로 정했다. 하루 숙박비는 18만 5천낍이었다. 달러로 22달러인가 낸 것 같다. 역시나 비쌌다.


숙소를 잡고 침대로 점핑하며 누우려는 순간, 으아악!


손바닥만한 거미새끼 한 마리가 침대 옆으로 스윽 지나가는 거다. 웬만하면 잡겠는데 너무 커서 덜덜덜. 색깔이 거무틔틔하고 빨간 점들이 박혀있는 게 독거미일 것 같아 후덜덜덜. 정신을 차리고 노트를 꺼내 내려치려는데 그새 욕실로 도망갔다. 나도 카운터로 도망가 직원에게 잡아달라고 했다. 카운터 직원이 와서 한참을 찾다가 발견. 날 보고 씩 웃더니 조심조심 휴지로 거미를 감싸 잡고 밖에다 방생해주었다. 직원은 나에게 모든 게 괜찮다고 했는데 거미에게 물려도 괜찮다는 건지 너 같이 겁 많고 고추 작아도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다. 이후에도 그만큼 큰 거미는 못 봤는데, 지금은 징그러운 그 거미조차 그립다. 그리고, 직원분님! 죽이지 않고 방생해 줘서 고맙습니다~



조마베이커리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야시장이 나온다. 매일 밤 야시장이 열렸는데 규모가 꽤 컸다. 조악하기는 해도 재미난 물건들을 팔았다. 코브라 담금주 같은. 야시장 초입의 조그만 골목길로 들어서면 만낍부페 (우리돈 1500원?)가 있다. 포장마차에 진열해놓은 각종 반찬을 큰 접시에 담아 먹을 수 있다. 생선이나 고기 바베큐 등은 가격을 따로 받는다.


허기진 탓에 대충 사람들 틈에 껴서 코를 박고 먹고 있는데 정수리에 느껴지는 친근한 눈길. 내 바로 앞에서 한국인 남자가 거지처럼 먹고 있는 나를 보고 있다. 입 안의 밥알을 내뿜으며 인사를 했는데도 인자한 미소를 보내길래 자리를 옮겨 함께 맥주를 마시고 비누를 주었다.(이건 농담!!!) 알고 보니 숙소도 같았다. 아쉬운 것은 내일 아침 비엔티엔으로 떠나 한국으로 간다는 것. 자기는 루앙프라방이 좋단다. 그러고 보니 한국사람들, 특히 젊은 한국 처자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루앙프라방의 어떤 면이 처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십여 분간만 돌아다녀봐도 대충 그 이유를 알 것 같긴 했다. 맨날 인터넷과 방송에서 귓구녕에 쑤셔 넣는 말, '갬성'이 많은 도시라는 거겠지. 감성 타령 솔직히 지겹다.



오늘 마신 비어 라오, 다크 비어 라오는 정말 죽여줬다. 동남아는 맥주 선진국이다.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맥주 모두 다 맛있다. 일단 맥주마다 각자 개성이 있다는 게 제일 장점. 한국 맥주의 오줌 맛도 개성이라면 할 말 없다만. 특히 비어라오는 첫맛은 부드럽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는 톡 쏘는 찰진 맛이 퍼지는게 특징. 훗날 국경에서 만난 독일 아재가 본토 독일 맥주보다 비어라오가 더 맛있다며 너스레를 떨 정도였다.



약간 취한 채로 야시장 한국남과 헤어지고 숙소에 들어와 누웠다. 평소 같으면 샤워 한판으로 정신 차린 뒤, 좀비처럼 밤거리를 헤맸겠지만 오늘은 몸도 조금 힘들고 외롭다는 생각도 들고… 숙소도 너무 좋아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자다가 보트 운전사 팁 문제로 삐져있던 일본 처자 얼굴이 떠올라, 조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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