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월 나리?”
윤희가 맞은편에 선 사내를 올려다보며 홀린 듯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도월이 윤희의 작은 목소리에 반응했다.
“오호라, 네가 예까지 어쩐 일이냐.”
도월의 얼굴에 흥미가 번졌다.
생각지도 못한 도월의 등장에 윤희는 놀라움과 약간의 반가움, 그리고 약간의 원망이 섞여 퍼뜩 무어라 말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만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유, 윤희? 윤희야!!”
정호가 도월 너머로 나타난 세 인영을 무심히 바라보다 그중 왼쪽에 선 작은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글거리는 불꽃이 시야를 방해했지만 이제는 성인이 되었을 제 딸이 분명했다.
정호의 발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리게 움직이던 다리에 속도가 더해지려 하자, 김 씨가 뒤에서 다급히 붙잡았다.
한 박자 늦게 행랑아범도 앞을 가로막았다.
“이보게! 아니 되네! 나리께서 저길 넘어가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이거 놓으시오! 저기 내 딸이!”
정호가 결박을 뿌리치려 하자 김 씨와 행랑아범이 앞뒤로 더 꼭 엉겨 붙었다.
“아버지?”
어른어른 피어오르는 불꽃 너머로 눈길이 빼앗긴 윤희는 두 사람에게 붙잡혀 움직이지 못하는 정호를 발견했다.
“아버지!!”
윤희 역시 정호를 향해 달려가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발을 떼는 순간, 눈앞에 좁쌀만큼 작은 날벌레 떼가 날아와 막을 드리웠고, 또 굵기가 허벅다리 만한 백사가 어디선가 나타나 윤희의 몸을 감고 혀를 날름거렸다.
“비켜! 이거 놔!”
윤희는 팔을 휘저으며 날벌레를 흩트리고 몸을 조이는 뱀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백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날벌레는 흩어졌다 다시 날아와 시야를 방해했다.
“이거 놓으라고!!”
윤희가 남은 힘을 모두 모아 분출했다.
그 힘이 참으로 놀라웠다.
쾅!
천둥을 울리며 대기가 폭발했다.
인간들이 모두 쓰러졌다.
이담과 연월, 그리고 도월은 거센 바람에 옷자락을 펄럭였다.
날벌레 떼는 사라졌고 백사는 발 밑에 똬리를 틀었다.
질끈 감았던 윤희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자신의 힘에 스스로도 놀란 것이다.
놀란 것은 윤희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놀랐다.
도월은 윤희에 대한 흥미가 더욱 깊어졌다.
윤희의 놀란 두 눈은 저도 모르게 연월과 이담에게로 향했다.
놀람, 기대, 걱정이 뒤섞여 묘한 표정으로 굳은 둘도 윤희를 보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윤희는 혼날 것을 예상하고 먼저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이에 이담이 실소를 터뜨리더니 도월을 향해 의외의 말을 꺼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만나게는 해 줍시다.”
이담의 말에 도월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못 본 새 많이 후해졌군그래.”
둘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었지만 윤희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으휴.”
연월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윤희 옆으로 한 발 다가갔다.
“이쪽으로 오세요.”
정호는 자신과 뒤엉켜 쓰러져 있던 김 씨와 행랑아범을 떼어 내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만, 거기까지. 더는 안됩니다.”
연월이 손을 뻗어 정호를 제지했다.
윤희와 정호는 두 걸음만큼 떨어져 마주 섰다.
연월이 둘 사이의 허공을 가볍게 건드리자 그곳으로부터 옅은 빛이 퍼져 나왔고,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투명한 막이 생겼다.
연월이 한 걸음 물러섰다.
정호와 윤희는 그제야 남은 거리를 좁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윤희야, 윤희야, 진짜 내 딸 윤희가 맞으냐?”
정호는 제 딸을 눈앞에 두고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맞아요, 아버지. 제가 서 정호의 딸 서 윤희예요.”
그 심정은 윤희도 마찬가지였다.
“윤희야.”
정호는 손을 뻗어도 만질 수 없는 제 딸을 바라보며 간절히 이름을 불렀다.
부녀는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맞대었다.
“아버지, 건강하시지요?”
윤희는 입 안에서 뒤엉킨 말들을 전부 삼키고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아무렴. 너는 괜찮으냐?”
“그럼요. 이곳은 모두에게 평안을 주는 곳인 걸요.”
윤희가 환히 웃었다.
“방년이 되니 네 어미를 더 쏙 빼닮았구나.”
정호가 닿지 않는 윤희의 빰을 쓰다듬었다.
“제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나요?”
윤희는 투명한 막이 가로막은 손바닥에 뺨을 대고 촉촉해진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보았다.
“그럼, 아주 똑 닮았지.”
정호가 그윽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윤희의 눈동자에는 작은 동요가 일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나요?”
올곧은 윤희의 눈빛을 보고 정호의 얼굴에는 빠르게 체념이 스쳤다.
