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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낙원 2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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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검은 선 너머에 남은 집채 만한 백호가 정호와 김 씨, 그리고 행랑아범을 발견했다.

눈에는 이채가 번쩍였다.

“흐, 흐으으읍.”

행랑아범이 신음을 삼키고 달아나려고 하자 김 씨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 비키시오!”

억눌린 목소리를 내뱉고 김 씨를 밀어내려 했지만 힘으로는 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벌써 잊었소? 도망가 봤자 다른 괴물들만 더 끌어들이는 꼴이오.”

김 씨가 공포로 정신줄을 놓은 행랑아범의 귀에 속삭였다.

매사 심드렁한 그도 이번 일만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저 백호는 아까 봤던 신이 불렀으니 우리를 해치지는 않을 거요.”

윤희가 사라진 자리를 넋 놓고 바라보던 정호가 백호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저, 정말이오?”

반쯤 정신이 돌아온 행랑아범의 눈에는 여전히 공포가 가득하다.

정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뭍은 흙을 툭툭 털어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보시오.”

정호가 턱짓하자 김 씨와 행랑아범이 백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집채 만한 백호가 어슬렁어슬렁 느릿하게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행랑아범은 결국 김 씨의 뒤로 가 숨고, 그의 팔을 꼭 붙들고 간신히 눈만 내놓은 채로 백호를 주시했다.

김 씨도 무섭긴 마찬가지였으나 정호의 말을 믿었다.

다른 수가 없으니 그래야만 했다.

백호가 나타나는 광경을 제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는가.

또 거리가 좁혀질수록 점점 작아지는 백호의 몸집이 눈에 선명히 보였다.

백호가 그들 앞에 와 섰을 때는 황소보다 컸고, 세 사람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고 다시 정호 앞에 섰을 때는 몸집이 그 반으로 줄었다.

정호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백호가 손바닥에 머리를 대고 은근히 비비며 그르릉 목을 울렸다.

뒤에서 지켜보는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정호도 다소 놀라긴 했지만 태연한 척 두어 번 머리를 쓰다듬고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행랑아범은 여전히 김 씨 뒤에 숨어 바들바들 떨리는 한쪽 손을 뻗었다.

정호처럼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서였다.

무슨 미친 짓이냐 싶겠지만 지금은 얌전해 보이는 저 맹수에게 호감을 사 둬야 했다.

여차하면 앞에 선 두 사람이 어떻게든 해 줄 거라는 안일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백호는 그 손을 빤히 보다 고개를 휙 돌렸다.

흐응.

긴 숨을 내뱉은 백호가 정호 앞에 넙죽 엎드리더니 한 번 더 흥, 하고 짧은 숨을 내뱉었다.

세 사람의 얼떨떨한 시선이 백호에게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크음.”

정호가 짧은 적막을 깨고 보란 듯이 백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그래도 너무 가까이 붙지는 마시오. 나리도 안 계시는데.”

행랑아범이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도월이 있었다면 그도 이만큼 겁을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괴물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이 기묘한 숲에 도월도 없이 남겨지다니.

자신의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아 마음이 한없이 어수선해졌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팔이 저리기 시작한 김 씨는 행랑아범의 남은 한 손을 마저 떼어 내 버렸다.

“우리도 좀 앉읍시다.”

김 씨가 정호와 한 발짝 떨어진 바닥에 앉았다.

행랑아범도 갈 곳 잃은 두 손을 꼭 쥐고 덩달아 엉거주춤 앉았다.

여전히 백호를 주시하며.

그런데 이때 정호가 백호의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내게만 호의적인 걸 보면, 윤희와 피가 이어졌기 때문인가.’

정호는 백호와 눈을 맞추고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를 해치려고 다가오는 것이 아님을.

손을 내밀어 본 것도 그 때문이다.

머리를 비빌 줄은 몰랐지만.

정호는 백호의 뒷덜미를 긁으며 사라진 윤희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려 애썼다.

‘아이고, 저 놈이 미쳤나. 저러다가 돌변해서 잡아 먹히면 어쩌려고.’

행랑아범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말려봐야 듣지도 않을 테니 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도월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시작한 뒤로 온갖 험한 일은 다 겪어 봤지만 이토록 해괴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어휴.”

제 신세가 한탄스러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겨우 고개를 들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작에 기척을 알아챈 백호는 앞다리를 세우고 앉아 주변을 경계했다.

정호와 김 씨도 들었는지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며 반쯤 일어서 있다.

크르르릉.

덩치가 큰 산짐승의 낮은 울음소리가 귀를 찔렀다.

이어 두 개의 빨간 이채가 번쩍이더니 숲을 가르며 날아왔다.

황소 만한 짐승이 날카롭고 긴 송곳니를 자랑하며 행랑아범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놀란 행랑아범이 피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소리만 질렀다.

“깨갱, 끼잉.”

두 눈을 꼭 감고 딱 죽었구나 싶었을 때, 개의 신음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슬그머니 눈을 뜨고 상황을 살피자 다시 덩치가 커진 백호가 황소 만한 개를 입에 물고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행랑아범은 순간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 고맙소. 범 선생.”

