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는 걸음마다 돌아보는 정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검은 선에 발 끝을 대고 섰다.
우연한 만남이기에 더욱 반갑고 기뻤다.
어쩌면 이 만남까지 도월이 계획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윤희는 꽤 만족스러웠다.
물론 꽃밭을 태운 것은 분했지만,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단단히 박혀 있었던 아버지의 안위를 알게 해 주었으니.
심지어 직접 만나 알게 해 주지 않았는가.
만질 수는 없었지만 보는 것 만으로 충분했다.
떠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자니 자신이 떠나온 그 밤이 저절로 떠올랐다.
상황은 서로 바뀌었지만 이별하는 일이 애달픈 것은 매한가지다.
정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담이 윤희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자꾸만 달라붙는 쓸쓸함을 훌훌 털어버리고 윤희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네, 좋아요.”
양쪽에 선 이담과 연월이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수련은 한동안 허공을 껴안은 채로 노래했다.
홍윤도 떠난 이의 손을 놓지 못하고 꼭 잡은 채로 빈자리만 눈에 담았다.
반으로 줄어든 노랫소리는 끝내 목구멍에 걸려 도로 넘어가고 말았다.
저 멀리 꽃밭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비명이 끊어지자 구슬픈 울음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별의 눈물은 곧 환희의 눈물로 바뀌었다.
수련의 품에 안겼던 산이 돌아오고, 홍윤과 손을 잡았던 혜석이 돌아왔다.
나주, 명옥, 인현, 태운, 나예, 재문도 차례로 돌아와 비었던 자리를 채우고 놓았던 손을 다시 맞잡았다.
이담과 연월, 그리고 윤희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머지않은 때였다.
불운하게 떠났던 서천인이 돌아온 일도 놀라웠지만, 자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참혹한 셋의 몰골 또한 참으로 놀라웠다.
“세상에!”
홍윤이 마침내 돌아온 셋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 놀라 소리쳤다.
응접실에 모여 있던 서천인들이 그녀의 놀란 목소리를 듣고 우르르 달려 나왔다.
“무슨 일이죠?”
그들도 셋의 몰골을 보고 홍윤처럼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담이 서글서글하게 웃는다.
“뭐, 이렇게 되었어.”
“다들 괜찮아?”
연월이 묻자 저마다 서로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행이에요.”
윤희가 두 손을 마주 잡고 과장되게 말한 뒤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었다.
“아니 어쩌다가 그런 꼴이 된 거죠?”
산과 손을 잡고 뒤에 서 있던 수련이 셋의 모습을 그제야 발견했다.
이담은 어깨를 한번 으쓱할 뿐이다.
“옷부터 갈아입어야겠어요. 잠깐 기다려 보세요.”
“아니, 다시 가 봐야 해.”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연월은 평소보다 지쳐 보였다.
“모두 무사하니 내일 저녁, 아니 이제 오늘 저녁인가, 다 같이 먹는 게 어때?”
이담이 만찬을 제안했다.
“좋아요.”
“좋죠!”
“찬성이요.”
“좋아!”
당연하게도 모두가 찬성했다. 가장 어린 산까지.
“다들 저녁에 봐.”
연월과 이담은 저녁 만찬을 약속하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럼 저도 이제 산을 재워야겠어요.”
서인이 눈이 가물가물한 산을 안고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다른 서천인들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원래라면 모두 잠자리에 들었어야 할 시간이니 남은 재회의 기쁨을 나중으로 미뤘다.
홍윤의 집에는 윤희만 남았다.
척 보아도 기력이 다 떨어져 흐물대는 모습에 도무지 혼자 돌려보낼 수가 없어 홍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렴.”
“그래도 될까요?”
윤희가 억지로 웃으며 홍윤의 배려를 달게 받았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살면서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큰 힘을 방출한 탓이다.
홍윤은 먼저 욕실로 윤희를 밀어 넣었다.
이어 서둘러 윤희가 갈아입을 옷을 골라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마침 수련이 보낸 바구니가 도착했다.
윤희를 위한 야식이었다.
목욕 후 옷을 갈아입은 윤희가 홍윤을 찾아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크게 기뻐했다.
때마침 허기 진 뱃속에서 천둥이 쳤다.
“바로 잠자리에 들어야 하니 조금만 먹도록 해.”
“네!”
대답과 다르게 윤희는 배불리 먹었다.
수련이 늦은 시간에 먹기 좋은 부드러운 음식을 준비해 준 덕이다.
그녀의 배려로 윤희는 모든 그릇을 싹 비웠다.
목욕 후 개운함과 식사 후 포만감으로 온몸이 나른하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진다.
윤희의 눈이 반쯤 감겼다.
“후후, 어서 들어가 자렴.”
윤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꾸벅 숙이고 손님방으로 가 곧장 누웠다.
연월과 이담에겐 아직 남은 일이 있다.
바림의 숲에 사는 괴물들을 돌봐야 한다.
휘이.
이담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스스스슥.
