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심한 삘릴리 Sep 03. 2022

잔소리의 역습

이것도 복수가 되나요?

  세탁기가 경쾌한 멜로디로 수경을 부른다. 힘든 빨래를 다 끝냈으니, 어서 빨래를 꺼내가라며 그녀를 재촉한다. 수경은 앞 베란다로 나가 빨랫대를 펴고, 세탁실로 향한다. 아, 오늘따라 빨래 널기가 귀찮다. 햇살이 쨍쨍하기로 유명한 집에 사는 그녀는 아직 건조기를 구매할 의사가 없지만, 아주 가끔 오늘처럼 빨래 널기가 귀찮은 날은 건조기 생각이 간절해진다.

  방금 세탁을 마친 세탁물을 세탁바구니에 담으며 수경이 습관처럼 코를 끙끙거린다. 빨래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는 라벤더향이 향기롭다. 살짝 기분이 좋아진다. 어서, 빨래를 널고 산책이라도 나가야겠다.   

  낑낑거리며 세탁바구니를 들고 앞 베란다로 가던 수경이 우뚝 걸음을 멈춘다. 아, 앞 베란다에 펼쳐 놓은 빨랫대가 안 보인다. 그녀가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는 잠깐 사이에, 3분도 되지 않은 그 짧은 시간에 또 빨랫대가 사라졌다. 보나 마나 시어머니 강 여사 소행이다. 참 날쌘 다람쥐가 따로 없다. 한두 번도 아니고 정말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다. 수경의 표정이 굳어지며 살짝 혈압이 오른다.


  "어머니, 베란다에 있던 빨랫대 치우셨어요?"

  "아니."

  "아이참. 지금 집에 어머니랑 저 둘뿐인데, 그럼 누가 치웠을까요?"

  "아... 내가 그랬구나. 난, 네가 잊어버리고 안 치운 줄 알았지."

  "세탁기 돌리는 거 보셨잖아요. 그리고 제가 해놓은 일은 그냥 놔두시라고 계속 말씀드리는데... 백 번도 더 말씀드린 것 같은데, 왜 자꾸 잊어버리세요?"


  귀가 잘 안 들리는 강 여사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수경은 본의 아니게 꽥꽥 언성을 높이고 있다. 단전에 힘을 주고 소리 높여 말을 해도 의사소통은 점점 힘들어진다. 가뜩이나 목소리가 작은 그녀는 시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집안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곤 하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본다면, 세상 버르장머리 없는 며느리가 따로 없다고 오해할 것 같다. 그래서 수경은 강 여사와 한바탕 큰 목소리 대화를 끝낼 때마다 "아, 다음부터는 어머니랑 이런 일로 집안 떠들썩하게 하지 말자"라고 다짐하는데, 그 결심이 며칠을 못 간다. 그게 문제다.   

 

  지나고 나면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일들과 딱 맞닥뜨리는 순간 수경은 와락 올라오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결국 시어머니에게 건의를 가장한 잔소리를 늘어놓고 만다. 예를 들어 수경이 애써서 신문지와 종이들을 분리수거해놓았는데, 강 여사가 거기다 비닐과 쓰레기들을 잔뜩 버려놓는다던가, 환기를 하려고 수경이 집안 곳곳의 창문을 열어놓았는데 어느새 강 여사가 다 닫아버리는 경우다. 조금 전처럼 빨래를 널려고 펼쳐놓은 빨랫대를 치워버리는 일은 수시로 일어나고, 덜 마신 주스 통을 분리수거 가방에 거꾸로 넣어서 가방을 온통 끈적끈적하게 적셔버릴 때도 많다. 매번 전기주전자에 생수를 가득 따라놓아서  급하게 물을 조금만 끓이려던 수경이 낭패를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먹던 음식을 남겨서 여기저기 놓아두는 바람에 상한 음식 테러를 당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마다 수경은 강 여사에게 항의하듯 언성을 높였었다.

 

  "어머니, 왜 자꾸 쓰레기를 분리수거한 종이에다 버리세요?"

  "어머니, 창문 닫지 마세요. 환기하려고 일부러 열어놓은 거예요."

  "어머니, 자꾸 빨랫대를 치우시면 어떡해요?"

  "아이고 어머니, 덜 마신 주스 통을 이렇게 버리셔서 가방이 다 젖었잖아요?"

