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라진 존재를 만나러 가는 길

by 남효정

타박타박 걸어간다.

긴장된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이 석양에 반짝이는 듯했다.

지금 우리는 우리에게 소중한 한 존재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 애써 침착한 얼굴로 일상의 대화를 나누며 장례식장을 향해 걷고 있다.


낡은 아파트 배관에서 누수가 되어 우리는 살고 있는 상태에서 수리를 하고 도배도 새로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우리는 오늘 아침 일찍 집을 나와 인근 카페에 자리를 잡고 누적된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아침이고 커피내음이 가득한 카페에서 오월의 싱그러운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바람에 흔드리는 모습을 가끔씩 바라보다가 이야기를 하다가 중간중간 집으로 가서 공사 진행상황을 본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렇게 분주하지만 감당할만한 토요일의 오전을 보내고 있었다.


태블릿으로 책을 보다가 그는 매너 모드로 전환한 핸드폰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큰형수님이다.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하다. 귀에 전화기를 댄다. 눈이 순식간에 빨갛게 충혈된다. 알겠다고 자기가 다 연락하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고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창밖으로 나가 한참을 서 있다고 들어왔다.


울음소리.

아이처럼 그냥 울기만 하는 이제 칠순이 가까워진 형수님의 전화.

그 울음은 그동안 심장이 좋지 않아 수시로 병원을 드나들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던 남편 옆에서 묵묵히 자신의 삶을 버티고 있던 한 사람의 허물어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절규처럼 느껴진다.


그는 수염을 기른다. 해보고 싶었는데 회사를 다니느라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한 번 해보기로 한 것이다. 흰 수염과 검은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에 슬픔이 가득 찬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될 공사 덕분에 오늘 새벽까지 짐들을 옮기고 정리하느라 피곤한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갈색 물감을 섞다가 검은색 물감을 그 위에 엎지른 듯 그는 순식간에 5년쯤 더 나이 든 사람이 되어버렸다.


맏형은 키가 작았다.

중학교 때부터 작은 송방을 하며 국수까지 뽑아 파는 아버지를 도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국수를 뽑았다.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해 형은 키가 자라지 않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형의 성적은 매우 좋았고 그것은 부모님에게 자랑이었다. 하지만 아래로 네 명의 남동생을 거느린 맏형은 빨리 기술을 습득하는 전문대학교에 진학하고 바로 튼튼한 직장을 잡아 평생 그 직장을 다니며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형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어.

그림이나 음악도 좋아하고 탁구나 자전거 타기도 즐겼었어.

우리 형제들 중에 가장 많은 다방면에 재주와 관심을 가진 사람이지.

머리도 좋고 하고 싶었던 일도 많았을 거야. 하지만 늘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가족들과 부모님, 동생들을 먼저 생각했어. 승진 타이밍에도 민주화 투쟁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동생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승진시험을 놓치곤 했어. 그래서일까..... 형은 밝고 유머러스했지만 때때로 쓸쓸해 보였어.


비 온 뒤 보도는 촉촉하게 젖어 있다. 우리는 걷는다. 사라진 그 소중한 존재를 만나기 위해서. 병원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이 이지러진다.


루이제린저는 '생의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두컴컴하고 출구 없어 보이는 복도를 무한히 걸어갈 때면 너는 언제나 문을 열어주었고 햇빛이 찬란한 넓은 평야의 광경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 평야에 내가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으나 그 광경만이라도 나를 최후의 절망에서 구제했다."


나는 그가 맏형을 말할 때마다 이 문장이 생각난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도 각각의 역할과 성장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은 각각 다르다. 가장 먼저 철이 들어 가난하지만 반듯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부모님을 바라보는 맏형은 자신의 동생들에게 빛이 되어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형은 아름다운 흰 꽃들 사이에 날아갈 듯 가볍고 행복한 웃음을 지은 체 동생을 맞았다. 몸을 구부려 이마가 땅에 닿게 천천히 절을 올린다. 별안간 아버지라는 큰 존재를 잃은 두 아들과 제대로 서있기도 힘든 나이 든 아내가 거기 서 있다. 슬픔을 안으로 삼키고 겨우 서 있는 사람.


그 텅 비고 희미한 미소를 애써 띄운 바로 그 눈을 보는 순간

나는 울음이 터져 그 사람을 두 팔을 벌려 안는다.

내 눈을 보고 그 눈이 울고 있다. 괜찮다고 나는 괜찮다고 한다.

그 참았던 울음이 폭포처럼 내릴 때 나는 비로소 한 존재의 사라짐을 직면했다.



있잖아. 나는 힘들 때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달을 설정해 놓는다.

이렇게 하면 이상하게도 세상이 중요하다고 나에게 강요하는 일들에 대해 담담해져.

저 달에서 보면 지구는 그저 파란 행성

우주에서 보면 달도 지구도 너무나 작은 별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하는 일은 그저 꽃이 피고 지는 일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날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떤 어려움에도 담담하게 씩씩하던 나는 존재의 사라짐 앞에서는 단박에 무너진다.


우리 아이들 손을 잡고 장난스럽게 말을 걸던 그 눈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아이가 고른 놀잇감을 넘치게 안겨주시던 그 손

작은 체구에도 온 집안의 형으로 중심을 잡아 주시던 모습

생신에 내가 딱 한 번 사드린 빨간 장미다발에 감동하시던 모습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갖고 한 번씩 이것저것 물어주시던 따뜻한 목소리

그 모든 것의 위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유머러스함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이제는 그리움이다.


별에서 온 우리는 모두 언젠가 별로 돌아간다.

나도 그리고 그대도.

그곳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는 없으나 소중한 존재가 사라지는 일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별이 하나 떨어져 내리는 일이기에 가슴 깊이 슬프고 애통하다.


지구별에서의 고단하고 성실한 삶을 살다 간 다정한 존재에게 그리움과 감사함을 보내며 우리는 타박타박 왔던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 웬일인지 우리는 좀 더 걷는다. 동네 편의점에서 컵라면에 물을 부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늘을 본다.


메타세쿼이아 쭉쭉 뻗은 나무 사이에 달이 참 곱다.


우리는 말없이 말한다.


그동안 함께 해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당신의 삶은 아름답고 빛났습니다.

늘 기억할게요. 그곳에서 편안하게 쉬시길 기도합니다.

하얀 데이지꽃이 흐드러진 들판을 걸어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그려줘.png 반짝이던 존재의 사라짐_ 이미지 Copilot+남효정




#존재의 사라짐 #별 #걷기 #루이제린저 #생의 한가운데 #남효정 놀이와 교육 연구소





2025년에도 고요하게 성실하게 쓰고 꾸준히 성장하는 작가가 되렵니다.

출판 및 강연, 전문가 협업 제안은 댓글 및 제안하기 기능을 활용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07:00 발행[엄마도 그림책 좋아해]

화 07:00 발행[달콤한 창작의 공간 2]

07:00 발행[이제 꽃을 보고 시를 씁니다 4]

수, 금 07:00 발행 [아이를 살리는 놀이]

토 07:00 발행 [기타, 와플 그리고 파란 캠핑카]

07:00 발행 [오늘 나는 걷는다 1]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28화중랑캠핑숲을 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