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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7.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15편

                                               12

                            5월 21쌩뽈 드 방스     


  “오 마이 갓! 숙, 여기 봐! 바닥에 꽃이 피었어.”


  생뽈 드 방스에 도착한 순간부터 들떠있던 쥬디가 길바닥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른다. 조약돌로 심어놓은 돌꽃들이 화숙의 발아래서 웃고 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골목길이 있다니… 화숙의 가슴도 봄처녀처럼 두근거린다. 화숙과 쥬디는 어린아이처럼 신나서 생 뽈 드 방스의 골목길을 걷는다. 길 양옆으로는 화사한 갤러리와 아기자기한 부티크가 들어서 있다. 아트갤러리에 걸린 그림과 조각품의 수준도 높아 보인다. 

  화숙은 이곳을 왜 예술가의 마을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부티크에 전시된 샤갈 풍의 기념품들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쥬디가 기념품 가게 앞을 떠나지 못하는 화숙의 손을 잡고 언덕 위에 있는 생 뽈 교회로 향한다. 

  키 큰 종려나무와 어우러진 교회의 돌담이 햇살을 받아서 하얗게 빛나고 있다. 13세기에 지어진 교회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정갈하다. 쥬디는 교회 주변을 서성이는 화숙을 앞장세워 용감하게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 채광이 잘 된 교회에서는 마침 결혼식이 열리고 있다.      




  친정엄마의 기우대로 화숙의 결혼생활은 가시밭길이었다. 남편은 일을 핑계로 밖으로 돌았고, 그녀는 시어머니의 그늘에 갇혀 버렸다. 시어머니는 보잘것없는 화숙을 무시하고 미워했다. 이화여대를 나온 시어머니가 여상 출신 며느리를 들인 것은 일대 사건이었고 수치였다. 


  “얼마나 처녀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혼전 임신을 했겠니. 가진 게 없으면 배운 거라도 있어야지. 쯧쯧”


  시어머니가 조용조용 톤 하나 바뀌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양으로 무장한 시어머니의 말투는 상대방의 기를 죽이는 힘이 있었다. 능숙한 칼 놀림으로 상대를 쓰러트리는 무사처럼 시어머니는 조용히 화숙을 제압했다. 

  시어머니는 또, 겉마음과 속마음이 다른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며느리와 단둘이 있을 때와 제삼자가 함께 있을 때, 시어머니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남편 앞에서도 그랬다. 아들이 집에 있을 때는 천사였다가, 출근과 동시에 악마로 변했다. 시어머니의 이론은 단순했다. 살림을 가르치려니 엄한 시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제삼자 앞에서는 며느리 체면을 살려주느라 인자한 시어머니 노릇을 한다고 했다. 

  집안 살림을 가르친다는 시어머니는 화숙에게 설거지와 청소만 시켰다. 화숙이 혼수로 준비한 남대문시장 표 그릇들이 시어머니가 쓰던 포트메리온 그릇에 밀려난 것처럼, 시어머니의 부엌에는 화숙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시어머니는 남편을 위한 밥상은 물론이고 자신이 먹을 점심상도 직접 차렸다. 요리할 때도 화숙은 이방인이었다. 그녀가 하는 일은 항상 재료를 다듬고 씻는 일과 설거지였다. 시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훌륭했다. 남편은 정갈하고 깔끔한 시어머니의 음식에 완벽하게 길들어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시어머니의 이중 잣대는 그대로 나타났다. 남편이 있는 식탁에서는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며느리를 대했고, 입에 바른 칭찬도 해주었다. 화숙과 단둘일 때, 시어머니는 표정부터 달라졌다. 고장 난 녹음기처럼 독설과 잔소리를 반복했다. 밥을 먹는 일도 고역이었다. 화숙의 몸은 점점 야위어갔다.  


  “시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던 다 참고 순종해야 해. 알았지?”

  “알았어.”

  “최 서방에게 절대로 시어머니 흉도 보지 말고.”

  “시집살이하면서, 남편한테 하소연도 못 해?”

  “남편을 뭐 하러 힘들게 해? 현명한 아내는 고부간의 일로 남편을 힘들게 하지 않는 거야. 기왕 시집살이하겠다고 나섰으니, 다 네 업이려니 생각하고 참아야 하는 거야.” 


  결혼 전날, 친정엄마는 화숙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딸의 고된 삶을 예견하고 결혼을 반대했던 친정엄마였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엄마는 화숙이 부잣집에 시집가서 음전하게 살기를 바랐다. 

  화숙은 친정엄마의 가르침에 따랐다. 매사에 참고 순종하려고 애썼다. 남편에게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고 위로받고 싶었지만 참았다. 

  무작정 참고 견디는 일은 쉽지 않았다. 화숙의 얼굴에 깊은 우물처럼 진한 그늘이 생겼다. 표정은 초상집의 곡비처럼 침울해졌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시어머니의 독설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화숙의 마음을 헤집었다. 저주받은 새처럼 그녀의 몸은 말라비틀어졌다. 

  마음을 다친 화숙은 견딜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을 참아내기도 힘들었다. 결혼하고 남편은 딴사람이 됐다. 일중독 증세가 심해졌고, 툭하면 화를 냈다.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는 예민한 성격으로 변했다.      