  "어머니, 제발 전기주전자에 생수를 가득 따라 놓지 마세요."

  "어머니가 소파 뒤에 감춰둔 음식이 상해서 냄새가 진동하잖아요. ㅜㅜ"


  수경은 강 여사가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을 꺼냈었다. 그래서 힘껏 목청을 높이며 시어머니께 이런 당부를 했었다.  '어머니, 다음부터 비닐은 꼭 비닐 버리는 통에,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넣어주세요.' '환기 중에는 제발 창문을 닫지 말아 주세요.' '어머니. 제발 제가 집안일을 할 때는 그냥 지켜봐 주세요.' '분리수거하기 힘드시면, 제가 할 테니까 그냥 놔두세요.' '어머니, 제발 전기주전자에 생수를 많이 넣지 마세요. 뚜껑도 꼭 닫으시고요.' '음식이 남으면 그냥 버리세요. 나중에 썩혀서 버리지 마시고요.'


  사실, 강 여사는 남의 말을 안 듣기로 유명한 분이었다. 자신만의 세계가 강한 성격 탓에 시어머니는 시아버지와 갈등도 심했다고 한다. 그런 양반이 귀까지 안 들리니 타인의 말을 더 안 듣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런데 남의 말 안 듣기로 유명한 강 여사는 아실까? 수경 역시 한때 한 고집하던 인간이었다는 것을? 그런 수경이 시어머니에게 절대복종해야 하는 시집살이의 시간을 어떻게 버티고 견뎌왔는지를?

  젊은 날 수경의 일상은 늘 강 여사의 잔소리와 함께였다. 살림 솜씨가 미숙했던 수경의 탓도 있었지만, 강 여사의 급한 성격으로 인한 잔소리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설거지를 하는 수경에게 청소를 하라는 오더를 내렸다면, 강 여사는 수경이 설거지를 마치는 순간까지, 왜 빨리 청소를 시작하지 않느냐며 잔소리를 하는 성격이었다. 수경이 그릴에서 생선을 구울 때는 행여 생선을 태우기라도 할까 봐 3분 간격으로 잔소리 폭탄을 쏟아냈다. 저녁을 지으려고 부엌으로 나가는 수경의 뒤통수에 대고, "쌀 씻을 때 물 낭비를 하지 말아라" "음식 간을 좀 세게 해라" "김치를 더 예쁘게 썰어내라" 등등, 그날의 강 여사 기분에 따른 잔소리 세트가 차례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 강 여사의 잔소리가 버겁고 불만이었지만, 수경은 아무런 반항이나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니, 시어머니가 어렵고 무서워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이렇게 그녀가 착하다 못해 바보 같은 며느리였다는 것은 강 여사도 인정했다.     


  "가끔 살림을 가르친다는 핑계로 너를 혼내고, 나도 가슴 철렁한 적이 많았단다. 내가 너무 심했구나 싶었거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성격이 좀 불같잖니. 그런데 내가 혼자 가슴 졸이고 있다 보면 네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다시 다가왔었지.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웠는지 모른단다."


  호랑이 시어머니 강 여사는 언젠가 고해성사하듯 수경에게 이런 고백을 했었다. 그때는 강 여사 귀에 문제가 없을 때라 고부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참 많이 나누던 시절이었다. 시어머니의 뜬금없는 고백에 수경은 시어머니의 막말로 응어리졌던 마음을 스르르 풀어버렸던 것 같다.  


 빨래를 널던 수경이 거실로 눈을 돌렸다. 소파에 앉아 무료한 얼굴로 TV 채널을 돌리고 있는 강 여사가 왠지 짠해 보인다. 여전히 허리는 꼿꼿해도 구부정해진 등에는 그녀가 비껴가지 못한 세월의 흔적이 서려있다. 시간의 덧없음이 새삼 측은하다. 조금 전에 빨랫대 때문에 언성을 높인 것이 괜스레 후회된다. 에잇! 조금만 참을 걸. 그녀 역시 젊은 날의 강 여사처럼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잔뜩 한 것 같아 찜찜하다. 수경의 입장에서는 시어머니한테 의견을 피력한 것이지만, 강 여사 입장에서는 며느리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들은 셈이니 속이 쓰리실 것 같다. 아, 이 잔소리의 역습을 어찌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새아가, 출근 전에 집안일 다 하고 가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