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2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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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우화 3

by 아무 Mar 20. 2025



똑, … 똑.

문소리가 힘겹게 울린다.

그러나 집 안에서 응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똑! … 똑!

윤희는 남은 힘을 짜내어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누구……!!”

문을 열고 나오는 연월이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어제만 해도 멀쩡하던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졌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하하.”

윤희는 그저 웃었다. 대꾸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리가 무거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오른 다리를 억지로 들어 올리자 왼 다리에 힘이 풀려 꺾여 버렸다.

몸이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진다.

풀썩.

연월이 윤희를 잡으려다 물러섰다.

랑이 나타나 먼저 윤희를 받쳐 주었기 때문이다.

윤희는 넘어진 김에 랑의 등에 기대어 잠시 휴식했다.

“흐으.”

부드러운 털에 푹 파묻힌 윤희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모습을 본 연월은 한숨을 내쉬고 말없이 주방으로 가 차를 준비했다.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멎고 연월이 랑을 호출한다.

“랑.”

주인의 부름에 랑이 윤희를 등에 싣고 주방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주방 입구에 이르자 달콤한 냄새가 솔솔 풍긴다.

윤희는 달콤한 향을 맡자 입에 침이 고이고 허기가 밀려왔다.

“흐억, 배가……, 배가 고파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연월은 주방에 들어선 랑의 등에서 윤희를 일으켜 세운 다음 의자로 옮겨 앉혔다.

“우선, 이거라도 먹어.”

식탁 위에는 따끈하게 데운 식혜와 사과 정과가 놓여 있었다.

윤희는 따끈하고 달콤한 식혜로 먼저 속을 데우고, 꿀에 조려 단맛이 더해진 상큼한 사과 정과로 기력을 보충했다.

“아아,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식혜를 두 잔 더 비운 윤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꽃밭에서 뭘 했기에.”

연월은 윤희의 상태를 보고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그게. 하하.”

윤희가 멋쩍게 웃었다.

“물웅덩이부터 없애 보려고 했는데……. 역시 아직 혼자서는 무리인가 봐요.”

“당연하지.”

연월이 지그시 윤희를 바라봤다.

“꽃밭이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르니까.”

“그렇지만 도월 나리는 한 번에 했잖아요.”

기력 회복과는 별개로 윤희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도월과 너는 달라.”

연월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도월 나리는 이제 완전한 신이 되었는데, 저는 반쪽짜리 정령일 뿐이니까.”

윤희의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고된 경험 후 심신이 지친 윤희였다.

회복이 덜 된 상태로 꽃밭에서 무리한 탓인지 평소보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졌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쾅, 쾅, 쾅.

그때, 누군가 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연월은 슬쩍 윤희의 눈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을 빠져나갔다.

“여어, 좀 늦었지. 이 녀석이 자꾸 따라와서.”

쾌활한 이담의 목소리가 주방까지 전해졌다.

‘이 녀석?’

윤희는 궁금증이 일어 현관으로 나갔다.

랑이 그 뒤를 따랐다.

왕!

개가 짖는 소리에 귀가 얼얼하다.

‘서천에 웬 개가?’

윤희는 의아한 눈으로 이담과 커다란 개를 번갈아 보았다.

“그날 봤지?”

“그날이요?”

윤희의 궁금증이 더욱 깊어졌다.

“못 봤던가?”

이담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바림 숲에 사는 수류견인데, 아직 어려서 그런지 외로움을 많이 타나 봐. 혼자 있는 걸 싫어해서 데려왔어.”

이담의 설명을 듣고도 윤희는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개를 제가 본 적이 있나요?”

“도월이 왔던 날, 랑과 함께 일행을 지키고 있었는데……. 하긴, 그날은 주변을 돌아볼 정신이 없었지.”

이담이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아, 그랬군요.”

윤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갸웃거렸다.

황소만 한 개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낸 탓이다.

“어디 아픈가 봐요.”

“아니, 랑이랑 놀고 싶어서 그래.”

“랑이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뒤에 선 랑을 보니 어쩐지 시큰둥한 반응이다.

“아무래도 자기 형제쯤으로 생각하나 봐.”

호오. 윤희는 신기하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랑, 수류랑 좀 놀아 줘.”

이담이 랑의 등을 쓰다듬었다.

랑은 마지못해 앞발을 척척 내딛고 기지개를 한 번 쭉 켜더니 문 밖으로 나가 높이 뛰어올랐다.

이어 숲 속을 향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류도 랑을 놓칠세라 쏜살 같이 달려갔다.

“자, 그럼 우리도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눠 볼까?”

셋은 현관에서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담이 먼저 수련에게 받아온 간식을 꺼내고, 연월이 차를 끓였다.

짭조름하게 구운 폭신한 밀 과자와 향긋한 매화차가 또 윤희의 입맛을 당겼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윤희가 과자를 집으며 둘의 눈치를 보고 쓱 던지듯 말했다.

“우리 말고 네게 있을 텐데?”

이담에게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제가요?”

“응.”

이담이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손에 들었다.

윤희는 우물거리던 과자를 삼키고 매화차로 입을 헹궜다.

이어 짧게 고민한 뒤 말을 꺼냈다.

“음……. 오늘 꽃밭에 갔어요. 도월이 말한 대로 제가 꽃밭을 살려 보려고요. 그런데 아직 혼자는 힘들 것 같아요.”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이내 멈추고, 마침내 다짐한 듯 말을 이었다.

“도와주세요.”

윤희는 연월과 이담을 번갈아 보았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도와야지.”

이담은 더욱 확실한 응답을 주기 위해 호탕하게 소리 내어 말했다.

