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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5.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12편

                                                10

                             5월 24엑상프로방스     


  미양은 마지막 인사를 하듯 투와조모 광장 카페에 앉아 엄마가 사는 스튜디오를 바라본다. 돌이켜보면, 엄마도 이 도시도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 당시, 미양에게는 죽도록 미워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인데, 왜 그녀는 엄마에게 그 원죄를 묻고 분풀이를 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명료한 진실을 이제야,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되다니…… 미양은 엄마에게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를 기다리던 며칠 동안 투와조모 광장 카페는 그녀의 아지트였다. 

  미양은 카페에 앉아 책을 읽으며 차를 마셨고, 프로방스 요리를 먹었다. 신기하게도 프로방스 음식들이 입덧을 가라앉혔다. 공항 면세점에서 사 온 김치보다 올리브 절임이 더 입에 맞았다. 엄마가 좋아하던 올리브 잼의 고소하면서 짭조름한 맛도 자꾸 그녀의 구미를 당겼다. 

  이상하게 이곳에 온 순간부터 미양도 엄마가 좋아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좋아졌다. 




  미양은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이웃집 할머니 다니엘과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카페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미양의 말동무가 되어주더니 나중에는 엑상프로방스 가이드를 자청하고 나섰다. 

  어느 가게 올리브 절임이 맛있는지, 올리브 오일은 어떤 것을 사야 좋은지 알려주었고, 아침 시장에서 유명한 맛있는 빵집도 소개해주었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쳤던 다니엘의 영어 실력은 훌륭했다. 프랑스어가 어색했던 미양은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다니엘과 어울릴 수 있었다. 

  어제는 그녀와 함께 ‘세잔의 발자취’를 따라다녔다. 시내 곳곳을 걸어 다니다가 다니엘의 차를 타고 세잔이 그림을 그리러 다녔던 뷔베무스 채석장을 거쳐 생트 빅투아르 산에 있는 세잔의 대피소까지 다녀왔다. 

  그곳에서 미양은 데니의 추억 한 가닥과 스쳤다. 

  다니엘은 메종 드 생트 빅투아르에 주차를 하고 그곳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한 잔 마시자고 했다. 데니와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그 카페였다. 


  “여기까지 온 김에 등산도 할래요?”

  “저는 여기 카페에서 기다릴게요. 운동하고 싶으면 다녀오세요.”

  “그럴까요? 한 시간 안에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요.”


  스포츠 광인 다니엘은 트렁크에 넣어둔 등산화를 갈아 신고 날다람쥐처럼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선 회백색 산이 우람하게 빛난다. 미양은 갹송을 불러 아이스크림을 주문한다. 천천히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코끝을 스치는 바람의 향기를 느낀다.  

  그곳에는 14살 소녀가 있었다. 엄마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데니의 슬픈 눈동자를 바라보던 소녀. 그의 아픔을 달래주고 싶었던 순수한 소녀의 사랑이 선명하게 보였다. 한순간의 어리석음과 오해로 첫사랑에 씻지 못할 상처를 안겨준 바보 같은 소녀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엄마가 사는 방은 아직도 덧문이 닫혀있다. 

  마지막까지 엄마를 만나는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을 모양이다. 섭섭해하지 않기로 한다. 오히려 정겨웠던 이곳을 떠나야 하는 것이 서운하다. 엄마 덕분에 엑상프로방스와 화해를 하고 좋은 친구도 만났다. 미양은 혼잣말처럼 입을 달싹이며 고맙다고, 주문을 외우듯 말한다. 2년을 살았어도 이곳은 낯선 이방인의 도시였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이 도시가 가족처럼 친근해졌다. 눈물 나게 고맙다.   

    

  “미양. 지금부터 마음껏 노는 거야. 준비됐지?”


  화려한 스카프로 멋을 낸 다니엘이 남자 친구까지 동원하고 미양을 부추긴다. 그녀의 남자 친구는 노년의 카사노바처럼 멋진 모습이다. 

  다니엘은 오늘 하루, 도시에서 열리는 축제 속으로 마음껏 빠져들자며 히셀므광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광장 입구부터 노랫소리가 들린다. 벌써 오페라 공연이 시작됐다. 30분짜리 공연이지만 오페라의 수준이 높아 보인다. 

  노래를 부르는 오페라 가수들은 물론이고 공연을 지켜보는 관객들의 표정이 한없이 편안하다. 격식을 갖추지 않은 거리 공연은 누구에게나 쉽고 친절하게 음악을 선물하고 있다. 

  미양은 다니엘을 따라서 히셀므광장에서 시청광장 그리고 아쉐베쉐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에서 30분 간격으로 새로운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미양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오페라 선율에 몸과 마음이 무장 해제되는 느낌이다. 도시 전체가 음악회장으로 변신하는 축제가 경이롭다.      

  “벌써 3 시간 짼데 피곤하지 않아요?”
   “아뇨. 전혀요.”


  미양이 달뜬 흥분을 감추며 다니엘을 본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미양을 미라보 거리로 이끈다. 입구로 들어서자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린다. 

  미라보 거리, 헤네왕 분수대 앞에 마련된 대형 무대에서는 브라스밴드의 연주가 한창이다. 다니엘은 어깨를 들썩이며 남자 친구의 손을 잡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선다. 


  “미양. 거기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이리 와요. 어서!”


  조금 전까지 우아하게 오페라를 감상하던 다니엘이 섹시한 몸짓으로 춤추기 시작한다. 열정적으로 살사를 추는 다니엘은 엘레강스한 마담이 아니다. 나이를 잊은 그녀의 춤사위에서 젊음이 샘솟는다. 

  다니엘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미양을 댄스의 무리로 끌어들인다. 다니엘의 남자 친구가 미양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는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는 미양을 능숙하게 리드한다. 미양의 몸이 점점 음악 속으로 빠져든다.      

  춤에 몸을 맡긴 미양은 자유로운 행복감에 젖어든다. 온몸으로 축제의 열기를 느끼며 새삼 살아있음을 느낀다. 엽서 속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미양은 문득 엄마도 자신처럼 이곳에서 이런 자유와 행복을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이곳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엄마를 더는 방해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미양은 스스로 안식년을 선물한 엄마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 진다. 새롭게 만나는 엄마의 모습이 점점 좋아진다.   

   



  호텔로 돌아온 미양은 그라네 미술관에서 산 그림엽서에 짧은 메모를 적는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우선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것 같다. 사랑한다는 입에 발린 말도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엄마. 잘 쉬고 오세요. 대신 1년 만이에요.’        


  미양은 행복한 얼굴로 엄마가 사는 스튜디오 우편함에 엽서를 넣고 돌아선다. 


<1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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