  “당신 결혼하고 사람이 완전히 변한 거 알아?”


  남편은 사소한 일로 신경질을 부릴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적반하장이었다. 환하게 웃던 화숙이 예뻐서 결혼했는데 매일 우거지상을 한다며 기분 상해했다. 부부의 잠자리도 뜸해졌다. 화숙은 시집살이에 지쳐서, 남편은 일에 쫓기느라 서로의 존재에 무심했다. 무늬만 부부인 삶이 계속됐다.   

  화숙의 인내는 한계에 달했다. 시어머니의 독설을 가까스로 견뎌내던 그녀의 신경 줄이 툭 끊어지던 날, 남편에게 시집살이의 실상을 털어놓고 말았다. 모자 사이를 갈라놓을까 두려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우였다. 남편은 화숙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끝까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시어머니의 인격을 왜곡한다며 화를 냈다. 


  “어머니를 잘 모실 것 같아서 결혼했는데… 당신. 이제 보니 못된 여자구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럼, 어머니 때문에 나랑 결혼한 거예요. 당신?”

  “아. 몰라 몰라.”


  남편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 벌러덩 누워버렸다. 시어머니를 잘 모실 것 같아서 결혼했다는 남편의 말이 화숙의 가슴에 박혔다. 그러고 보니, 남편은 청혼할 때도 자신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홀어머니만 잘 모셔주면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를 고등학교만 나온 만만한 여자로 본 거잖아요?”

  “갑자기 여기서 학벌 타령이 왜 나와?”
   “그렇잖아요. 대학 나온 여자들은 시어머니를 안 모시려고 하니까… 그리고 당신, 왜 약속 안 지켜요?”


  남편은 결혼하면서 그녀의 대학 입시를 돕기로 약속했다. 재수학원도 알아봐 주기로 했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녀는 고된 시집살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공부와 멀어지고 있었다. 


  “좋아요. 내가 다른 건 다 넘어갈게요. 당장 학원에 등록시켜줘요.”

  “지금 당신한테 대학이 왜 필요해?”

  “그걸 몰라서 물어요?”

  “솔직히 여자들, 시집을 잘 가려고 대학 가는 거 아니야? 당신은 대학 나온 여자들보다 결혼을 잘했는데 뭐 하러 대학을 가? 그거 다 시간 낭비고 허영이야. 그리고 난 지금, 당신한테 만족해. 당신이 대학을 나온 그 어떤 여자들보다 똑똑하고 지혜롭다는 거, 남편인 내가 알고 있으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화숙은 절벽 앞에서 등 떠밀린 기분이었다. 대학의 꿈을 이렇게 허망하게 내려놓으려고 친정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건 아니었다. 대학 진학 문제로 남편과 언쟁이 계속됐다. 안타깝게도 화숙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남편의 황당한 논리를 당해낼 수 없었다.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려 놓고도 남편은 미안해하지 않았다. 자기만의 논리에 휩싸여 대학의 불필요성을 역설했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았다.  

  점점 멀어져 가는 대학의 꿈은 화숙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시어머니는 화숙의 학벌을 무시하면서도 며느리가 공부를 핑계로 집안일을 소홀히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넋 놓고 당할 수는 없었다.     


  “저, 학원에 등록했어요.”


  저녁을 먹으며 화숙이 폭탄선언을 했다. 아들을 의식한 시어머니가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끝까지 대학을 가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는 며느리가 못마땅하다는 표현이었다. 


  “내일 당장 물러.”


  남편이 화를 누르며 말했다.


  “싫어요.”

  “끝까지 고집부릴 거야 정말?”


  남편의 언성이 높아졌다. 곧 그녀의 철없음을 나무라는 폭언이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위선자.”


  화숙이 조용히 남편을 쏘아보며 말했다. 남편은 일시 정지 상태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화숙은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입시도 결혼생활도 마지노선에 다다랐다고 느꼈다. 그래서 고집을 꺾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남편의 눈을 응시했다.

   그 순간,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식탁 위의 그릇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깨진 그릇 파편이 여기저기 뒹굴었다. 시어머니가 놀란 얼굴로 뛰어나왔다. 

 식탁을 엎은 남편은 분이 덜 풀린 얼굴로 화숙을 노려보았다. 화숙의 시선이 흔들렸다. 눈앞의 광경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아내를 제압했다는 만족감으로 남편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무너지는 그녀를 멸시의 시선으로 일별 한 뒤, 유유히 방으로 들어갔다. 대등했던 화숙과 남편의 관계가 끝나던 순간이었다. 


  “어서 치우 거라.”


  날카로운 시어머니 목소리가 이어졌다. 화숙은 무기력했다.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하는데, 덜덜 떨리는 그녀의 손은 깨진 그릇을 치우고 있었다. 시집살이의 타성이 공포처럼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의 결혼처럼 박살 난 그릇 조각을 집어 드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이렇게 살 수 없어.’ 


  화숙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이혼을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아랫배에서 희미한 울림이 들렸다. 그리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몸짓처럼 힘찬 꿈틀거림. 미양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최초의 태동이었다.  


<1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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