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선과는 태초의 숲에서만 열리는 복숭아를 닮은 과일이다.
이 과일은 신의 육신이 노쇠하는 것을 막아주고 마른 기력을 샘솟게 해 주어 신의 열매라 불렸다.
영생을 누리는 신들은 이 열매를 먹고 젊고 건강한 육신을 유지했다.
익선과는 일종의 땔감과 같아서 신마다, 때에 따라 소모되는 양이 다르기 때문에 먹는 주기가 들쭉날쭉이긴 했지만, 한 번 먹으면 최소 오백 년은 기력이 마르지 않았다.
또 서천의 다른 먹거리와 같이 완전히 무르익은 후에도 썩지 않고, 완숙의 상태가 그대로 보전되었다.
이러한 신의 열매를 수확하고 관리하는 이가 바로 서천 관리인인 연월과 이담이었는데, 둘은 언제나 정확한 수량을 기록으로 남겼다.
언제 얼마나 수확했고, 어느 신으로 송달했는지를 빠짐없이 말이다.
이토록 정확한 연월과 이담의 기록 속에 딱 한 번 오류가 발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도월의 흔적이었다.
그 흔적으로 인해 도월은 백여 년 전, 신족 장로들에게 신석을 빼앗기고 도원에서도 쫓겨났다.
이는 도월이 익선과를 먹은 지 고작 백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소리다.
그런 그가 지금 익선과를 내어 달라 요구한다.
역시 신석이 없어 기력 소모가 빨랐던 것일까?
아니다. 연월이 보기에는 아직 열매를 찾을 만큼 기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담의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신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신석은 신을 신으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핵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신석을 빼앗긴 신의 육신은 인간의 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대한 신의 기운이 작은 인간의 몸에 담기면, 그릇은 넘치다 못해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이 갈 곳 잃은 기운을 제어할 수 없게 된 그릇이 거대한 기를 외부로 발산했다.
이는 곧 광증을 의미했고, 죽음 직전의 발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도월은 신석을 빼앗기고도 백여 년동안이나, 그것도 사바에서 이전과 같은 겉모습을 유지하고 신력도 보존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도월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점은 높이 살만 하다고 여기면서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서천에 들이닥친 그가 못마땅한 것도 사실이다.
이담은 도월의 새로운 요구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것 또한 우리가 내어 줄 수 없다는 걸 잘 알 텐데. 추방자여.”
‘추방자’라는 노골적인 부름에 연월이 놀란 눈으로 이담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심호흡과 함께 곧 평소의 담담한 얼굴로 돌아왔다.
연월이 도월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당신의 몫은 없습니다.”
“알지, 내 몫이 없다는 건. 그러니 내 이렇게 직접 찾아와 부탁하지 않나.”
도월의 뻔뻔한 낯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의 미소는 신석과 익선과를 잘 모르는 윤희가 보아도 화가 날 만큼 얄미웠다.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내 몫을 한 번 만들어 보게. 아니면 내 직접 명분을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도월이 대답도 듣지 않고 손을 들어 올렸다.
“당신의 겁박이 우리에게도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이담의 강한 어조에도 도월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통하는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그 순간, 하늘에서 불꽃이 비처럼 쏟아졌다.
연월은 재빨리 빛으로 장막을 펼쳤고, 이담은 휘파람을 불었다.
먼 하늘에서 거대하고 검은 새가 입을 쩍 벌리고 날아와 장막에 튕긴 붉은 불꽃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제법이구나.”
이번엔 도월이 긴 소맷자락을 펄럭이자 발아래 땅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긴 대열을 이룬 연기 아래로 땅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연월은 윤희를 뒤로 물리고 방어막을 펼쳤다.
땅을 뚫고 용처럼 생긴 괴물이 불쑥 튀어나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도월이 부리는 강철이었다.
윤희의 고개가 저절로 뒤로 넘어갔다.
강철이 검은 새를 내쫓고 유유히 꽃밭 위를 떠도는 사이, 도월이 다시 불을 흩뿌렸다.
연월 역시 재차 차단막을 펼쳤다.
간발의 차이로 막아내는 듯했으나 차단막에 튕겨 난 불을 먹어줄 검은 새가 없어 다시 아래로 떨어지면서 막이 뚫리고, 끝내 꽃밭에 불이 붙고 말았다.
풀이, 꽃잎이 타들어간다.
서천인의 저승꽃이 곳곳에 숨어 있는 꽃밭에 불이 번진다.
이담은 서둘러 홍윤에게 이동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 순간을 누구도 외롭게 할 수 없어 한 곳에 집결시킬 생각이었다.
마음이 통한 걸까.
홍윤의 집에는 이미 서천인들이 모여 있었다.
“이담! 이게 무슨 일이죠?”
홍윤이 물었으나 이담은 상세히 대답해 줄 시간이 없었다.
“미안해요, 여러분. 꽃밭에 불이…….”
이담이 전에 없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얼버무렸다.
“윤희는요?”
“윤희는 우리와 함께 있어.”
수련이 다급히 묻자 이담이 걱정 말라며 어깨를 토닥였다.
“최선을 다해 막을게.”
이내 평소처럼 웃어 보인 이담이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이담이 떠난 자리에 타다 만 잎사귀 하나가 떨어졌다.
