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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낙원 2 03화

33 제물 3

by 아무



연월과 이담, 그리고 도월은 다시 검은 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당신이 서천에 온 이유야 뻔하지. 안 그래?”

이담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말속에는 적의가 담겼다.

연월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렇다면 거리낌 없이 말하지. 내 신석을 돌려받으러 왔네.”

도월이 뻔뻔하게 자신의 목적을 밝히자 이번에는 연월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패었다.

“안 되는 걸 알면서 이러는 이유가 뭐죠?”

“내가 언제 안 된다고 해서 안 하는 거 보았나?”

도월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자 황당해진 이담의 한쪽 눈썹이 높은 산을 그렸다.

도월이 씨익 웃으며 한 걸음 다가와 검은 선을 밟고 섰다.

연월이 팔을 뻗어 도월이 더 다가오지 못하게 저지했다.

“거기까지. 더는 안 됩니다.”

도월은 이제껏 본 적 없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눈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도월은 검은 선을 넘어 연월과 이담, 윤희의 등 뒤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불 고리에 감싸인 여덟 제물도 도월과 함께 그대로 자리가 이동되었다.

애석하게도 제물들은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월에 의해 서천에 발을 들이고 만 것이다.

다행히 검은 선을 경계로 서천의 농도가 짙어지긴 했으나 아직 바림의 숲이므로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남았다.

그러나 도월이 그리하게 두지 않을 터였다.

“어서 그 자들을 내보내세요!”

언제나 묵묵하던 연월이 언성을 높였고 눈에는 이채가 반짝였다.

“내 신석을 돌려주게.”

도월이 느리지만 강하게 요구했다.

“안 됩니다!”

연월이 더욱 강하게 거부했다.

처음 보는 연월의 모습에 놀란 윤희는 안절부절 두 손을 맞잡고 눈알만 굴렸다.

“삐이이이.”

그때 검고 거대한 새가 날아와 상공을 선회했다.

빙글빙글 돌던 검은 새는 나무우듬지에 내려앉았는데, 나무줄기가 새의 무게를 간신히 버텼다.

새가 날개를 한껏 펼치자 어두운 하늘을 다 가릴 듯하였다.

또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펄럭이자 윤희의 몸이 휘청거릴 만큼 강한 바람이 일었다.

이담이 새를 향해 손짓하자 검고 거대한 새는 곤두박질칠 듯 하강했다.

그리고 제물 중 하나를 물어가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고리 모양의 불이 위로 솟구치더니 제물을 불 속에 가두어 버린 탓이다.

“이런, 신과 신에 준하는 자가 이렇게 인간을 공격해서야 쓰나. 큰 변을 당하려고.”

도월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내가 직접 손을 쓰지 않았으니 그 타격이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이담이 반박하자 도월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제물도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그만, 정말로 더는 안 됩니다.”

어느새 연월은 평정을 되찾았고, 랑을 소환하여 그들이 더 들어갈 수 없게 불 고리 뒤로 막아세웠다.

“어엿한 신이 다 되었구나. 신수도 소환하고 말이야.”

“제가 신이 아니었던 적이 있던가요.”

도월의 비아냥에 연월이 맞받아치는 동안 둘 사이로 보이는 숲의 저편에서 어둠이 몰려왔다.

“저게 뭐죠?”

윤희가 눈을 비비며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어둠을 가리켰다.

“앗.”

어둠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암흑이 칼로 벤 듯 싹둑 잘려 검은 선 너머만 덮쳤다.

정호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행랑아범이 앞에서, 김 씨가 뒤에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윤희야.”

정호가 신음하듯 제 딸의 이름을 불렀고 김 씨는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둠은 삽시에 사라졌다.

어둠이 집어삼킨 그들도 사라졌다.

정호는 힘없이 털썩 주저앉아 윤희가 서 있던 자리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모두가 사라진 자리에 백호만이 남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 윤희는 제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손으로 만져 확인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이는 것은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딛고 선 바닥도 온통 어둠이라 윤희는 덜컥 겁이 났다.

“거기 누구 없어요? 연월? 이담?”

어둠 속에 갇힌 윤희가 애절하게 외치기 시작했다.

이런 윤희의 애절한 외침을 듣고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도월이었다.

“이리 오너라.”

도월이 윤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겁이 난 윤희는 도월이 내민 손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윤희가 도월의 손을 막 잡으려는 순간, 연월과 이담이 모습을 드러냈고, 마지막으로 불 고리에 둘러 싸인 제물이 나타났다.

“안 돼!”

연월이 서둘러 둘 사이를 막아섰다.

“수작 부리지 마시죠.”

“어허, 수작이라니. 겁을 먹고 떨고 있기에 손 내밀었을 뿐이네.”

도월이 내밀었던 손을 뒤로 물려 뒷짐을 지었다.

“흑기에 먹힌 자는 없겠지? 거기 안에 머릿수는 맞습니까?”

이담이 불 고리로 다가가며 물었다.

여덟 제물의 얼굴에도 겁이 잔뜩 묻었다.

