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서천인들을 대신해 목숨을 내놓아야 하지?”
이담은 연월과 윤희가 무사히 곁으로 다가오자 숨을 고르며 감정도 함께 추슬렸다.
“저들의 죄라. 많지, 많아. 어디 한 번 읊어볼까.”
도월은 피가 섞인 침을 내뱉고 한쪽 무릎을 세워 팔을 걸쳤다.
“여덟 중 여덟이 도적질에 폭행을 일 삼고, 아녀자를 겁간하고, 약한 자를 납치하여 살해하고, 죽은 자의 육신을 훼손하여 그들의 오장육부와 간담, 뼈와 살을 밀매하였으니, 죽어 마땅하지 않은가.”
도월이 느긋하게 눈을 깜박이고 한층 부드러운 음성으로 연월을 향해 물었다.
“연월아, 네 생각은 어떠냐. 저들 대신 떠난 서천인을 돌려주마.”
“저들이 누구 건 인간의 목숨에는 경중이 없으니 령을 교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더는 신석과 익선과를 내어 달라 고집부리지 마세요.”
제물이라고 데려온 이들의 죄를 듣고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나 연월은 제법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담은 침묵으로 연월에게 동의를 표했다.
“아니, 저들은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라잖아요! 저들보다는 서천인을 되찾아야죠!”
윤희가 이담과 연월을 향해 한껏 억울함을 담아 외치자 도월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부추겼다.
“저런 악한 자들을 세상에 다시 내보내면 서천에 들어올 자들이 줄을 서겠군, 그래. 서천의 번영을 원하나? 아니면 저들이 여기 남아 서천인들을 욕 보이길 바라는가.”
윤희가 눈을 크게 뜨고 둘을 번갈아 보았다.
“말도 안 돼. 그럴 수 없어요. 연월! 이담!”
윤희의 부름에도 둘은 입을 꾹 다물었다.
“결정을 서둘러야 할 텐데. 환령도 때가 있는 법이니.”
서천인을 되살리고 싶다는 윤희의 바람은 연월과 이담의 바람이기도 했으나, 그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도월이 의도적으로 불을 질러 서천인의 희생을 계획했다 하더라도 이미 일어난 일이다.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다.
더구나 되돌리는 데에 필요한 조건이 똑같은 희생이라면 서천 관리자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연월과 이담은 망설이고 있다.
죄가 무거운 자들을 서천에 품을 수도, 도로 세상에 내칠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에 빠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도월이 제 손을 더럽혀 억울하게 희생된 서천인과 죄인의 령을 바꿔준다고 하니, 기어이 그가 만든 갈림길 앞에 서고 말았다.
목숨에 경중이 없다는 말에 거짓은 없었다.
하지만 악한 자보다 선한 자를 품어 주고 싶은 마음 또한 연월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담은 홍윤의 집에서 보았던 서천인들의 얼굴이 눈앞에 선히 떠올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두 눈 속에 잔상이 지워지지 않아 이담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었다.
연월과 이담의 동요를 눈으로 확인한 도월이 윤희에게 넌지시 말했다.
“윤희야, 신석을 내게 건네 다오.”
윤희는 마른침을 삼키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연월과 이담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쉬고 두 눈을 깊이 감았다가 뜬 이담의 얼굴에는 여느 때와 같은 따뜻한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결심이 선 듯했다.
“연월, 익선과를 준비해 줘.”
도월의 얼굴에도 흥미로운 미소가 걸렸다.
“도월, 당신이 환령에 성공한다면, 익선과를 내어 주도록 하지.”
“신석은요?”
윤희가 끼어들어 물었다.
“신석은 그다음이야.”
이담이 윤희에게는 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한 뒤, 도월을 향해 말을 던졌다.
“익선과를 먹고도 광증이 오지 않는다면, 신석은 그때 내어 주지.”
“순서는 마음에 안 들지만 따질 때가 아니지. 좋아.”
도월이 흔쾌히 수락하자, 연월은 그 자리에서 익선과를 소환했다.
숲의 저편에서 둥근 복숭아빛 열매 하나가 빙글빙글 날아와 연월의 손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달콤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곁에 선 윤희에게도 풍겨와 침을 꿀꺽 삼켰다.
