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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낙원 2 10화

40 우화 4

by 아무




윤희의 생일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때문에 다른 연회보다 성대하게 열렸다.

윤희의 생일을 기념하며, 거기에 더하여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까닭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올해 윤희의 생일 연회는 더욱더 성대하게 열렸다.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생일을 하루 앞두고, 서재에서 책을 읽던 윤희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닫힌 창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그 편지는 윤희의 눈앞에서 살포시 책 위에 내려앉았다.

펼쳐진 책 위에 올라앉은 수상한 편지를 보고 윤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서천은 편지를 보내는 일이 드물다.

명주만 있으면 어지간한 소통은 다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사자의 부름’을 받은 서천인이 보내는 연회 초대장.

그러나 지금 윤희가 손에 든 편지는 그것과 외양부터 사뭇 달랐다.

서천의 것이 아니다.

봉투에 찍힌 붉은 인장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윤희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다스리며 봉해진 검은 봉투의 입구를 뜯었다.

먹색 종이에는 하얀 글자로 생년월일과 이름, 그리고 붉은 글씨로 내일 날짜와 시간만 적혀 있다.

윤희는 그것을 몇 번이나 읽었다.

찬찬히 숫자 하나하나, 한 글자 한 글자를 곱씹으며 반복해서 읽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이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 윤희에게도 끝내 명부의 날이 찾아왔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그날이 오고야 만 것이다.

‘사자의 부름’, 이것이 연회가 더욱 성대하게 열리는 다른 이유였다.

서천에는 ‘사자의 부름’이 명부 하루 전에 도착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루 동안 여유 시간이 주어졌다.

마치 작별 인사를 나누라는 듯 말이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황망해진 윤희는 책상 앞 의자에 그대로 붙박였다.

하긴 갑작스럽지 않은 사자의 부름이 어디 있을까.

윤희는 편지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서재 책상 위에 쌓인 책들이 윤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연월과 이담이 선별해 준 책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당당히 위용을 자랑하는 책 한 권이 눈에 띈다.

단연 돋보이는 그 책은 이담이 적극 권장한 <초심자를 위한 도원 생활 백서>였다.

이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거친 손길로 펼쳐진 그 책을 덮었다.

쿵.

크기만큼이나 무거운 소리가 서재 안을 울렸다.

윤희는 편지를 손에 들고 무거운 발을 억지로 움직여 서재를 빠져나갔다.

‘연월과 이담은 알고 있을까? 알고 있겠지?’

주방의 식탁으로 가 앉은 윤희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해야 할 일.

‘초대장을 보내고 연회를 준비해야 해. 내일이 내 생일이니 마침 잘 됐어.’

…… 삐이이이.

귀에 이명이 들리고 머릿속이 어지럽다.

어쩐지 속까지 거북한 느낌이다.

한바탕 소란스럽게 들끓던 생각들이 순식간에 싹 가라앉고 이명도 차츰 사그라들었다.

윤희는 머리가 텅 빈 채로 고요 속에 앉았다.

똑! 똑! 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윤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문 밖에는 연월과 이담이 서 있었다.

둘의 표정이 이미 대답하고 있다.

소식을 듣고 왔노라고.

윤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월과 이담도 예상치 못한 소식에 윤희 곁에 앉아 그저 가만히 기다릴 뿐이었다.

이제 고요 속에 셋이 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이담이 겨우 입을 열었다.

“미안해, 널 그냥 자유롭게 두었어야 하는데.”

“…… 아니요. 그게 제 운명이었는걸요.

정리가 끝났다.

윤희는 겸허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한경에서 도망친 것도, 서천에 온 것도, 제가 반쪽짜리 정령인 것도, 두 분의 가르침도, 도월이 낸 불을 끈 것도, 꽃밭을 되살린 것도, 모두 제 인생이고 제가 선택한 삶이잖아요. 그러니 후회하지 않아요.”

환희 웃는 윤희의 얼굴에 안도와 실망이 뒤섞여 있다.

“이제 저도 다른 서천인들과 같아졌네요.”

그 환한 얼굴이 애잔해 이담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 날, 윤희의 생일 아침이 밝았다.

윤희의 집은 아침부터 북적였다.

날씨는 무척이나 쾌청했고 바람도 적당히 불었다.

연회는 저녁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서천인들은 한마음으로 이르게 모였다.

수련과 혜석, 나주는 주방에서 점심 식사와 만찬을 위한 음식을 준비했고, 홍윤은 명옥과 인현, 재문의 도움을 받아 응접실에 간이 의상실을 만들고 모두의 예복을 준비했다.

서인과 재일, 태운은 마당의 풀밭으로 식탁과 의자, 보조 탁자 등 연회에 필요한 가재도구를 옮겼고, 나예와 고은, 태화와 영휴는 마당을 장식했다.

명아와 신효는 바깥 화덕과 화로에 불을 피웠고, 어린 산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쪽저쪽을 오가며 일손을 도왔다.

그리고 연월은 부지런히 움직이는 서천인들이 오며 가며 목을 축일 수 있게 수시로 여러 종류의 차를 우려 식혀 두었다.

이담도 일찍 와서 일손을 도우려 했으나 모두에게 거절당하고, 함께 놀고 있는 랑과 수류를 보살폈다.

윤희는 서재를 정리하고 나와 문 앞에 서서 그들의 모습을 눈에 새겼다.

참 신기하다.

서천 바깥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이곳에 모인 저 사람들이 여태 타인을 위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도리어 그 마음을 더 깊이 품고, 서로에게 베풀며 지내는 저 모습이.

윤희는 저 또한 고초를 겪은 탓에 타인에게 호의적이지 못했다.

아버지, 그리고 몇몇을 제외한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그러나 서천인들의 한없이 너그러운 마음을 윤희는 보았다.