저도 모르게 인사했다.

백호가 감사 인사를 알아들은 것인지 흘긋 한 번 눈길을 주고는 그대로 숲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백호는 금세 돌아왔다.

그런데 백호 뒤로 개가 피를 흘리며 졸졸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백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호 앞에 자리를 잡았고, 개는 행랑아범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끼잉.”

이제는 겁이 나기보다 개의 신음 소리가 영 마음에 걸린다.

세 사람은 둘 사이에 멀뚱히 서서 백호와 개를 번갈아 보았다.

“별일 없었나 보군.”

“나리!!”

드디어 도월이 돌아왔다.

행랑아범이 반색하며 외쳤다.

도월의 달라진 옷차림까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백호가 도월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적의를 드러냈다.

“누굴 닮아 이리 사교성이 없는지.”

쯧, 도월이 혀를 차며 개에도 시선을 던졌다.

“저건 또 뭔가.”

“그게, 저…….”

김 씨가 얼버무렸다.

뭐라고 설명하기가 난감했기 때문이다.

정호의 귀에는 그들의 말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았다.

도월이 돌아온 순간, 그의 눈과 귀는 이미 저 검은 선 너머로 향한 탓이다.

작은 기대를 품고, 도월에게는 물어볼 생각도 못한 채로.

얼마나 지났을까, 실제로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호에게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윤희가 나타났다.

“아버지!”

흙투성이가 된 몰골로 자신을 부르는 윤희를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나리.”

정호의 부름에 도월이 고개를 까딱 하고 수락의 뜻을 표했다.

검은 선 가까이 바짝 다가간 정호는 밝은 윤희의 표정을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어.”

“일이 좀 있었어요.”

윤희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가.’

선뜻 작별 인사가 나오지 않는다.

“윤희는 걱정 마세요.”

정호의 마음을 알아챈 이담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한경에서 마음 고생하느니 여기가 더 나을지도 모르지.’

햇살 같은 그의 미소가 정호의 어두운 마음에 빛을 내렸다.

“밥 잘 먹고, 편히 지내거라. 내 걱정 말고.”

정호가 간신히 입을 열고 말했다.

“아버지도 제 걱정 마세요. 혼자라고 끼니 거르지 말고 잘 드셔야 해요.”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둘이 손을 마주 댔다.

“오냐, 그러마.”

정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때, 도월이 불쑥 끼어들었다.

“인사는 그쯤 하지. 동트기 전에 도착해야 하니.”

“송구합니다. 나리.”

정호가 도월에게 머리를 숙이고 다시 윤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닿을 수는 없지만 막을 통해 손을 맞대고 정말로 마지막이 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몇 번을 돌아보았는지 모르겠다.

이미 한참 떨어진 곳까지 걸었지만 정호의 마음은 아직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허망한 기분이 쉬이 떨쳐지지 않은 탓이다.

윤희와 헤어지던 그 밤에도 이 정도로 침울하지는 않았다.

멋모르고 당한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마음이 더욱 쓰리고 자꾸 기분이 가라앉았다.

“자네 딸이 자네를 잘 보살펴 달라 하던데, 어찌 생각하나.”

앞서 걷던 도월이 슬쩍 걸음을 늦추고 바로 뒤에 따르던 정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윤희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도월이 고개를 까딱였다.

“못난 아비가 걱정이나 끼쳤네요.”

정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까지 편의를 봐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 뭐, 그렇다면야.”

도월이 다시 앞서 나갔다.

그때, 행랑아범이 화들짝 놀라며 도월의 등 뒤에 달라붙었다.

“어허.”

도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저기.”

행랑아범이 손가락으로 나무 사이를 가리켰다.

한 여인이 나무 뒤에 숨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 너냐.”

도월이 성가시다는 듯이 흘긋 보자 여인이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장막으로 변신한 어여쁜 여인이었다.

어째서인지 여인이 눈빛을 반짝이며 도월을 바라본다.

“연의야, 어서 가서 치료나 받거라.”

얼굴의 상처가 그대로였다.

세 사람은 푸른 장막이 두려우면서도 어여쁜 여인의 얼굴에 난 상처는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다.

사실 상처를 치료해 줄 주인이 도월을 상대하느라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 여인이 수줍게 손을 꼼지락거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눈이 더욱 빛난다.

도월이 이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옜다.”

도월은 어디서 난 것인지 커다란 주머니를 던졌다.

여인이 주머니를 열어보고 해맑게 웃는다.

약과가 든 주머니였다.

주머니를 받은 여인은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이미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멀리.

도월과 일행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정호의 목소리였다.

“뭔가.”

도월이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아, 아닙니다.”

불현듯 떠올랐다.

어디서 봤는지 이제야 생각이 난 것이다.

이담이라는 자를.

전 대감에게 꽃잎을 전해 달라던 그 청년이었다.

묘하다고는 생각했으나 진짜로 인간이 아니었을 줄이야.

동시에 정호는 마음이 놓였다.

그라면 제 딸을 정말로 잘 보살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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