캄캄한 숲 속 여기저기에서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의가 첫 번째로 줄을 섰다.
헤실헤실 웃으며 약과가 든 주머니를 들고 계속 입을 오물거린다.
“도월이 줬나 보군. 치료하고 먹어. 한 번에 먹지 말고 조금씩.”
이담의 말에도 연의는 입을 쉬지 않는다.
“연의, 움직이지 마.”
연월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배었다.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연의가 입을 합 다물고 가만히 상처 난 얼굴을 내밀었다.
연월의 손길이 스친 볼에는 이제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치료가 끝난 그녀도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거 한꺼번에 먹지 마!”
이담의 외침이 허공을 울렸다.
하아.
이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은 수류였다.
수류의 상처가 가장 심각했다.
랑에게 물린 상처가 깊어 피도 많이 흘렸다.
끼잉, 끼잉.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는 신음소리를 내며 수류가 연월 앞으로 와 앉았다.
“미안. 랑이 아직 어려서 그래. 근데 너도 아직 어리구나.”
바림의 숲에 사는 괴물은 두 부류다.
이담의 손을 타느냐, 안 타느냐.
치료를 받으러 온 괴물들은 당연히 전자다.
그러면 수류가 왜 랑의 공격을 받았는가.
서로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 다 어린 탓에 소통이 되지 않았다.
수류는 숲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간의 기운이 느껴지니 겁이 나 내쫓으려 했고, 반면에 랑은 연월의 부탁으로 그 인간들을 지켜야 했다.
그러니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괴물을 향해 랑도 앞뒤 재지 않고 돌격했다.
연월은 수류의 깊은 상처를 치료하며 대신 사과했다.
보아하니 이미 둘의 서열 정리도 끝난 상태였다.
당연하게도 신수가 우위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인지 수류는 치료가 끝난 뒤에도 숲 속 보금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랑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 사이 연월은 날벌레 떼와 백사, 선속, 황조의 치료까지 마쳤다.
이제야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수류가 랑에게서 떨어지질 않는 것이다.
랑을 따라 연월의 집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따라오면 안 돼!”
연월이 단호하게 명령하자 수류는 귀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독립해서 외로운가 보네. 내가 데려갈게.”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담이 안타까웠는지 수류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불시에 목줄을 채웠다.
괴물들이 훈련할 때 쓰는 목줄이었다.
결국 수류는 이담의 집으로 끌려갔다.
‘어제의 일이 꿈만 같아.’
윤희는 눈을 뜨자마자 이제는 여러 번 묵어 익숙해진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홍윤의 집에서 눈을 떴으니 꿈은 아니리라.
어젯밤에는 눕자마자 피로로 곯아떨어졌다.
그 탓에 이제야 깨달은 점이 있다.
바로 자신의 가능성이다.
윤희는 어머니가 정령인 탓에 여느 서천인과 달랐다.
그러나 언제가 될지 모르는 명부의 날을 기다리는 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기의 흐름을 익히고, 조절하는 법을 배우고, 서천과 도원에 관한 지식을 쌓아야 하는 이유를 반은 이해하면서도 반은 납득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젯밤의 일을 되돌아보니, 연월과 이담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윤희는 제 몫을 해냈다.
그렇다고 자부한다.
그간의 고된 수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윤희는 약간 고양된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서천에서는 자신이 꽤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또 어쩌면 여느 서천인과는 다르니 연월과 이담처럼 이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기대와 희망이 피어올랐다.
윤희는 고조되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앉았다.
‘어쩌면, 어쩌면…….’
똑똑.
“일어났니?”
익숙한 목소리가 문틈으로 들어왔다.
“네!”
때마침 부르는 소리에 활기차게 대답했다.
“잘 잤나 보구나.”
수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찍 오셨네요.”
“응, 네가 여기 있으니까. 점심도 같이 먹으려고.”
“점심이요?”
“벌써 점심시간이란다.”
수련이 해사하게 웃는다.
“이럴 수가.”
윤희는 제가 늦잠을 잔 것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나 보다.
“준비되면 나오렴.”
윤희는 준비할 것도 없이 곧장 잠자리에서 나와 수련의 뒤를 따랐다.
홍윤의 집에는 이미 서천인들이 모두 모였다.
“집에 가만히 못 있겠어서.”
“어차피 저녁에 만찬 할 거니까, 일손도 도울 겸 미리 왔지.”
방문 앞을 지나가던 나주와 인현이 윤희를 발견하고 한 마디씩 건넸다.
“다들 벌써 오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한껏 고양된 윤희의 기분이 더욱 들떴다.
“몸은 어때?”
홍윤이 주방에서 고개만 내밀고 물었다.
“좋아요.”
윤희가 주방을 향해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래? 그럼 이것 좀 옮겨주겠니?”
“그럼요.”
윤희는 여러 개 포개어진 그릇을 받아 연회실로 옮겼다.
그런데 살짝 열린 응접실의 문틈으로 작은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담의 목소리였다.
“……시작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