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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호 Aug 28. 2021

슬기로운 음주생활

 나는 술을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술자리를 좋아한다. 처음 술을 마신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술자리 시작을 기념하며 한 잔 마시고, 게임에서 지면 한 잔 마시고, 화장실에 갔다 오면 새로운 사람이 왔다며 한 잔 마시는 곳이었다. 처음 마셔 본 소주는 생각보다 역했다. 유행하던 과일 소주는 더더욱. 학생회관 바닥에 둥글게 앉아 술 게임을 했다. 술은 맛이 없었지만, 술 게임은 재밌었다. 딸기 게임, 두부 게임, 후라이팬 놀이, 그랜다이저 등. 게임을 못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선배들의 공격에는 당해낼 수 없었다. 비워낸 술잔의 개수가 늘어났다. 기분이 좋아지고 발음이 꼬이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신기했다. 


 처음 필름이 끊기던 날을 기억한다. 1학년 1학기 종강총회였다. 한 학기 동안 수없이 마신 술 덕분에, 그 역한 느낌에도 어느 정도 적응된 상태였다. 과제와 시험공부로 스트레스를 받던 차에 가지게 된 술자리가 반가웠다. 첫 잔이 달았다. 그때 멈췄어야 했는데. 게임을 하다 짠을 하고, 이야기를 하다 짠을 하고. 잔 수를 세지 않은 채 술을 마셨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침이었고, 나는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내 머릿속에 있는 기억을 가위로 싹둑 오려낸 느낌이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 내가 있는 건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 ‘나’는 말이 많았고, 목소리가 컸으며, 술을 끊임없이 마셨다. 취할수록 술을 더 마시는 위험한 술버릇을 알게 된 것도 그날이었다.


 그 후로도 셀 수 없이 많은 술자리가 있었다. 대부분 취했고, 종종 필름이 끊겼으며, 가끔은 울었다. 적당히 취했을 때의 알딸딸함을 즐기기도 했다. 술기운을 빌려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을 한 적도 많았다. 친구의 슬픔을 위로해주었고, 기쁨을 축하해주었다. 나 역시 슬픔을 위로받고, 기쁨을 축하받았다. 어색했던 친구와 말을 트고 즐겁게 술을 마셨다. 다음 날 다시 어색해진 경우도 있었지만, 아닌 경우도 많았다. 웃긴 사진을 찍었다. 다들 얼굴이 빨갛고 눈이 풀려있는 사진. 알 수 없는 표정과 자세를 취한 사진. 평생 가지고 갈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주로 마시던 술은 소맥이었다. 소주와 맥주를 적당한 비율로 따르고 젓가락이나 숟가락으로 휘휘 저은 다음 짠. 소주처럼 역하지도 않고, 맥주처럼 약하지도 않았다. 가끔은 학교 근처 오래된 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정확히는 막소사. 막걸리, 소주, 사이다를 한 병씩 주전자에 넣어 사발에 따라 마시는 술이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마시는 술의 종류가 늘어났다. 회가 안주면 청하를 마시고,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는 와인을 마셨다. 독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술의 맛을 즐기기 시작했다. 쓰다 보니 정정해야겠다. 나는 술자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술도 좋아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독일 뮌헨에서 열린 옥토버페스트에도 갔었다. 세계 최대 맥주 축제에는 유명한 양조장들의 천막과 놀이기구가 있었다. 거대한 천막 안에 서서 1리터짜리 유리잔에 담긴 맥주를 마셨다. 맛있었다. 빠르게 잔을 비우고 술을 잘 못 마시는 친구의 맥주도 대신 마셔주었다. 일반 맥주보다 도수가 세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어쩐지. 그날 필름이 살짝 끊겼다. 드문드문 남아 있는 기억 속에서 나는 관람차를 탔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맨정신이라면 탔을 리가 없는데. 술기운 덕분인지 하나도 안 무섭고 재밌었다. 심지어 그 관람차는 속도가 일반 관람차의 10배 정도 됐었는데도 말이다. 다음날 숙취 때문에 고생했지만, 옥토버페스트에서 마신 맥주는 내가 마셔본 맥주 중에 가장 맛있었다. 또 가고 싶을 정도로.


 이제는 적당히 술을 마시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해가 갈수록 눈에 띄게 숙취가 심해지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주량을 초과해서 마시면 다음 날이 너무 힘들다. 직장인이 되어 마음대로 늦잠을 잘 수 없는 것도 큰 이유 중에 하나다. 예전에는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이면 그냥 수업을 빠지고 더 자곤 했다. 지금은 그럴 수 없으니 취할수록 더 마시는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래도 고쳐야지, 나의 길고 건강하고 즐거운, 다시 말하자면 슬기로운 음주생활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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