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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낙원 2 01화

31 제물 1

by 아무




먼 하늘에서 천둥처럼 내리던 북소리가 멈추고 뒤이어 축문이 쏟아졌다.

“아뢰옵니다. 00년 10월 15일, 한경의 현령 전 희상은 만월신 백귀 님께 삼가 고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신께서는 한경의 백성들을 굽어 살펴주시고, 은덕을 베풀어 주시길 간곡히 청하고자 여기 맑은술과 음식을 차리고 정성을 다해 잔을 올리니 흠향하시옵소서.”

대기를 가르고 땅에 박힐 듯이 내리 꽂히는 축문이 그치자 도월이 허공을 향해 주문했다.

“길을 열어라.”

도월의 무리 앞을 가로막았던 짙은 안개가 스르르 갈라지며 스러지자 선명한 시야 속에 숲으로 인도하는 오솔길이 나타났다.

도월과 그 일행은 여덟 제물을 이끌고 바림의 숲에 첫 발을 들였다.

일행 중 하나인 정호가 주변을 휘 살피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도월의 뒤로 바짝 다가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나리, 이곳은 위험합니다.”

서늘한 숲의 공기에 정호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잔말 말고 따라오게.”

도월은 정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앞서 걸었다.

그러나 바림의 숲은 쉽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길가의 나뭇가지가 얼기설기 얽혀 길을 막은 것이다.

이를 발견한 도월은 대수롭지 않게 하인 물리 듯 작은 손짓 하나로 길을 가로막은 나뭇가지를 물렸다.

길게 늘어난 나뭇가지가 거짓말처럼 줄어드는 기이한 광경을 보고 일행과 여덟 제물의 눈에는 이 기묘한 숲과 도월에 대한 두려움이 서렸다.

도월의 무리는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도로 떼었으나 얼마 못 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아악!!”

제물 중 하나가 갑자기 팔을 붙잡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뒤에서 걷던 김 씨가 다가가 그의 팔을 살폈다.

긴 명주실이 팔에 감겨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김 씨는 나풀거리는 실의 끄트머리를 잡고 팔에서 풀어내려 했으나 얇디얇은 이 실은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강한 힘으로 죄어 들었다.

김 씨는 서둘러 단검을 꺼내 실을 끊어냈다.

그러나 끊어진 실은 한 올 한 올 하늘거리며 늘어나더니 다시 제 짝을 찾아 저절로 연결되었다.

“으아악!”

실이 더욱 강하게 살을 파고들었다.

“손 떼라.”

도월이 다시 끊으려는 김 씨를 저지했다.

김 씨는 도월의 단호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성가시게 하는구나.”

도월이 낮게 읊조리며 쓰러진 남자의 팔을 잡아챘다.

“아악, 으아악!!”

남자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도월이 잡은 팔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자리에 붉은 열상이 생겼다.

스륵.

살을 파고들던 명주실이 끊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는 고통 속에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도월이 심상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오래지 않아 또다시 발을 멈추고 말았다.

푸른 장막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장막은 도월의 무리를 발견하고 미끄러지듯 매끄럽게 그들을 포위했다.

머리 위까지 덮인 장막 탓에 눈앞이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아이고, 나리. 이게 뭡니까요.”

행랑아범이 겁에 질려 우는 소리를 내었다.

“가만히! 움직이지 마라.”

도월이 손을 내밀어 불을 밝혔다.

손바닥 위에 작은 불이 둥실 떠올랐다.

겉보기에 매끈해 보이던 장막 속은 온통 가시로 뒤덮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도월은 태평해 보였다.

그러나 그와 달리 일행과 제물들은 잔뜩 겁을 먹고 애타게 도월만을 바라보았다.

“후우.”

도월이 허공에 뜬 불을 향해 입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불이 뾰족한 가시에 옮겨 붙었고, 이내 장막도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흑, 흑, 흑.”