이담이 머릿수를 확인하고 연월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연월이 윤희에게 자신의 옷자락을 내밀었다.

“무서우면 이거라도 잡고 있어.”

윤희는 연월이 내어준 옷자락을 두 손으로 꼭 붙들었다.

“모두 눈 감아요.”

연월이 말하고 빛이 뿜어져 나오는 손바닥으로 어둠을 장막 걷듯 한쪽 끝에서부터 서서히 걷어 내었다.

어둠이 걷히자, 그들은 환한 서천 꽃밭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흑기가 그들을 집어삼키고 꽃밭까지 이동한 것일까.

드넓은 서천의 꽃밭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제물들의 눈에도 그리 보였나 보다.

겁먹은 얼굴은 어디 가고 황홀경에 빠진 듯 입을 헤벌리고 눈을 반짝였다.

“여기가 어디여, 극락이여?”

“암만, 극락이 아니면 이럴 수가 없지.”

“공덕 그거 좀 쌓았다고 이리 좋은 데로 온 거여?”

파렴치한 제물들은 그들이 저지른 잔악한 범죄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극락이니, 공덕이니 하는 말을 뻔뻔하게 입에 올렸다.

서천에 살던 셋은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니 흘려 들었지만, 화적 떼였음을 아는 도월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불 고리가 더욱 기세 좋게 활활 타오른다.

한눈팔던 제물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불기둥 사이로 새어 나왔다.

“자네의 환각이 내게도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도월이 이담을 한심스럽게 쳐다보며 엄지와 중지를 튕겨 딱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꽃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도로 바림의 숲이 되었다.

“이 따위 잔재주를 부리다니, 이래서야 서천을 제대로 지키겠는가.”

도월이 빙긋 웃으며 연월과 이담을 번갈아 보자, 연월이 비장한 각오로 입을 열었다.

“도월, 당신만 아니면 아무도 이 서천에 쳐들어오지 않아요. 그러니 어서 이곳에서 떠나길 부탁드립니다.”

연월이 고개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이담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미안하지만 그 부탁, 들어줄 수가 없네. 내 신석을 찾기 전에는.”

도월의 뜻은 완고했다.

“자, 윤희야.”

윤희는 갑작스러운 도월의 부름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월과 이담을 차례로 본 뒤, 도월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 신석을 내어 다오.”

“신석이요? 제가요?”

“그래. 네가 발견한 것. 그것이 내 것이다.”

윤희는 어리둥절하여 제가 무엇을 발견한 적이 있던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도월의 어깨에 잿빛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아!”

윤희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말았다.

나비를 쫓다 발견한 투명하고 빛나는 돌.

하지만 그건 꽃밭의 개울 속에 있다.

지금 제게 그것을 가져다 달라는 뜻일까?

연월과 이담의 반응으로 봐서는 가져다 와선 안 된다.

저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저, 도월 나리, 죄송하지만…….”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와 윤희의 손 위에 앉았다.

그 순간, 윤희의 손에 타는 듯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아아악.”

윤희의 두 손 위에 그 돌이 얹혀 있다.

그날 데인 그 자리 위에.

윤희가 연월과 이담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거, 이게……!!”

연월과 이담이 달려와 돌을 떼어내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돌이 다른 이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인지 그대로 튕겨져 나왔다.

“물! 물!!”

연월이 소리쳤지만 윤희는 제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이담이 안개를 끌어야 손을 식히려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윤희는 떨어지지 않는 돌을 손에 얹고 발만 동동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그때 도월이 성큼성큼 다가와 윤희의 손을 태우는 돌을 재빠르게 낚아채 가져갔다.

낚아채 간 돌을 손으로 꽉 쥐어 으스러뜨리자 노란빛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와 사방으로 뻗쳤다.

그들은 다시 서천 꽃밭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연월과 이담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도월의 뜻대로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너무 그렇게 낙심하지 말게. 나도 인간들과 지내다 보니 양심이란 것이 생겼거든.”

도월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윤희로선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지만 이담과 연월에겐 불안을 부추기는 말이었다.

“양심이란 것이 그리 쉽게 생기지 않을 텐데.”

이담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언제나 유쾌하고 밝은 이담이었다.

때문에 이렇게 적대적이고 비아냥대는 그의 모습을 처음 본 윤희는 그 사이에 끼여 눈치만 살폈다.

“손 이리 내.”

연월이 다가와 불꽃 튀기는 둘 사이에서 윤희를 끌어냈다.

손바닥을 내밀자 연월이 그날처럼 치료해 주었다.

통증과 상처가 금세 사라졌다.

마치 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도월이 먼저 물었다.

“저들도 이곳에 들어왔으니 이제 서천인이네. 어찌할 텐가.”

“어찌하긴요. 내보내야죠.”

연월이 단호하게 답했다.

“내보낼 수 없다는 건 여기 윤희도 다 아는 사실이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신들의 규율을 어기게 되겠지만 말이다.

“제안 하나 하지.”

도월이 수상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들은 내가 처리해 주지. 익선과 하나만 내어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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