머지않아 자신들의 처지가 될까 불안하고 마음이 쓰려 왔지만 그들은 서로를 격려했다.
그리고 이른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서천에 온 건 큰 복이었어.”
“맞아, 이토록 평안한 적이 없었는 걸.”
“더 없는 행복이었어요. 우린 다음에도 좋은 곳에서 만날 거예요.”
한데 모인 서천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수련은 어른 사이에 낀 여섯 살 꼬마 아이를 꼭 껴안고 노래를 불렀다.
몇 해 전 한경에서 유행한 노래였다.
수련이 시작한 노래를 한경 출신 몇이 따라 하더니 어느새 다 같이 합창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도 겁을 떨쳐 내고 노래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불은 무섭게 뻗어 나갔다.
강철이 대기 중의 수분을 모두 흡수해 건조해진 공기를 타고 삽시간에 퍼진 것이다.
연월은 불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방화막을 세워 불을 가두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윤희는 강철 때문인지 수분이 모이지 않아 물을 뿌릴 수가 없었다.
때문에 연월이 다시 방화벽 세우는 동안 불이 더 번지지 못하게 역풍을 일으켰다.
이 또한 역부족이었는지 바람은 뜨거운 열을 품고 무서운 기세로 회오리쳤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이담이 돌아왔다.
그 짧은 사이에 불은 넓게도 퍼져 나갔다.
지킬 것이 많은 자는 지킬 것이 없는 자에 비해 제약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반을 잃었다.
이담은 도월을 향해 달렸다.
날벌레 떼가 날아와 도월의 시야를 가리고 백사가 다리를 옭아매고 덩굴이 팔을 붙잡았다.
이를 단숨에 떨쳐내고 피하리라 생각한 도월은 달려드는 이담의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타오르는 불을 제 눈에 담았다.
그의 눈동자가 화염에 휩싸였다.
화염 속에 한 여인이 춤을 춘다.
이담은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다시 주먹을 올렸다.
퍽!
도월의 고개가 반대로 돌아가고 눈동자 속 화염이 사라졌다
일순 불이 잦아들었다.
그러자 불밭 위를 유영하던 강철이 이담을 향해 매섭게 날아왔다.
이담은 다급하게 휘파람을 불었고, 다행히 검은 새가 때를 맞춰 날아와 강철을 유인했다.
이담은 도월의 몸 위에 올라타 그가 꽃밭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백사로 눈을 가리고, 물속에 가두었다.
자신의 환각에 속지 않는 도월이었지만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그의 주의를 빼앗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직전의 육탄전을 불사한 이유이기도 하다.
연월이 이쪽 상황을 파악했는지 한쪽 손을 바닥에 대고 앉았다.
눈을 감고 손의 감각에 집중한 연월의 몸에서 옅은 빛이 피어나고 서늘한 기운이 그를 감쌌다.
쿵, 쿠구궁.
이어 땅을 가르는 굉음이 몇 차례 울려 퍼지더니 광활한 대지의 일부가, 아직 꺼지지 않은 불을 품은 꽃밭이 서서히 솟아올랐다.
“지금이야! 개울 물을 이용해.”
연월이 윤희를 향해 소리쳤다.
대지에서 떨어져 나온 거대한 땅덩어리에 넋을 놓았던 윤희가 연월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윤희는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는 짧은 다짐과 함께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빠르게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두 발을 굳건히 딛고 온몸의 감각을 깨운 뒤, 흐르는 개울물에 자신의 모든 기를 합류시켰다.
이어 그대로 제 기를 회수하여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그러자 개울물이 비가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불밭 위에 내리는 비는 주룩주룩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불은 저항하듯 타오르다 머지않아 잠잠해졌다.
불이 완전히 꺼진 꽃밭은 진창이 되었다.
연월은 곧바로 솟아오른 땅을 제자리로 되돌렸다.
하나였던 땅이 두 개로 갈라지고, 운명도 갈리고 말았다.
불은 꺼졌지만 타버린 꽃은 되돌릴 수 없다.
연월과 윤희는 망연자실하여 진창에 주저앉았다.
이담도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고 도월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둘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 후로 한 번 더 한바탕 육탄전을 벌인 탓이다.
도월이 바닥에 누운 채로 먼저 입을 열었다.
“서천인들을 되돌리고 싶은가? 명부의 날을 다 채우지 못한 자들 아닌가.”
이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천인을 되찾아 주마. 대신 신석과 익선과를 다오.”
이 지경이 되어서도 포기하지 않는 도월에 이담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헛소리하지 마.”
“내가 성가시게 저 치들을 왜 끌고 왔겠어.”
이담의 눈이 전에 없이 크게 뜨이고, 깊은 그의 눈동자에 동요가 일었다.
“옛정이 있지 않나.”
“옛정? 하하하.”
크게 웃음소리를 내뱉은 이담이 격분했다.
“옛정이 있어서 꽃밭을 저렇게 만들었어!!”
큰 소리가 나자 연월과 윤희가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도월에게 달려드는 이담을 연월이 붙잡았다.
일어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은 도월이 다시 한번 말했다.
“신석과 익선과를 가져와. 내 서천인을 돌려준대도.”
합창을 하는 목소리가 하나씩 줄어든다.
수련의 품에 안긴 채 노래하던 아이의 모습이 차츰 스러져간다.
홍윤의 집에 울려 퍼지던 목소리가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