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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Jul 04. 2021

따로 또 같이 프로방스를 걷다

9편


  다시 데니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12월 말. 겨울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햇볕이 따뜻한 날이었다. 아침 일찍 엄마와 아버지는 니스로 결혼 기념 여행을 떠났고, 미양은 개학 후에 있을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데니는 엄마 이야기에 목말라 있었다. 미양은 반가운 친구에게 온 편지를 받아 든 기분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고 이후 가족이 겪은 불행부터 그의 엄마가 자신을 버린 나라를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했었다는 것까지 남김없이 들었다.      

  데니의 눈가가 자꾸 촉촉해졌다.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따뜻한 말이 필요했다. 특별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형식적인 인사, 아이 엠 쏘리… 만 반복했다. 그녀가 미안한 일은 아닌데, 그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때, 문득 그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미양의 깊은 곳에 숨어있던 모성애가 피어오른 것 같다. 마침 엄마가 여행 가며 만들어 놓은 밑반찬들도 떠올랐다.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을래?”


  데니는 미양의 즉흥적인 제안에 당황했다.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다시 한번 미양의 저녁 초대를 확인했다. 어마어마한 퍼즐 조각 앞에 선 아이처럼 심란한 표정도 지었다. 

  미양은 데니가 저녁을 먹자는 말에 왜 그렇게 놀라고 당황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정말 괜찮겠냐고 물었다. 미양은 정말 괜찮다는 뜻으로 그의 손을 꼭 잡고 살짝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미양을 바라보는 데니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후 햇살이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다. 거리를 장식한 조명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도시는 곱게 화장을 한 여인처럼 성숙해졌다. 무언가 고백하기에 좋은 시간이었다.      

  미양은 그에게 밥상을 차려줄 생각에 들떴다. 

  냉장고에 가득한 반찬 덕분에 상차림이 쉬웠다. 미양은 쌀을 씻어서 따뜻하게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엄마에게 배운 새우요리와 치즈를 듬뿍 넣은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데니는 식탁에 앉아 능숙하게 요리하는 미양을 바라보았다. 요리하는 미양의 얼굴이 새색시처럼 붉어졌다. 


  “너, 굉장한 요리사 같다.”

  “하하 폼은 그럴듯하지? 그렇지만 맛은 장담 못 해.”


  ‘내가 만든 음식을 데니가 좋아할까.’ 미양은 아까부터 그것이 걱정이었다. 다행히 데니는 음식을 맛있게 잘 먹었다. 저녁을 먹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데니는 서툰 젓가락질로 반찬들을 집어 올리며 소풍 나온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후식으로 초콜릿 케이크까지 먹자 배를 두드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창밖의 어둠이 짙어졌다. 디저트 접시를 치우기 무섭게 데니가 미양에게 다가왔다. 그의 숨소리가 불규칙하게 떨렸다. 미양은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며 잠든 숲 속의 공주처럼 눈을 감았다. 그의 슬픈 영혼을 위로해 줄, 아름다운 키스를 선물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가볍게 그러나 조금씩 더 깊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의 키스는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디저트로 먹은 초콜릿 케이크보다 더 달콤했다. 입안에서 전해지는 행복이 온몸의 혈관을 통해 흐르며 그녀를 자극했다. 키스에 취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이대로 모든 것이 멈춰도 좋을 것 같았다. 

  데니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목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느낌이 묘했다. 그의 따뜻한 입김을 더 느끼고 싶지만 두려웠다. 그의 손이 거침없이 미양의 브래지어 속으로 들어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그녀의 이성이 먼저 반응했다. 여기까지는 아직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의 손을 뿌리쳐야 하는데 굳어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미양은 몽롱해지는 몸을 부추기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데니의 사랑을 갈망했지만 이런 방법은 아니었다. 데니의 손이 더 아래로 내려오는 순간 미양은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이러지 마. 우린 아직 어리잖아.”


  데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구정물 세례를 받은 표정이었다. 


  “미안해 데니. 근데 이건 아닌 것 같아.”


  그의 얼굴이 무너져 내리는 빙하처럼 섬뜩하게 일그러졌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말이야?”

  “말했잖아. 우린 아직 어리고, 아직 이건 아니라고.”

  “섹스를 원한 건 너였잖아?”

  “섹스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래서 날 초대한 게 아니었니?”

  “아, 아니야 그건.”

  “너, 날 비참하게 만들려는 거야?”


  그의 눈이 분노로 흔들렸다. 수치심처럼 강렬한 뜨거움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그 어떤 분노의 감정보다 그녀를 원했다.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데니는 뒷걸음질 치는 미양을 향해 다가갔다. 완력으로 그녀를 쓰러트리고 가슴을 더듬었다. 작고 보드라운 가슴이 공포에 젖어 바들바들 떨렸다. 가학적인 본능이 솟구쳤다. 그녀를 차지하고 말겠다는 수컷의 본능에 휩싸였다. 데니는 미양의 옷을 거칠게 벗기기 시작했다. 제발 이러지 말라는 그녀의 애원이 그를 더 흥분시켰다. 


  “이게 바로 네가 원하던 거 아니었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미양이 울면서 오해였다고, 자신이 원한 건 섹스가 아니라 그냥 저녁 한 끼였다고 말해도 믿지 않았다.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분노로 가득했고 미양을 다루는 손길이 거칠었다. 

  미양은 자신이 뭘 그렇게 잘 못 했는지,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자존심까지 짓밟겠다고 달려드는 데니가 두렵고 무서웠다.      


  “미양아!”


  미양이 마지막 힘을 다해 데니를 밀어내는 순간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거친 주먹이 데니를 향해 날아왔다. 딸이 성폭행을 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아버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성을 잃기는 데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미양을 끌어안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찢어진 옷을 더듬다가 담요를 가져왔다. 그녀보다 엄마가 먼저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엄마는 안간힘을 쓰듯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한숨을 쉬듯 엄마는 괜찮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괜찮은 건 아니었다. 데니를 죽일 듯이 달려드는 아버지의 살기 가득한 눈빛,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아버지의 주먹을 받아들이고 있는 데니의 자포자기하던 눈빛. 모든 것이 괜찮지 않았다.           

<10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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