“넌 먹으면 안 돼.”
이담이 윤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쩝, 어찌나 먹음직스러운지 입맛까지 다신 윤희지만 광증이라는 말을 듣고도 먹고 싶을 만큼 식탐이 강하게 일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아름다울수록 독성이 강한 것이 많다.
이를테면 독초나 도월처럼 말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도월이 성큼 다가왔다.
고왔던 도포가 진흙투성이가 되어 축 쳐지는 탓에 도월은 그것을 서슴없이 벗어던졌다.
언제나 깔끔하고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던 그가 진창에 빠져 엉망이 된 꼴을 보게 되다니, 윤희는 어쩐지 속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윤희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한 꺼풀 벗어던진 도월의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도월은 지체 없이 의식을 시작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도월은 스스로 푸른 불꽃을 피웠다.
“사자는 들으라. 여기 여덟 혼과 거기 여덟 령을 환령하고자 하니 초혼(招魂)에 따르라.”
도월이 주를 외자 여덟 제물을 둘러싼 붉은 불 고리가 푸른빛을 발하며 높이 치솟았다.
“기처 환영령(還迎靈), 서천의 이나주, 안명옥, 송산, 정인현, 나혜석, 설태운, 양나혜, 박재문, 복(復)! 복! 복!”
“차처 환송령(換送靈), 한경의 김형만, 이범석, 박창식, 최무석, 노정남, 조배일, 변진태, 마인석이라.”
끄아아악! 으아아악!!
도월이 호명하자 제물이 차례로 고통에 가득 찬 비병을 질렀다.
그 여덟 제물이 지르는 비명 소리에 서천의 하늘이 흔들렸다.
푸른 불길에 감싸인 제물은 서서히 수분이 빠지고 뼈에 가죽이 달라붙을 만큼 바싹 말라비틀어지더니 검게 그을었다.
새카맣게 타들어간 제물은 어느새 해골만 남아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해골은 입을 쩍 벌리고 신음과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고통을 보다 못한 윤희는 두 귀를 막고 고개를 푹 숙였다.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자신의 발끝만 바라보던 그때, 어머니가 제게 해 주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등에 닿았다.
연월이 두어 번 쓸어내리자 메스꺼움이 가라앉고 속이 한결 편안해졌다.
또 한쪽 어깨에 가볍게 올라온 이담의 손은 윤희의 마음에 부옇게 낀 제물을 향한 거북함을 서천인이 되돌아오길 바라는 갈망으로 밀어내어 정화했다.
“이들 환송령은 죄가 중하니 팔열지옥으로 다스리리라.”
도월이 주를 마치자 푸른 불길은 더욱 기세 좋게 타올랐다.
새카만 여덟 해골의 비명은 서천이 떠나가라 울렸고, 잿가루 마저 모두 날아간 뒤에야 사라졌다.
비명이 끝나고 윤희가 긴장으로 땀이 찬 손바닥을 옷가지에 닦고 있을 때였다.
큭.
도월의 억눌린 신음 소리가 들렸다.
윤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도월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직전의 제물처럼 온몸의 물이 메마르고 피부가 그을더니 이내 새카만 해골만 남았다.
고통에 신음하던 도월이 연월에게 손을 내밀었다.
해골이 되었어도 그의 거만한 태도는 여전했다.
연월은 그가 내민 손을 보고 말없이 열매를 놓아주었다.
열매는 제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날아가 도월의 손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해골이 된 도월은 재가 되어 바스러지기 직전에 쩍 벌린 입 속에 열매를 통째로 넣었다.
과즙이 흐르는 해골의 입가에 미소가 보이는 듯하여 윤희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콰득.
과육 속 씨앗을 이빨로 꽉 물어 깨뜨리자 도월의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
새카맣던 해골뼈가 희어지고 살가죽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머리털이 자랐다.
도월은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아니 더 젊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헉.
윤희는 한번 더 숨을 삼켰다.
그러자 당황한 이담이 서둘러 윤희 앞으로 달려 나와 시야를 막았고, 연월은 얼른 손으로 눈을 가렸다.
큼, 큼.
이담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물러서자 도월은 맵시 있는 양장 차림을 뽐내며 그들과 마주 섰다.