불붙은 장막이 삽시에 사라지고 어디선가 여인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호는 소리가 나는 곳을 찾으려 주변을 살피다 머리털이 주뼛 서고 말았다.

여인이 바로 자신의 등 뒤에서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여인은 한쪽 뺨을 붙잡고 서럽게 울었다.

여인의 하얀 손가락 사이로 붉은 화상의 흔적이 엿보였다.

뒷목이 뻣뻣하게 굳은 정호는 눈알만 굴려 도월에게 도움을 청했다.

“손을 치워 보거라.”

자박자박 다가오는 도월의 말에 여인은 의외로 고분고분 손을 내렸다.

아름다운 얼굴에 커다란 흠이 생겨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치료는 네 주인에게 받고, 이거나 먹어라.”

도월이 반들반들 윤이 나는 약과를 던졌다.

여인은 날아오는 물건을 잽싸게 받아 들고,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뒤 아이처럼 좋아하며 얼른 입으로 가져가 베어 먹었다.

그녀의 환한 미소에 그 자리에 있던 사내들은 순간 넋을 놓고 말았다.

이때 도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인을 향해 불꽃을 날렸다.

그러나 이 여인이 어찌나 빠른지 벌써 저 멀리 소리가 닿지 않는 곳까지 달아나 버렸다.

“흥, 여전히 재빠르군.”

도월이 여인이 사라진 곳을 흘긋 보고 돌아서는데, 멍하니 선 사내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신들 차리거라.”

“소, 송구합니다. 나리.”

정호와 행랑아범이 허리를 굽혔다.

“곧 당도할 터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잘 따라오너라.”

“예, 나리.”

이번에는 김 씨도 대답했다.

깊고 스산한 숲에는 이제 달빛조차 들지 않았다.

나무의 계절은 제각각이었고 공기는 축축했다.

앞서 걷던 도월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보게.”

도월의 부름에 행랑아범이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나리.”

“자네들은 절대로 저 땅을 밟아서는 아니 된다.”

도월이 세 사람에게 명하고, 팔을 들어 구 척쯤 떨어진 흙바닥을 검게 그을려 선을 그었다.

“예, 나리.”

셋이 동시에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니 된다. 알겠느냐.”

재차 확인하는 도월의 말에 셋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서로 눈을 맞춘 뒤 결연하게 그러겠노라 다짐했다.

“그럼 저 뒤로 물러나 있거라.”

셋이 시키는 대로 여덟 제물의 뒤로 물러서자, 허공에 세 개의 불 고리가 생겼다.

기묘한 숲의 장난인지 신비한 도월의 재주인지는 분간하지 못하였으나, 세 사람은 타오르는 불꽃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붉게 타는 세 개의 불 고리가 층층이 쌓이고 여덟 제물을 그 속에 가두었다.

불 속에 갇힌 제물들이 당황하여 허둥대는 것도 잠시,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하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제물로 끌려온 이상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불을 향해 달려들었다.

불은 사람의 몸이 닿을 때마다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머릿수가 많으니 순순히 따르는 척하다가 기회를 틈타 도주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월과 마주한 순간, 어쩌면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불안을 감지했다.

게다가 이 숲에 들어온 뒤로 기이한 일까지 여러 번 겪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안하고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그들의 몸부림은 마지막 발악인 셈이다.

불길이 거세게 솟구쳤다.

고리 안에서 제물들이 거세게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정호와 김 씨는 불길 너머에 선 도월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가만히 불길 속을 엿보는 도월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담긴 탓이다.

머지않아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제물들의 몸부림이 멈춘 것이다.

도월은 잔잔해진 불길을 확인하고 뒤돌아 서서 외쳤다.

“이리 오너라.”

그의 부름에 온숲이 울리고 대기가 흔들렸다.

그리고 얼마 후, 도월이 그은 선 너머로 세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연월과 이담, 그리고 윤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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