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해 왜 성을 짓고 7년 동안 군대를 주둔시켰던, 사천 선진리에 교토의 비총 봉토를 가져와 위령비를 세우고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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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있는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 세워져 있던 '耳塚' 위령비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耳塚'은 우리말로 '귀무덤'으로 귀가 묻혀있는 무덤이다. 그러나 조명군총 옆에 세워져 있는 것은 '위령비'일 뿐 귀가 묻혀있지는 않다. '耳塚'의 원형은 일본 교토시에 있는 '鼻塚(비총), 일본말로 하나즈카, 코무덤'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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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시에 현존하는 '鼻塚'은 400년 전인 정유재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묻은 무덤이다. 말만 들어도 섬뜩한 이 참상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한국 측에서는 1990년 부산 자비사의 박삼중 스님을 중심으로 코무덤의 흙 일부를 봉환하여 사천시의 조명군총 옆에 묻었다. 이때 코무덤을 나타내는 '鼻塚'이라는 비(碑)를 세웠어야 하지만, 귀무덤을 뜻하는 '耳塚'이라고 새겨둔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사실 조명군총 옆에 있던 '耳塚' 비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최진갑 박사가 처음이 아니다. 기자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한겨레>가 2010년 공동 주최한 '경술국치 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에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과 함께 동행 취재한 바 있으며 이후 사천, 부안 호벌치, 일본 교토 등을 오가며 취재하여 수차례에 걸쳐 '교토 코무덤이 귀무덤으로 둔갑되었다'라는 기사를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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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찌하여 이 무덤의 이름이 '귀무덤'으로 왜곡된 것일까? 그것은 에도정부의 참모였던 젊은 학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의 "코무덤은 잔인하므로 순화하여 귀무덤으로 부르자"라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주장 때문에 교토의 코무덤은 귀무덤으로 둔갑된 채 오늘에 이르렀고, 경남 사천시의 조명군총옆에도 '耳塚' 위령비가 세워진 것이다.
<한겨레> 4백 년 떠돌던 '귀무덤' 원혼 돌아온다(1990.04.20.)
<MBC> 임진왜란 때의 귀무덤 400년 만의 귀환(1990.04.22.)
<국민일보> 귀무덤 원혼들 (1990.04.24.)
<중앙일보> 귀무덤 원혼 고국 안치 /부산 동명불원에(1990.04.24.)
<동아일보> 귀무덤 '이총' 새 안식처(2007.10.01.)
국내 보도가 이렇게 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코무덤'이 있는 교토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교토시가 코무덤의 안내판(1979)을 세울 때 '耳塚'이라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는 '耳塚(鼻塚)'으로 바뀐 상태다.
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기자는 지난 11월 24일 자로 교토시 문화시민국 문화예술도시추진실 문화재보호과(京都市文化市民局文化芸術都市推進室文化財保護課)에 질의를 했다. 기자는 교토 코무덤의 최초 안내판 설치 일자와 그 내용, 현재 안내판의 설치 일자와 그 내용 및 사진에 대해 물었고, 며칠 뒤 담당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답변과 현장 사진을 받았다.
"최초의 안내판 설치는 소화 54년 7월(1979.7.)이며, <耳塚(鼻塚)>이라고 병기하게 된 것은 평성 15년 3월(2003.3.)이다. 변경한 까닭은 예부터 <鼻塚>이라고 불려오던 적이 있다는 설이 있어서 <耳塚(鼻塚)>이라고 표기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여 안내판을 수정했다."
그러나 담당자인 이에하라 씨의 답변 중 "예부터 '鼻塚'이라고 불려오던 적이 있다는 설이 있어서 '耳塚(鼻塚)'이라고 변경했다"라는 답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토 코무덤은 조성 당시부터 줄곧 '鼻塚'이었고, 근거가 불명확한 '설(設)'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명확한 근거들이 문헌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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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근거로 메이지시대 도쿄제국대학 교수였던 호시노 히사시(星野恒 1839~1917) 박사의 논문만큼 명백한 자료도 없다. 호시노 교수는 '교토 대불전 앞의 무덤은 코무덤이며 귀무덤이 아니다(京都大仏殿の塚は鼻塚にして耳塚にあらざる)'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단연코 이 무덤이 '코무덤'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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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노 박사의 논문보다 250년이나 앞선 기록인 1620년의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에도, "이총(耳塚), 대불전(大佛展) 앞에 있다. 세상에서는 이총(耳塚)으로 부르나 사실은 비총(鼻塚)이다. 1597년 가등청정(加籐淸正), 소서행장(小西行長) 등이 조선인의 코를 베어 온 것이다. 두 장수의 병력은 20만으로 1인당 조선인의 코 3개를 베어오라고 했다. 조선에서는 감독관이 이를 확인하여 소금에 절여 보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일본 구참모본부가 펴낸 <일본전사(日本戰史)> 속의 <청정고려진각서(淸正高麗陳覺書)>에도 교토의 무덤이 '코무덤'임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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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 호벌치에도 '코무덤'이 있습니다. 이곳은 코무덤만 있고 30년째 추모비와 안내판 없이 방치되었습니다. 지난 1월 국민신문고에 이곳에 대한 민원을 냈고 12월 말까지 추모비와 안내판을 설치하기로 하여 제작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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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무덤 원혼들이 봉분 위 수십 톤 무게의 돌덩어리에 눌린 채 이역 땅에 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차선책으로 경주 천마총처럼 교토시 코무덤 봉분 옆에 구멍을 뚫어 봉분 속에 있는 순수 코무덤 유토만 봉환해 오고 봉분은 그대로 유지시키는 방법으로 교토시청과 협의를 해야 합니다."
위의 기사에 따르면, '부산외국어대학교의 최진갑 교수님'의 노력에 의해 사천의 귀무덤 위령비 명칭이 코무덤 위령비로 바뀌는 개선이 이루어졌다.또한, 교토의 이총 안내판도 초기 '이총'표기만 있던것이 (비총)' 표기가 추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남 사천 이외에 부안군 호벌치에도 코무덤이 있지만, 오랜 기간 동안 추모비가 없다가 2022년도에 비가 세워졌음을 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작년 4월에 통화했던 전 부산외국대학교 최진갑교수입니다. 지난 주말에 부안군 호벌치에 다녀왔습니다.
2022년 1월에 국민신문고에 호벌치 코무덤 안내판 및 추모비 설치 민원을 올렸었는데, 다행히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신청한 지 거의 1년 만인 2022년 12월 5일부로 호벌치 코무덤에 안내판 및 추모비가 설치되었습니다."
실질적인 임진왜란-정유재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막을 내렸고, 공식적인 침략전쟁의 마무리는 그 이후의 일이며, 전공으로 가져온 조선인들의 코는 전국각지의 무사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간 후, 함부로 버릴 수 없으니, 이렇게 흩어져 안치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위 영상에서는 '부산외국어대학교의 김문길 교수님'께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구마모토의 코무덤 존재와 일본에서 알려진 코무덤이 6개 있음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