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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4.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10편

                  

                                    8

                5월 20엑상프로방스    

 

  시청광장을 나선 미양은 지도를 들고 플라스 투와조모를 찾아 나선다. 엄마가 보낸 엽서에 적힌 주소, 에피노 거리 2번지는 세 그루의 어린 두릅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광장 앞에 있다. 

  리모델링한 건물은 세월의 품위를 그대로 살렸다. 오래된 돌에서 집의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미양은 건물 현관에서 ‘화숙 김’이라고 적힌 도어 벨을 발견한다. 후유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쉰다.  

  그녀는 무작정 엄마를 찾아 이곳으로 오면서 불안했다. 엄마와 연락이 안 되는 상태에서 엄마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만약, 엄마가 엉뚱한 주소를 엽서에 적은 것이라면 낭패를 당할 것이 뻔했다. 다행히 엄마는 이곳에 살고 있다. 미양은 반가운 마음으로 벨을 누른다. 

  응답이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양은 8개의 도어 벨을 모두 눌렀다. 묵묵부답이다. 낙담한 미양은 풀이 죽어 광장 카페에 주저앉는다. 메뉴판을 들고 온 갹송이 조심스럽게 미양의 안색을 살핀다. 우선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다. 미양은 프로방살 샐러드와 함께 분홍빛 와인을 주문한다. 

  크리스마스 조명이 가득한 미라보 거리 카페테라스에서 분홍빛 와인을 홀짝이던 엄마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미양은 크리스마스 방학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등교했다. 

  일주일간 집안은 시베리아 벌판보다 매섭고 추웠다. 거대한 쓰나미에 휩쓸린 현장처럼 곳곳이 상처투성이였다. 미양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다. 분을 못 이긴 아버지는 집안 살림을 집어던지며 화풀이를 해댔다. 다혈질에 흥분을 잘하는 성격이었지만 딸 앞에서 노골적으로 화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저거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버려. 빨리 한국으로 보내버리라고.”

  “알았어요. 여보. 내일 당장 보낼게요.”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버지 비위를 맞췄다. 

  침전물처럼 가라앉았던 화를 다 걸러낸 후에야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현실적인 엄마의 타협안에 동의했다. 미양은 프랑스에 남게 되었다. 겉모양은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지만 이미 부녀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늘 그렇듯이 그녀를 야단치고 다독인 사람은 엄마였다. 그녀는 매일 밤, 엄마와 아버지가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데니를 생각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호의를 오해한 그를 원망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미안해졌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실수한 것이 분명했다. 미양은 아버지의 주먹을 고스란히 받아내던 그의 서늘한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던 날, 미양은 제일 먼저 데니를 찾았다. 그날 일을 사과하고 용서를 빌 생각이었다. 데니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참 뻔뻔하다. 무슨 생각으로 학교엘 온 거야?”


  소피아가 미양을 노려보며 다가왔다. 소피아의 뒤를 따르던 로잘린의 눈빛도 무서웠다. 그들은 미양과 데니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날 일로 데니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데니와 미양의 아버지들끼리 어떤 합의를 했는지, 결국 데니가 학교를 그만두고 런던에 있는 형에게로 간 사실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미양도 모르던 진실이었다.     

  소피아는 데니를 자신들로부터 빼앗은 미양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를 공공의 적으로 몰아세웠다.


  “네가 먼저 집에서, 단둘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며? 그거, 같이 자자는 소리라는 거 몰랐어?”


  로잘린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미양은 말없이 로잘린을 바라보았다. 정말 몰랐다. 데니가 몇 번이나 확인했을 때도 몰랐다. 알았다고 한들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미양은 더는 변명도, 할 말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로잘린의 시선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날 이후, 미양은 왕따가 됐다. 소피아는 반 친구들을 선동해서 그녀를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아무도 그녀와 말을 섞지 않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에취”


  소피아는 미양이 지나갈 때마다 호들갑스럽게 재채기를 해댔다. 


  “왜 자꾸 재채기가 나지? 귀신이 지나가면 그런다던데?”


  친구들 눈에 미양은 존재하지 않았다. 미양이 아무리 살갑게 다가가도 매정한 따돌림은 계속됐다. 

  그녀에게 실망한 로잘린의 반응은 더 심했다. 그녀를 얌전한 척하다가 부뚜막으로 냉큼 올라간 고양이 취급을 하면서 미워했다. 일부러 미양의 발을 걸어 넘어트렸고, 미양의 노트에 저급한 욕을 잔뜩 써놓기도 했다. 

  친구들의 냉대와 무시 그리고 집단 따돌림은 미양을 움츠리고 주눅이 들게 했다. 아무도 미양과 점심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고 과제 발표도 함께하지 않았다. 미양은 온종일 말 한마디 못 한 채 멍하니 수업만 들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미양은 무기력해졌고 우울했다. 

  처음에 미양은 친구들이 자신에게 화가 나서 그러는 거라고 여겼다. 데니에게 잘못한 것만큼 친구들에게 벌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홀로 모래바람이 가득한 사막을 헤매다 죽을 것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살기 위해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거취를 결정할 능력이 없었다. 누군가 그녀의 외롭고 힘든 영혼을 위로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 이 시간들을 함께 견뎌내자며 넉넉한 가슴으로 그녀를 안아줄 사람이 그리웠다. 


  엄마는 좌절하고 쓰러지려는 미양을 냉정하게 몰아세웠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는 스스로 책임지고 이겨내야 한다며 그녀를 강하게 다그쳤다. 엄마는 미양의 얼굴에 짙게 드리운 그늘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미양은 유령처럼 살아야 하는 학교생활에 지쳤다. 엄마 앞에서 학교 가기 싫다고, 죽을 것 같다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악을 쓰며 울었다. 소용없었다. 엄마는 왜 미양이 학교 가기 싫어하는지 묻지 않았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미양이 엄마에게 눈물로 도움을 청할 때마다 날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제발 철없는 소리 좀 그만해. 뭘 잘했다고 맨날 학교 가기 싫다는 거야? 너 이러는 거 아빠가 알면 또 난리 나는 거 몰라? 힘들수록 공부해. 네가 공부만 잘하면 아무도 너를 무시하지 못해. 건드리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징징거릴 시간에 공부해. 알았어?”      


  엄마는 매일 똑같은 잔소리로 그녀를 닦달했다. 미양은 그런 엄마에게서 진정으로 딸을 걱정하기보다 어렵게 얻은 프로방스의 삶을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초조함을 읽었다.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이 미양으로 인해서 다시 폭발할까 두려워하며 딸을 단속하는 일에 목숨을 거는 것 같았다. 

  결국, 미양은 엄마를 향해 열어두었던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다.  


<11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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