윤희가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진작에 말해 주었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제게 말해 주세요.”
윤희의 목소리에 애원이 섞였다.
“실은 말이다, 네 어미는……, 선아 씨는 사실, 인간이 아니란다.”
목을 비집고 나오는 정호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정호가 바닥으로 떨어진 시선을 들어 올렸을 때,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는 윤희의 눈동자가 맞이하고 있었다.
애타는 그 시선에 떠밀려 정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이미 아는 듯하니 그냥 말하마.”
정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부인은, 선아 씨는……, ‘정령’이라 하더라.”
정호가 말을 마친 순간, 돌연 혀가 말리고 온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
갑작스러운 발작에 윤희가 깜짝 놀라 외쳤다.
윤희의 외침을 듣고 뒤에서 김 씨와 행랑아범이 달려왔다.
도월이 두 사람을 저지하고 쓰러진 정호의 곁에 앉아 상태를 살폈다.
연월과 이담도 투명한 막을 뚫고 검은 선 너머로 건너갔다.
“아버지, 아버지…….”
막을 넘어갈 수 없는 윤희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염없이 아버지를 부르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살이 낀 것 같군.”
도월이 정호의 입 안에 손을 넣어 말린 혀를 잡아당겼다.
커억.
정호의 숨통이 트이고 경련하던 몸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보통 살이 아니야. 신의 기운이 깃든 살이네.”
도월이 혀뿌리에 박힌 글자를 뽑아내었다.
‘숨’
달빛으로 적힌 글자가 정호의 벌어진 입에서 억지로 끌려 나왔다.
도월은 글자가 도로 들어가 박히지 못하도록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잡고 있었다.
“뭐 하고 섰는가.”
당장 돕지 않고 가만히 서서 무엇하느냐며 도월이 연월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았다.
찰나의 순간, 연월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인간의 생사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신들의 규율이다.
하지만 신의 기운이 깃든 살 때문에 한 인간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게다가 달빛으로 쓰인 글자다.
월신 중 누군가의 소행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저 살을 없앨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그래, 살리자. 그게 먼저야.’
연월이 짧은 고민을 마치고 도월이 잡고 있는 글자를 제 손으로 옮겨 왔다.
빛은 빛으로 상쇄시켜야 한다.
“모두 눈 감으세요.”
연월이 글자가 든 제 주먹을 입가로 가져갔다.
“후우-.”
하늘을 향해 긴 숨을 내뱉자 글자가 저 높은 곳으로 멀리멀리 날아갔다.
날아간 글자는 보름달처럼 둥근 빛을 내뿜고 이내 사라졌다.
정호가 숨을 완전히 되찾았다.
“자네 인생도 참 어지간하구먼.”
도월이 꿇었던 한쪽 무릎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만다행입니다.”
이담이 다가와 정호를 일으켜 세웠다.
“감사합니다, 나리. 나리도 감사합니다.”
정호가 이담의 부축을 받으며 연월과 도월에게 연신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아버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윤희가 정호를 불렀다.
“괜찮으세요? 어디 상한 곳은 없나요?”
“괜찮다, 윤희야. 나는 괜찮다.”
정호가 이담의 부축을 사양하고 다시 윤희 앞에 다가가 섰다.
“봐라. 이제 멀쩡하지? 너는 괜찮으냐?”
정호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윤희를 바라보았다.
“제가 안 괜찮을 게 뭐가 있나요.”
윤희는 안도감에 취해 잠시 둘의 처지를 망각하고 부루퉁한 얼굴로 어리광을 피웠다.
“그럼, 그렇고 말고.”
부녀가 마주 보고 웃었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윤희의 머릿속은 어머니에 대해 묻고 싶은 말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말들이 지금 아버지의 환한 얼굴을 보자 하나둘 지워졌다.
그리고 결국 아무렴 어떠냐 싶은 마음만이 남았다.
“그런데 아버지, 왜 그런 살이 붙은 거죠?”
이 질문은 윤희가 정말로 궁금해 물었지만 정호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어머니와 관련된 일인가 보군요?”
“미안하다. 더는 말해 줄 수가 없구나.”
정호의 얼굴에서 다시 웃음이 걷히려고 하자 윤희가 서둘러 말을 붙였다.
“미안해하지 말아요, 아버지. 저는 저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우리가 선택한 길을 걸을 뿐인 걸요.”
윤희가 이담과 연월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동의를 구했다.
“그렇죠?”
“그럼.”
이담이 윤희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
“윤희는 저희가 이곳에서 잘 보살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담이 위로의 말을 건네자 정호는 그제야 이담의 얼굴을 확인했다.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습니까?”
정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담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글쎄요.”
이담은 그저 싱긋 웃기만 하였다.
쯧.
뒷짐을 지고 상황을 지켜보던 도월이 혀를 찼다.
“날 새겠군. 눈물의 재회는 이쯤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