조금 전 불현듯 밀려왔던 불안이 살그머니 빠져나갔다.

“하지만 우리는 조언만 해 줄 거야. 꽃밭을 살리는 건 네 몫이니까. 그렇지, 연월?”

“맞아. 네 힘으로 꽃밭을 살리려면 앞으로 단련에 더욱 힘써야 해.”

“에엑!”

이번에는 종류가 다른 불안이 찾아왔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었다.

“으……아, 더는……, 못해.”

털썩.

윤희가 꽃밭 한가운데에 주저앉았다.

개울 속을 들여다보던 연월이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났다.

“벌써 기력이 바닥났군.”

무심한 연월의 얼굴이 윤희는 썩 반갑지 않았다.

꽃밭의 물웅덩이가 번식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없애도 없애도 끝이 없다.

게다가 연월과 이담은 조언만 한다더니 정말로 옆에서 말로만 도왔다.

물론 효과가 있긴 했다.

기의 가동 범위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반복 훈련을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휴식……이요.”

윤희는 말할 힘도 없었다.

“많이 지친 것 같은데, 점심을 일찍 먹도록 할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좋아요, ……그게 좋겠어요.”

윤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세우고 일어나 연월이 내민 손을 잡았다.

둘은 수련의 집으로 이동했다.

“수련, 저, 왔어요.”

“세상에,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니?”

“……하하.”

수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건네는 말에 윤희는 대꾸할 기력이 없어 그저 웃었다.

“그래서 그런 부탁을 했군요?”

수련이 연월을 향해 말하며 혼자 납득했다.

“이것부터 먹으렴.”

수련은 주방 식탁에 윤희를 앉히고 호박을 넣어 끓인 타락죽을 먼저 내왔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죽이 들어가자 윤희는 고단했던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어 채소 절임을 곁들인 구운 닭과 더덕구이, 녹두죽을 먹고, 후식으로 도라지정과와 배화채까지 싹 비웠다.

“으아, 이제 그만. 더는 못 먹어요.”

윤희는 항복을 선언했다.

“이미 다 먹어 놓고선.”

수련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다 먹었으면 이만 일어날까.”

달콤한 휴식 시간이 끝났다.

연월은 윤희의 안색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오후 훈련을 입에 올렸다.

“그럼 저녁도 부탁해요, 수련.”

윤희는 이 말을 남기고 다시 꽃밭으로 홀연히 떠났다.

‘꽃밭 살리기’라는 이름의 훈련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다.

명문을 중심으로 흐르는 기를 손끝으로 천천히, 또 빠르게 내보내기를 반복한다.

이어 곧게 뻗어 나갈 수 있게 힘을 정형화하기도 하고 부드럽게 굽은 곡선을 그리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가 흙밑을 꿈틀대며 다닌 덕에 윤희는 그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훈련을 거듭할수록 자신의 조력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자들인지를 뼛속 깊이 체감하게 되었다.

드디어 마지막 물웅덩이를 제거했다.

무려 열흘 만에 이룬 쾌거였다.

“후우.”

윤희는 만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긴 숨을 내뱉었다.

“축하해. 고생했어.”

어느새 이담이 곁에 다가와 노고를 치하해 주었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볼까?”

“지금이요?”

이제는 처음처럼 녹초가 될 만큼 지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피로가 쌓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조금만 쉬고 하면 안 될까요?”

“한 번만 더 하고 쉬는 게 어때?”

이담은 부드러운 말투로 권했지만 윤희는 거부할 수 없었다.

“……네.”

윤희에게 새로 주어진 과제는 땅 속에 살아 있는 뿌리 찾기였다.

얇고 넓게 기를 고루 퍼뜨려 탐지를 시작했다.

물웅덩이를 제거하는 일이 기를 던지고 물을 낚아 끌어당기는 단순한 작업이었다면, 살아 있는 뿌리를 탐지하는 일은 조금 더 섬세한 힘 조절과 날카로운 감각이 필요했다.

그만큼 체력과 집중력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흐억, 헉.”

윤희는 며칠 만에 또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벌써 지친 거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고 점심 먹자. 내가 미리 도시락도 받아왔어.”

이담은 곁에서 지켜보다 수련의 바구니를 들어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이 지독한…….’

윤희는 처음으로 이담이 미웠다.

쓰읍, 후우.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쉰 다음, 윤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다시 한번 땅 속으로 넓게 기를 퍼뜨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손끝의 감각에 집중했다.

몸은 지쳤으나 감각은 전보다 민감하다.

손끝으로 희미한 호흡이 전해졌다.

생명력이 꿈틀거린다.

그곳에 약간의 힘을 보태어 주었다.

뿌리에서 가느다란 줄기 하나가 위로 몸을 늘린다.

흙 위로 머리를 빼꼼 내밀고 다시 위로, 위로 자란다.

아주 작은 잎사귀가 기지개를 켰다.

새싹이 돋아난 것이다.

“잘했어.”

이담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 움튼 새싹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윤희의 어깨를 토닥이며 칭찬했다.

윤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다.

이담은 그런 윤희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개울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폭신한 천 위에 수련이 싸준 정성 가득한 도시락을 꺼내어 두고, 윤희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옆에 앉아 기다렸다.

윤희가 입을 뗀 건 한참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주, 죽는 줄 알았네……. 그래도, 해냈어요!”

수척해진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그래, 고생한 보람이 있지?”

“네!”

“꽃이 금방 만개하겠는 걸.”

이담의 예측은 정확했다.

사바력으로 한 달 보름 만에 서천의 꽃밭은 제법 이전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한경에 새해가 찾아올 무렵에는 꽃밭 전체에 꽃이 완전히 만개했다.

그리고 윤희의 생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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