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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낙원 2 08화

38 우화(羽化) 2

by 아무


윤희는 연회실에 가다 말고 문틈으로 방안을 살폈다.

이담과 혜석이 마주 앉아 있다.

이담이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몇 마디 중얼거리자 혜석의 표정이 차츰 몽롱해진다.

혜석의 머리 위로 이담이 두 손을 뻗자 화첩 같은 것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낡은 화첩의 표지가 펼쳐지고 책장이 주르륵 넘어간다.

혜석의 기억이 그려진 화첩이었다.

이내 책장이 멈추었다.

활짝 펼쳐진 화첩의 양면은 그림이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다.

언뜻 보아도 어둡고 황량하다.

하늘은 검고 산은 뾰족하며, 강물은 탁하여 속이 비치지 않고 나무는 비쩍 말라 생기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화첩 속 그림은 저승의 풍경이었다.

생기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윤희는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을 더듬으려다 우선 눈앞의 광경부터 관찰했다.

화첩에 그려진 저승 풍경이 이담의 손길에 따라 조심스럽게 벗겨져 나온다.

화첩의 양면은 이제 텅 비었고 저승의 풍경은 공중에 떠 있다.

이담이 다시 낮게 읊조렸다.

화첩에서 벗겨져 나온 그림이 화르륵 불에 타 재도 남기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

이어 혜석의 기억이 그려진 화첩이 고이 덮인다.

이담이 한 번 더 주문을 외우자 화첩이 스르륵 사라졌다.

호오.

윤희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곧이어 몽롱했던 혜석의 표정이 원래대로 또렷하게 돌아왔다.

“수고했어.”

“이담이야 말로 고생 많았어요.”

혜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밖으로 나온다.

혜석과 눈이 마주쳤다.

“윤희, 일어났구나.”

“네, 하하.”

윤희는 괜히 몰래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어 어색하게 웃었다.

“연회실로 옮길 거니?”

윤희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 봐.”

윤희의 마음을 읽었는지 혜석이 그릇을 받아 들고 고갯짓 했다.

“제가 일부러 훔쳐보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괜찮아.”

혜석은 어깨를 으쓱하고 곧장 연회실로 들어갔다.

“혹시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윤희는 응접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방해는 무슨. 마침 다 모였길래 기억을 정화했어.”

이담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기억을 정화했다고요?”

“응.”

이담이 윤희를 향해 싱긋 웃었다.

“쉽게 말해 저승에 갔던 기억을 지웠다는 뜻이지.”

“그걸 꼭 지워야 하나요?”

“사실, 꼭 지울 필요는 없어.”

이담이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저들이 서천에 있는 동안에는 즐거운 기억만 가졌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내 욕심 때문이지.”

“그렇군요.”

윤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역시 이담은 자애로운 신이에요.”

“미안하지만, 난 완전한 신이 아니란다.”

이담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서천의 만찬은 언제나 즐겁고 풍요로웠지만 이번 만찬은 더욱 그랬다.

예상치 못하게 마음이 고된 일을 함께 겪었기 때문일 터이다.

모두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윤희도 그들 사이에 끼어 이 감격스러운 순간을 한껏 즐겼다.

참고로, 윤희가 저승의 풍경을 보고 익숙하다 느꼈던 이유는, 만찬이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눕고 나서야 떠올랐다.

한경의 저잣거리, 그때는 몰랐지만 윤희에겐 그곳이 저승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윤희는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장 꽃밭으로 갔다.

윤희에겐 아직 숙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꽃밭을 가꾸는 일.

도월이 망친 꽃밭을 되살려야 한다.

아직 곳곳에 물웅덩이가 남아 있다.

‘우선 물부터 걷어 내자.’

윤희는 가장자리와 가까운 웅덩이로 가 물을 들어 올렸다.

뭉친 물방울이 얼굴만 하다.

윤희는 커다란 물방울을 두 손으로 받치고 개울을 향해 걸었다.

가까운 길을 까먹고 먼 길을 택하고 만 윤희였다.

한참을 걸어도 개울이 가까워지지 않는다.

‘너무 멀어……!!.’

아차차.

“명주야!”

휘릭.

명주가 눈앞에 나타났다.

“개울, 개울!”

머지않아 개울가에 도착했다.

“명주 너를 잊다니.”

윤희는 대폭 줄어든 거리에 만족하며 하나씩 웅덩이를 비워 나갔다.

그런데 명주의 도움을 받아도 물웅덩이가 끝이 없다.

지평선까지 뻗은 광활한 꽃밭의 절반이나 되는 넓이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윤희는 벌써 지치고 말았다.

“이럴 수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개울가에 앉아 멍하니 빈 땅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도월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월이 꽃밭에 가한 열을 수거하는 모습이.

겉으로는 손바닥을 땅에 대었을 뿐이지만 분명 자신의 기를 내보냈다가 회수했을 것이다.

윤희는 그가 했을 법한 기술을 유추했다.

사실 제 선에서 가능한 방법을 추렸다고 볼 수 있다.

‘일단 해 보자.’

안 되면 그때 다시 방법을 찾으면 된다.

윤희가 그의 동작을 따라 했다.

손바닥을 땅에 대고 기를 흘려보냈다.

최대한 멀리.

그리고 기를 회수하며 모든 수분을 빨아들였다.

기가 빨아들인 수분은 개울로 흘려보냈다.

성공이다.

물론 도월처럼 한 번에 끝내지는 못했다.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아직 저는 수련 중인 초보 정령이 아닌가.

덧붙여 설명하자면, 윤희는 이제 자신을 정령으로 지칭하기로 했다.

혼혈이라도 정령은 정령이니.

그렇지 않고서야 이 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평범한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자부심을 갖고 자신을 더욱 격려해 주기로 했다.

윤희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땅에 손바닥을 대고 기를 멀리멀리 내뻗었다.

이어서 다시 회수.

이 일을 세 번 반복한 뒤, 네 번째로 시도했을 때였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속이 메스꺼워지더니 헛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우욱!”

윤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성취감에 취해 무리한 것이다.

다행히 머지않아 시야가 돌아오고 메스꺼웠던 속도 가라앉았다.

후우.

“오늘은 후퇴야. 더 무리해선 안 돼.”

흐트러진 기를 정리하고 윤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명주! 연월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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