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편
7
미양의 증세는 더 심해졌다.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열병으로 들뜬 사람처럼 그날의 키스만 생각했다. 밥을 먹다가, 공부하다가, 샤워하다가도 몽롱한 눈빛으로 데니를 생각했다. 울면서 전해주던 그의 엄마 이야기도 자꾸 귓전을 맴돌았다. 그녀를 닮았다는 데니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했다.
데니 엄마는 프랑스 가정에 입양된 한국인이었다. 엄마의 양부모는 한국에서 온 여자아이를 천사라고 부르며 예뻐했다. 돌이 겨우 지난 아이는 낯선 프랑스 부모를 보고 방긋방긋 웃었고, 넘어져도 울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 종알종알 떠들던 예쁜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렀고, 하늘하늘한 몸짓으로 춤도 잘 추었다.
양부모를 가장 흥분시킨 것은 공부였다. 시험이라고 이름이 붙은 모든 것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시험 바칼로레아에서도 최우수 성적을 받았다. 의대에 진학한 뒤에도 데니 엄마의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친구들은 2학년, 3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할까 전전긍긍했지만 데니 엄마는 항상 느긋했다. 방학 때마다 외국여행을 다니며 인생을 즐기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데니에게 전화가 왔다. 시청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미양은 생전 처음 엄마 화장대 앞에 앉았다. 엄마가 아끼던 에센스에 옅은 파운데이션을 살짝 발라 멋을 냈다. 가장 무난한 립스틱을 골라 입술에 바른 후, 립글로스로 마무리했다.
입을 옷을 고르는 것도 힘들었다. 아무리 옷장을 뒤져도 마땅히 입을 옷이 없었다. 엄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스웨터와 매치해 입을 바지나 치마를 선택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다 보니 맥이 풀렸다. 이건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미양은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바라보았다. 첫 데이트를 앞두고 허둥대는 모습.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여자다. 무의식 중에 손가락으로 입술을 더듬었다. 촉촉한 그날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두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미양은 스웨터 밑에 짧은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가는 발목이 두드러져 보이도록 검은색 스타킹에 빨간색 단화를 신었다. 첫 데이트를 할 준비가 모두 끝났다.
데니는 시청 앞 분수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순간 미양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고개를 든 데니와 눈이 마주쳤다.
“왔구나.”
미양이 쭈뼛거리며 다가서자 데니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그날의 우울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 생트 빅투아르 산에 갈래?”
“나, 오늘 구두 신었는데?”
데니의 시선이 미양의 발목으로 향했다. 작은 두근거림이 미양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데니가 슬며시 미양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냥 생트 빅투아르 산에 있는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니까.”
미양은 데니를 따라 생트 빅투아르 산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엑상프로방스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톨로네 마을을 지나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겨울 산이 푸르렀다. 진초록빛 프로방스 소나무 잎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잠깐만.”
버스가 산길로 꺾어지는 순간 데니가 갑자기 미양의 눈을 가렸다. 가늘고 긴 손가락의 감촉에 놀란 미양은 질끈 눈을 감았다.
“이제 됐어. 짜잔”
눈을 가렸던 데니의 손이 사라지자 거대한 석회암 덩어리가 나타났다. 은백색의 커다란 산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우뚝 선 모습에 미양의 가슴이 뛰었다. 주름진 석회암 산은 거인의 치마폭 같았다.
“저기 산꼭대기에 십자가 보이지?”
“응.”
“제일 처음 십자가를 세운 사람은 뱃사람이었대.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항해를 끝내고 돌아온 그는 하나님께 처음 만나는 산 정상에 십자가를 세우겠다고 맹세를 했다는 거야.”
“그 산이 생트 빅투아르 산이었구나.”
“그렇지. 마르세유에서 엑상프로방스로 오는 길에 이 산을 봤겠지?”
“정말 아름답다.”
산을 바라보는 미양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세잔이 왜 화구를 짊어지고 매일매일, 이 산을 올랐는지 알 것 같지?”
데니와 미양은 메종 드 생트 빅투아르에서 내렸다. 산에 관한 모든 것을 전시해 놓은 작은 박물관과 카페가 있는 공간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햇살이 노천카페로 쏟아져 내렸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전혀 춥지 않을 날씨였다.
“정말 우리 엄마 이야기가 궁금해?”
데니가 앙증맞게 서 있는 올리브나무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랑 닮았다고 했잖아. 어떤 분이셨는지 알고 싶어.”
미양이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데니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엄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얼굴이었다.
“엄마가 런던으로 여행을 왔다가 지갑을 잃어버리셨대. 레스토랑에서 저녁 값을 계산하려다가 지갑이 없는 걸 알게 된 거야.”
부모의 첫 만남을 설명하는 데니의 표정이 환하게 빛났다. 그다음은 뻔한 스토리였다. 음식 값을 치르지 못해 쩔쩔매는 엄마를 우연히 본 아빠가 대신 계산했고, 엄마는 신세를 지는 김에 호텔비까지 내달라고 뻔뻔한 제안을 했다는 거였다. 엄마의 나머지 여행을 책임진 아빠는 빚을 받는다는 핑계로 프랑스로 놀러 왔고, 그 길로 눌러앉았다고 했다.
“그게 가능한 일이야?”
미양은 이해가 안 됐다.
“불가능할 것도 없지. 두 분 다 성인인데.”
“가족들이 반대는 안 했고?”
“뭐, 약간. 아빠네 집안이 대단하거든. 근데 쉽게 허락을 받았대”
“어떻게?”
“엄마랑 결혼하면 날씨 좋은 프로방스에서 살 수 있다고 했더니, 금방 오케이 하셨대.”
“그게 무슨 말이야?”
“프로방스는 영국인들에게 로망의 땅이거든.”
미양은 데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냥 들었다. 흡족한 그의 미소가 좋았고 엄마를 추억할 때마다 짓던 그의 환한 웃음을 보고 싶어서였다.
사랑을 찾아 프로방스에 정착한 데니 아빠는 우선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사이 엄마는 의대를 졸업하고 엑상프로방스 시내에 조그만 사무실을 얻어서 개업했다. 신경외과 전문의가 되고 싶었지만, 데니의 형을 임신하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꿈을 버리고 일반의가 되었다.
데니 아빠는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사업을 했다. 튼튼한 자본에 뛰어난 사업수완이 더해져서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다.
“엄마랑 난 생일이 같아.”
데니의 형이 아빠를 닮았다면 데니는 엄마 판박이였다. 물론 외모는 아빠를 더 닮았지만, 내면적인 모든 것이 흡사 소울메이트처럼 엄마를 닮았다. 어린 시절 데니는 엄마와 자신은 한 몸일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에게 엄마는 세상 전부였다.
그런 엄마가 미라보 거리에서 음주운전자가 모는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 엄마가 용기를 내서 한국에 사는 가족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데니는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없는 세상은 살아야 할 이유와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살아지더라. 엄마가 없어도 나는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있더라. 세상도 그래. 엄마가 사라졌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잘 돌아가고 있더라고.”
데니의 눈 주위가 붉어졌다. 미양은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형도 6개월 전에 영국으로 떠났어. 더는 엄마의 부재를 견딜 수 없었나 봐.”
미양은 침울해지는 데니의 눈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씌워진 슬픔의 더께를 모두 벗겨내고 싶었다. 그의 아픔을 나누어 갖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9편에서 계속>