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심한 삘릴리 Jul 06.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14편

  화숙이 엑상프로방스에 둥지를 튼 지 5개월이 지났다. 

  14년 만에 만난 엑상프로방스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마음은 더 푸근해 보였다. 도시는 오랜만에 찾아온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화숙은 유학원에서 예약해준 원룸, 스튜디오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엑상프로방스 마르세유 법과대학 부설 어학원에 등록했다. 매일 어학원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주말이면 기차를 타고 아비뇽이나 아를 같은 도시로 짧은 여행을 다니며 프로방스의 삶을 즐겼다.    

  시내에 있는 그녀의 스튜디오는 좁고 낡았지만 정겨웠다. 집 앞에는 그녀의 단골 카페도 있었다. 화숙은 외로워질 때마다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곳에는 어학원에서 배울 수 없는 프랑스어의 묘미가 가득했다. 

  프랑스어에 익숙해진 후에 만난 프로방스의 삶은 풍성하고 다채로웠다. 크고 작은 축제가 끊이지 않는 엑상프로방스에서 그녀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행복한 그녀의 일상에는 늘 쥬디가 있었다. 어학원에서 만난 미국인 쥬디는 첫날부터 화숙에게 호감을 보였다. 그녀는 메디컬스쿨 진학을 미루고 프로방스로 왔다고 했다. 운명처럼 만난 프랑스 남자 앙투완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라온 것이다. 


  “사랑을 놓칠 수 없었어. 메디컬스쿨은 다음에 갈 수 있지만, 지나간 사랑은 다시 돌아오지 않거든.”


  쥬디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대신 프로방스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며 열심히 살았다. 화숙도 그녀가 싫지 않았다. 쾌활한 수다쟁이 쥬디 때문에 생활에 활기가 넘쳤다. 당당한 그녀는 거침없이 화숙의 삶으로 들어왔다. 


  “파아 쑤우?”

  “아니. 화숙.”

  “미안. 내 발음이 너무 나쁘지?”

  “아니. 내 이름이 어려워서 그래. 그냥 숙이라고 불러.”     


  화숙과 쥬디는 시간이 날 때마다 몰려다녔다. 쥬디 덕분에 화숙의 성격도 밝아졌다. 쥬디가 여는 파티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이상하게 화숙은 한국에서라면 불가능했을 관계에 쉽게 적응했다. 딸, 미양이 또래의 쥬디와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구가 된 것이 그랬고, 프랑스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가까워진 것도 그랬다. 

  쥬디는 프로방스의 삶을 즐기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남자 친구 앙투완이 니스로 일주일간 출장을 가게 되자, 화숙까지 부추겨서 따라나섰다. 화숙이 젊은 연인 사이에 끼어들기 싫다며 거절해도 소용없었다. 


  “제발, 숙! 앙투완이 일하는 동안 같이 놀 친구가 없단 말이야. 응?”


  화숙은 쥬디의 애교에 넘어가 니스 외곽에 수영장이 딸린 메종을 빌렸다.      


  “숙! 아직 남편한테 연락 안 했어? 그러다가 정말 헤어지려고?”


  쥬디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태양을 즐기다가 뜬금없이 화숙의 사생활로 파고든다. 어제저녁, 정원 테라스에서 와인을 마시다 남편 이야기를 흘린 것이 화근이었다. 쥬디는 그녀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했다. 화숙은 가만히 눈을 감고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린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남편은 솔직하고 밝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화숙의 아킬레스건이던 학력 콤플렉스를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남편은 그녀를 고졸 여사원이 아닌 인간 김화숙으로 대해주었고, 그녀가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지 알려주던 사람이었다. 그동안 그녀의 외모에 끌려 다가왔다가, 고졸에 처녀 가장이라는 처지를 알고 달아났던 남자들과 차원이 달랐다. 

  화숙과 남편은 같은 회사에 다녔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남편이 좋았지만, 마음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훤칠한 명문대학 출신이 자신의 짝이 될 리 없다고 단정 지었다. 상처 받고 싶지 않아서 도도한 척 그를 외면했다. 뒤늦게 대학입시를 준비하느라 연애를 할 여유가 없기도 했다. 

  남편은 끈질기게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매일 밤늦게까지 화숙이 다니던 입시학원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가 공부하는 정독도서관을 찾아와 밥도 사주었다.    

  

  “나랑 결혼하자. 응? 대학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내가 보내줄게.”


  남편이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청혼했을 때, 화숙은 대답 대신 소주를 마셨다. 소주 3병을 나누어 마신 뒤에도 남편은 계속 혀 꼬부라진 소리로 졸랐다. 자신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홀어머니만 잘 모셔주면 된다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날, 화숙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한 남편을 뿌리치지 못했다. 대학까지 보내주겠다며 사랑을 원하는 그를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남편과 어색하고 침울한 회색빛 첫 밤을 보냈다. 군데군데 얼룩진 여관방 시트에는 그녀의 처녀가 묻어나지 않았다. 첫 경험의 기억은 암울했고, 얼마 후 우울한 예감처럼 생리가 끊겼다. 화숙의 임신을 확인한 남편은 잠시 당황했지만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았다. 단단한 책임감으로 무장하고, 겁에 질린 그녀를 달래며 결혼을 준비했다. 시어머니의 반대에도 당당히 맞섰다. 가출까지 감행하며 콧대 높은 시어머니의 서슬 퍼런 반대를 이겨냈다.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화숙은 용맹한 전사처럼 결혼이라는 과업을 성취해가는 남편이 듬직하고 좋았다. 그의 넉넉한 품에서 그녀는 현실을 회피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었다. 그러면서 시어머니 못지않았던 친정엄마의 반대를 이겨냈다. 그녀가 결혼을 고집하자, 엄마는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허탈해했다. 


   “병신 같은 것! 저 죽을 줄 모르고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것!”


  친정엄마는 화숙의 등짝을 후려치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해냈다. 진정으로 친정엄마는 그녀를 걱정했다. 처녀가장인 그녀의 부재로 겪게 될 경제적인 공황상태보다 앞으로 펼쳐질 딸의 고된 삶을 더 걱정했다.  

  그들이 결혼을 발표했을 때, 회사가 술렁일 정도로 가십이 난무했다. 그녀 앞에서 축하 인사를 건넨 동료들은 돌아서기 무섭게 그녀를 헐뜯었다. 여상 출신 주제에 일류대를 나온 일등 신랑감을 낚아챘다며, 그녀를 여우 중에 상 여우라고 쑥덕거렸다. 상관없었다. 실제로 화숙의 발목을 잡은 건 남편이었지만,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싶었다. 직장 동료들이 뒷말을 할 만큼 남편은 멋진 남자였고, 누구보다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다. 결혼해서 보란 듯이 잘 살면 된다고, 남편의 지지를 받으며 곧 대학생이 될 자신을 상상하며, 화숙은 대학 가려고 붓던 적금을 깨서 혼수를 장만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15편에서 계속>

이전 13화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