“자, 이제 내게 줄 것이 있지?”
도월이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윤희는 허락을 기다렸고, 이담과 연월은 허락의 말 대신 그들이 선 장소를 옮겼다.
개울가에 선 윤희가 신석을 건네기 전에 먼저 도월을 향해 제 할 말을 쏟아냈다.
“이것으로 저는 이제 나리께 진 빚은 없는 겁니다. 고리대를 하는 나리시니 아시겠지요. 신석이면 제가 이자를 아주 후하게 쳐서 갚은 겁니다. 아시고나 계십시오. 저를 속여 서천에 보내시고, 나비로 신석을 찾는 것까지 다 이용해 먹었으니 이미 빚은 갚고도 남았지만, 어찌 되었든 제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주셨으니 제가 이자를 후하게 쳤습니다. 그러니 이제 거래는 끝입니다.”
당돌하게 거래 종료를 알리는 윤희의 말에 도월은 턱을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내가 말은 다 하지 않았으나, 널 속인 적은 없다. 거래를 마무리 지으려거든 저것부터 어서 내게 다오.”
도월이 개울을 향해 턱짓했다.
“기다려 보십시오.”
윤희가 사나운 눈초리로 흘겨보며 대꾸한 뒤, 허리를 굽히고 차가운 개울물에 손을 담갔다.
개울 속에서 유난히 투명하고 반짝이는 그 돌은 차가운 물속에서도 열이 식지 않았다.
물과 함께 두 손으로 조심히 떠올린 윤희는 얼른 도월에게 그것을 건넸다.
신기하게도 도월의 손에 넘어간 신석은 제 주인을 만나 기쁜지 더욱 빛을 발하며 반짝였다.
도월도 드디어 손에 넣은 자신의 신석을 그윽한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았다.
이어 신석을 한번 꽉 쥐고는 고개를 젖히고 익선과를 먹은 것처럼 한입에 꿀꺽 삼켰다.
신석을 삼킨 도월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퍼져 나왔다가 이내 사라졌다.
윤희는 이 광경을 신기한 듯 관찰했다.
“이제와 물어보는 것도 우습지만, 도월 나리는 신이지요?”
“왜, 신이 아닌 것 같으냐?”
“제가 생각한 신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여 확인차 물어보았습니다.”
“뭣이?”
도월의 한쪽 눈썹이 가파른 산을 그렸다.
“네가 생각한 신은 어떤 모습이냐.”
윤희는 도월의 질문에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뭐랄까, 너그럽고 인자한 모습이지요. 셋 중에 고르자면 이담이 가장 가깝겠네요.”
윤희의 대답에 연월이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도월은 그렇다 치고 저도 신 답지 못하다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다시는 서천에 오지 마십시오.”
“글쎄다. 어쩌면 또 올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훠이, 훠이.”
윤희가 닭을 쫓듯 도월을 내쫓는 시늉을 하자 이담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터뜨렸다.
“한경에서는 내 앞에서 벌벌 떨더니 서천에서는 아주 기고만장하는구나.”
“제, 제가 언제 그렇게 벌벌 떨었다고 그러십니까. 그리고 거래도 다 끝난 마당에 거리낄 것이 뭐 있겠습니까.”
흠, 흠. 윤희가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제가 이자 후하게 쳐드렸으니 제 아비 좀 잘 보살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윤희의 얼굴에 옅은 근심이 스쳤다.
“오냐.”
도월은 이미 그리하고 있음에도 이러니 저러니 잔말을 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이제 인사하러 가야지.”
이담이 다가와 손을 내밀며 작별의 시간임을 알렸다.
“아, 잠깐.”
그때, 불현듯 도월이 셋의 이목을 끌며 손을 바닥에 대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진흙탕이 되어버린 꽃밭에서 피어오르던 수증기가 일시에 사그라들었다.
도월이 흙에 남은 열기를 수거한 것이다.
“열은 거두었으니 꽃은 네가 피워 보거라.”
윤희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고 입에서는 경탄성이 흘러나왔다.
“히익, 이렇게 넓은 데를 제가 어떻게 혼자…….”
도월은 윤희에게 숙제를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뒤이어 윤희도 연월과 이담의 손을 잡고 정호가 기다리는 바림의 숲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