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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로 Aug 14. 2022

흑백필름

시작의 끝 



사진을 찍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이 카메라에 내장되어 있는 필름이 흑백이라는 것을. 이 흑백의 세계 속에 다시는 보지 못할 당신의 몸동작이, 얼굴이, 시간이 담겨 있다. 우리는 사진을 나눠가지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흑백필름을 여전히 인화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 우리가 우리라고 불리던 과거는 끝이 났고 순간을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이 박제된 필름엔 먼지가 내려앉는다. 과거를 찬찬히 살펴보지 못한다는 건, 그러니까 용기와는 무관하게 희끄무레해진 감정을 핥을 마음이 없다는 것. 나는 여전히 담담해지지 못한다.  


당신이 떠나고 나서도 부유하고 있는 미움은 끝나지 않는다. 미움은 사랑으로 쉽사리 치환되고 사랑과 미움을 분간하지 못하는 새벽, 당신은 흑백의 꿈으로 나타난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주 쉽게 미움을 덜어내고 사랑을 말한다. 꿈은 인화되지 못한 필름처럼 눈을 뜨는 순간 사라진다. 아마도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사진을 인화하지 못할 것이다. 불확실한 세계에 당신은 당신으로 남고, 우리는 우리가 아닌 채로 남을 것이라는 단 하나의 확신. 흑백의 필름은 인화되지 못한 채 남을 것이라는, 사실 하나. 


여름, 그렇게 한 시절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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