또 그 마음을 나누어 받았다.

저는 품지 못한 그 마음을.

이따금 그러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자신의 일부였다.

이런 저를 서천인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 감사함이 이제야 가슴에 사무친다.

새삼 이들을 만나 참으로 복된 날들이었다고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깨달았다.

윤희는 연월이 우린 차를 한 잔 마시고 주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난밤, 고민 끝에 준비한 선물의 마무리 작업이 남았기 때문이다.

손재주가 없는 윤희는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요리, 밤 조림을 선물로 준비했다.

연월과 이담이 돌아가고 마음을 충분히 추스른 다음, 윤희는 곧장 숲으로 가 밤을 주웠다.

그리고 저녁 내내 껍질을 까고 조린 밤을 밤새 식혔다.

이제 작은 병에 소분하여 담는 일만 남은 상태다.

그 일을 위해 윤희는 이미 수련에게 내어준 주방으로 발을 옮겼다.

주방에는 저녁 만찬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고, 식탁 위에는 벌써 점심 식사로 먹을 음식들이 마지막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희는 조리대 옆에 있던 커다란 솥을 주방 한쪽 구석에 놓인 작은 탁자로 옮겼다.

이어 경혜가 떠나던 날 나누어 주었던 병보다 두 배로 큰 유리병에 밤 조림을 떠 담았다.

창가 선반에 밤 조림이 든 유리병이 차곡차곡 쌓인다.

수량에 맞춰 병에 다 담고도 솥에 담긴 밤 조림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다 같이 간식으로 먹어도 충분하겠어.’

윤희는 중간 크기의 그릇 다섯 개에 남은 것을 소복이 나누어 담았다.

바닥을 긁어 담느라 손에 뭍은 양념을 핥으며 마지막 그릇까지 식탁 위에 내려놓고, 윤희는 창밖으로 보이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반갑게 인사하며 생일을 축하해 주었지만 새해의 복을 빌어 주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윤희에겐 내일이 없었으니.

윤희는 조용히 주방을 빠져나와 숲의 경계에 선 이담의 곁으로 다가갔다.

랑과 수류는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나란히 엎드린 둘 사이에 윤희가 바짝 다가가 철퍼덕 주저앉더니 한 손으로는 랑을, 다른 한 손으로는 수류를 쓰다듬었다.

랑은 말할 것도 없고 수류까지 윤희의 선선한 손길을 느끼며 열을 식혔다.

어느새 연월도 그 자리에 합류했다.

“아아, 정말 아쉬워요.”

윤희가 뒤에 선 둘을 돌아보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정말 멋진 정령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렇죠?”

“그래. 하지만 넌 이미 어엿한 정령이야. 네 혼자 힘으로 꽃밭을 살렸잖아.”

“그래, 맞아.”

이담의 말에 연월이 맞장구쳤다.

랑이 작별의 기류를 읽었는지 머리를 들어 윤희에게 들이밀고 칭얼대듯 그르렁거렸다.

그러자 수류도 랑을 따라 머리를 들이밀고 낑낑거린다.

“너와는 친해지자마자 이별이네. 랑은……, 랑…….”

윤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말소리가 끊어졌다.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만 것이다.

흑, 흐윽, 흐끅.

랑의 머리 위로 떨어진 눈물이 털을 타고 미끄러져 내린다.

랑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콧잔등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핥아먹었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흐느끼는 윤희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 목을 길게 빼고는 살며시 뺨을 핥아 눈물을 닦았다.

랑의 행동을 따라 하기 좋아하는 수류도 윤희의 반대쪽 뺨을 핥기 시작했다.

흐흑, 아흑, 아윽, 어푸푸.

어느새 윤희의 얼굴이 둘의 침으로 범벅이 되었다.

서글피 울던 윤희는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그만! 그만, 얘들아!”

눈물이 쏙 들어갔다.

“꺄아학, 그만!”

윤희가 바닥에 고개를 파묻고 몸을 한껏 웅크렸다.

그러나 랑과 수류는 멈추지 않고 코를 들이밀면서 장난을 이어나갔다.

참으로 한가롭고 즐거운 한때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윤희는 실컷 웃었다.

마음껏 펑펑 울지 못한 대신에 실컷 크게 웃었다.

웃다 지친 윤희는 풀밭 위에 그대로 드러누워 가만히 눈을 감았다.

속이 후련하다.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 것처럼 나도 똑같이 죽는 거야. 그거면 된 거야. 그렇고 말고.’

윤희가 벌떡 일어나 앉자 연월과 이담이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윤희는 둘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른 연회의 시작을 위하여.

어둠이 깊어졌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는 뜻이다.

저녁 만찬은 언제나 그랬듯이 풍성하고 즐거웠다.

윤희의 생일을 축하하고 새해의 복도 기원했다.

서천은 딱히 복을 빌지 않아도 평안한 날들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큰 의미 없는 형식적 의례에 가까웠지만, 서로의 복을 비는 마음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윤희도 그들을 위해 한없는 복을 빌었다.

사바의 시계가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졌다.

윤희는 서둘러 준비한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모두가 예상한 그것이었다.

“제가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간식으로 먹었던 밤 조림이에요. 이걸 먹는 동안만큼은 저를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윤희는 활짝 웃었지만 서천인들은 활짝 웃지 못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애써 웃어주려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중 윤희와 특히 가까이 지내던 수련이 무척이나 애처로워 보였다.

수련은 윤희의 손을 잡고 끝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울린다.

홍윤을 끝으로 작별 인사가 끝났다.

“여러분, 모두 안녕!”

윤희는 두 손을 흔들며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있는 힘껏 활기차게 인사했다.

그리고 연월과 이담의 손을 잡고 꽃밭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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